예상보다 빠른 라이카의 움직임에 놀란 것도 잠시, 나도 서둘러 뛰쳐나가려던 순간 떠벌이가 의외의 명령을 내렸다.
"당장 무기 버려!"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은 '이 새끼가 정신을 못 차리고 명령질이네?'였으나 떠벌이는 자신의 무기를 땅바닥에 내던짐으로써 내 오해를 바로잡아 주었다.
이 정도까지 적극적인 대화 의지가 있으면 응하는 게 올바른 문명인의 자세지.
"라이카. 잠깐 멈춰."
그가 무기를 버린 타이밍은 참 기가 막혔다. 라이카가 이제 막 용병 한 명의 정강이를 물어뜯으려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그의 과감한 결단 덕분에 이어지지 않았으니까.
꾸준하게 스스로 주장했던 것처럼 라이카는 말을 잘 들었다. 용병의 정강이를 물어뜯으려고 입을 쩍 벌린 상태 그대로 '잠깐' 멈춘 녀석을 바라보며 우왕좌왕하는 용병들을 향해 떠벌이가 한 번 더 외쳤다.
"의뢰주가 우릴 속였다! 무기 버려!"
움찔거리면서도 쉽사리 무기를 내려놓지 못하던 녀석들은 의뢰주가 배신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눈빛이 바뀌더니 주저 없이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 광경을 보며 한숨을 내쉰 떠벌이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일단 이거로 잠깐 멈춰줄 수 있을까?"
"합격. 라이카, 돌아와."
어차피 개수작이라도 지금의 나에겐 대응할만한 능력이 있다. 저렇게까지 백기를 들고 할 말이 무엇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지.
궁수들에게 날렸던 바늘도 휘파람으로 회수하고 라이카도 깡깡 거리며 내게로 뛰어오자 그제서야 떠벌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 이어진 자초지종은 나로서도 전혀 예상못한 내용이었다.
"내가 아닌지 물어봤다고?"
"그래. 혹시 목표 이름이 엘드미아가 아닌지 물어봤는데 그 씹새가..."
놀랍게도 떠벌이네 용병단의 현재 방침 중 하나가 내가 엮여있을 경우 발을 빼는 거라고 한다. 엔벨데 저택 사건 이후 생겨난 지침이라 꼭 확인하고 넘어가는 조건이라는 이야기에, 숙원 달성에 한 발 다가간 기분이 들어 괜시리 가슴이 벅차올랐다.
"씨발, 모험가 길드장이라는 새끼가 순 개만도 못한..."
"그 새끼가 그런 새끼긴 하더라고."
검도 마저 집어넣으며 대답하니 떠벌이가 제 입을 막으며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연신 눈이 움직이는 걸 보면 참으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정작 무기를 버린 뒤로 뒤에 있는 용병들은 별생각이 없는 것처럼 멀뚱히 서 있기만 해서 괴리감이 느껴진다.
생각하는 놈이랑 행동하는 놈이 확실히 구분 지어져 있는 건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용병단일지도.
"하아, 이런. 사과부터 해야 하는데 너무 화딱지가 나서 정신머리가 없었군. 정말 미안하게 됐어 엘드미아 형씨. 수도에서의 유명세는 우리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굉장히 체계적인 용병단인 거 같은데, 난 그쪽을 추켜세워줄만큼 그 바닥 정보에 밝지 못해서 뭐라 할 말이 없네."
"모험가와 용병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우리도 형씨가 엔벨데 모가지 안 땄으면 모르고 살았겠지."
"맞는 말이야. 그래서, 생각은 정리 되셨나?"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잠깐 멈춘 것에 불과하다는 건 굳이 상기시켜 줄 필요도 없어 보였다. 떠벌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방금 형씨의 공격으로 죽은 우리 애들 여섯 명. 일당이 은화 여섯 개인 친구들이었거든? 사과의 의미로 금화 한 개에 은화 스무 개를 줄 테니 이번 일은 좀 봐주면 안 될까?"
내놓으라고 할 줄 알았더니 내놓겠다는 이야기였네. 용병들의 계산법인지 뭔지 몰라도 매우 쿨해서 마음에 든다. 적반하장의 또라이였다면 한참을 더 뜯어먹거나 다 죽이고 벗겨 먹었을 텐데 말이지.
"오해를 바로잡기에 부족함이 없는 금액이네. 반가워 친구."
거래 성사의 의미로 악수나 할 겸 손을 내밀자 떠벌이는 헛웃음과 함께 내 손을 맞잡았다.
"이야, 말이 통해서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형씨 소문이 워낙 중구난방이라서 많이 쫄렸거든."
대체 어떤 소문인지 참으로 궁금하게 만드는 발언이었지만 자기들 스스로 유명한 용병단이라고 말하는 용병이 사상자까지 났음에도 먼저 손을 들게 만드는 소문이라는 점에서 딱히 좋은 소문 같지는 않아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이제 내 일행들도 밖으로 나와도 되려나?"
"물론이지. 자, 여기 돈 받고...그, 이것도 인연인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그러면서 은근슬쩍 은화 하나를 더 얹어 주는 떠벌이는 실로 질문하는 자세가 되어 있는 친구였다. 난 구태여 하나하나 세어보지 않고 돈주머니에 넣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뭔데?"
"엔벨데 백작한테 기쉬라고 꽤 유명한 망나니 새끼 하나 있었거든? 혹시 걔하고도 싸웠나?"
"기쉬? 자칭 마족 도살자라던 놈이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은데."
"어, 그놈 맞아! 보아하니 싸웠구만? 어땠어? 강했나?"
"별로? 엔벨데가 훨씬 더 강하던데."
그야말로 훨씬 이라는 표헌이 딱 맞았지. 벌써 아련해지는 기억을 되새기며 대답했더니 떠벌이가 박수를 치며 말을 이었다.
"역시! 우리 용병단 안에서 그걸로 존나 시끄러웠거든! 엔벨데 목을 딴 인간인데 기쉬는 좆도 아니었을 거다라고 말하는 놈들이랑, 엔벨데 그거 다 늙어서 이빨 빠지고 기쉬가 더 강하다는 멋모르는 놈들이랑 진짜 말도 아니게 떠들었단 말이지!"
"이빨 빠지긴 씨벌 직접 칼 섞어보면 두 합만에 목 베일 소리 하고 자빠졌네. 너희 용병단 그래도 괜찮겠냐?"
"으하하핫! 괜찮아 괜찮아! 칼밥 먹는 놈들 그러면서 배우는 거지! 못 배우면 뒈지는 거고!"
과연. 살인으로 먹고 사는 용병답게 방금 동료 여섯 명이 죽어 나갔는데도 아무런 거부감없이 마치 십년지기 친구처럼 살가운 반응이다. 뭐, 어중간한 적의를 지니고 눈깔 굴리는 것보다는 백번 나으니 나야 좋지만.
"그보다 길드장한테 의뢰 받은 게 언제야? 그 새끼 아직 길드에 있나?"
"글쎄? 한 세 시간 됐나? 우리도 술이나 축내다가 굉장히 급하게 받은 의뢰였어."
내 손짓에 천천히 밖으로 나온 일행은 마치 친한 친구처럼 살갑게 대화 중인 나와 떠벌이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침묵을 유지했다. 다행히 용병들은 혹여라도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무기를 다시 줍지도 않은 채 발로 밀어 옆으로 치우며 죽어 버린 동료들의 시체를 수습하기 시작했고, 난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떠벌이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 씹새가 뭐라며 의뢰하디?"
"제 권위를 손상시킨 씹새가 있으니 수로에서 살아 나오면 죽여 달라던데. 일정 시간 동안 안 나오면 안에서 죽었는지 확인해 달라는 거까지. 선지급으로 보수 절반 받고 너희 털어서 나왔을 전리품 다 우리꺼라는 식으로 거래했지."
"이 새낀 진짜 뒤졌다."
내 진심 어린 반응에 떠벌이는 낄낄 거리며 옆으로 비켜 주었다.
"바쁠 텐데 더 붙잡진 않을게. 난 푸른 올빼미 용병단의 발라키아 라고 해. 또 볼 기회가 있다면 술 한잔 사지."
"그땐 나도 사지."
죽인 놈들에 대해 미안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미안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해가 없었다면 어차피 서로 죽이려고 발버둥 쳤을 테니까.
그렇게 웃으며 배웅해주는 떠벌이 발라키아와 그 동료들을 뒤로한 채 수로의 진입로를 벗어나 도시의 대로로 나온 나를 향해 렐리에가 기이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에가 씨? 대체 뭘 하고 다녔길래 푸른 올빼미 용병단이 먼저 빠져요?"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지금 수도에서 제 별명이 뭔지 다 알고 있잖아요."
"아니, 그거야 좀 과장이 보태졌다고 여기고 받아들인 거죠. 용병단이 먼저 물러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결국 자존심과 명성으로 먹고사는 직업이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도 내 소문을 잘 모르니 어디까지가 찐이고 어디부터는 구라인지 구분 지어 말해주기 매우 난감하다.
"그냥 단두대라고 불릴 만한 짓은 확실히 하고 다닌 거 같네요. 나머지는 워낙 헛소문도 많아서 모르겠고."
"...허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도 전생 후의 삶에서 몬스터보다 사람을 더 베고 다니게 될 줄 몰랐으니까.
◈
그렇게 큰 분쟁이 생길 뻔한 용병단과 예상 밖의 원만한 해우를 마친 나는 일단 일행과 갈라져서 혼자 길드로 향했다. 정확히는 뽈뽈 거리며 따라오는 라이카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전부 여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어차피 길드장의 목을 베는 건 기정사실인데 괜히 같이 있어 봤자 골치만 아플 테니까. 내 개인적인 사생활로 애먼 동료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지.
"라이카. 내가 뭘 하든 명령하기 전까지는 가만히 있어야 한다?"
[알았어! 라이카 말 잘 들어!]
그래, 잘 듣긴 하더라. 난 길드 앞에서 라이카의 머리를 토닥여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힘껏 길드의 대문을 걷어찼다.
-콰앙!
마력까지 이용해서 정말 있는 힘껏. 혹여 지난번 엔벨데의 저택에서처럼 튼튼한 경첩 때문에 스윙도어처럼 돌아온 대문에 맞지 않기 위해서.
그땐 철문이었고 지금은 나무 문이라는 걸 간과해 버린 결과는 좀 처참했다. 무슨 대포알이라도 맞은 것처럼 나무 문이 박살 나며 비산한 것이다.
"으아악!?"
"무,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씹새들아. 니네 길드장 묫자리 깔아야 할 일이지."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였지만 그래도 속 시원하게 박살 나니 나쁘진 않았다. 나에게로 쏟아지는 모험가와 길드 직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잠깐 주변을 둘러본 나는 검을 뽑으며 물었다.
"길드장 어딨어."
"이, 이건 도가 지나치잖습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도는 그 씨발 새끼가 나 죽이라고 용병 보낸 그 순간 진즉에 지나쳤어. 뒈지기 싫으면 길드장 불러."
칼날을 까딱이며 앞으로 튀어나오려는 접수원을 견제하자 녀석은 앞으로 나오려고 했을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관련 없는 모험가들은 대체 뭔 일인가 싶어 흥미진진 눈빛으로 구경하기 시작했는데, 정작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하는 길드원들은 꼼짝도 안하고 있는 꼴이 영 거슬린다. 쿤즈는 없는 건가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보이질 않았다.
"안 데려와? 너희 다 한통 속이냐?"
"이, 이보세요. 대체 무슨 말입니까? 길드장께서 용병을 고용해서 당신을 죽..."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되물어도 나올 거라고는 내 말 씹고 질문하는 새끼 목에서 나올 피밖에 없다. 지랄말고 길드장 데려와. 내가 올라가면서 여기 다 부숴 버리기 전에."
다행히 두 번째로 나선 놈의 행동은 마음에 들었다. 순식간에 몸을 돌려 2층으로 뛰어올라간 녀석을 기다리며 짝다리를 짚고 서 있기를 약 2분.
그렇게 돌아온 놈이 사색이 되어 입을 열었다.
"자, 자리에 없습니다."
"뒈질래?"
"지, 진짜 없습니다! 심지어 사무실은 야반도주라도 한 것처럼 난장판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놈을 밀치고 2층으로 올라갔지만 나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반응을 마음에 들어할 틈도 없이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는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그렇게 성큼성큼 걸어 길드장의 집무실로 예상되는 곳에 들어선 내 눈에 비친 건 금고같은 게 아무렇게나 열려 있는 광경과 온갖 서랍들을 헤집어 놓은 난장판이었고, 그게 의미하는바는 너무나도 뻔했다.
"이 개씨발..."
그론즈엘 이 천하의 씹새끼가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