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스럽다.
그론즈엘의 머릿속을 맴도는 건 오직 그 말뿐이었다.
어디서 근본도 알 수 없는 모험가 나부랭이가 튀어나와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다는 것부터 기가 찰 노릇이었다. 심지어 그 이유조차 어이가 없다. 심증만 있고 물증도 없는 상태도 폭력을 휘두르다니. 야만인도 그런 야만인이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화가 나는 건, 그런 야만인을 처리하기 위해 고용하려 했던 이들의 반응과 태도였다.
수년간 사업 동료로 일해 온 깡패는 조언같지도 않은 조언을 마지막으로 발을 빼 버렸고 화를 참아가며 대신 고용하려 했던 용병단은 대뜸 대상이 엘드미아 에가인지 아닌지부터 따지고 들었다. 생판 들어 본 적도 없는 잡것이 대체 무슨 미친 짓거리를 하고 다녔는지는 몰라도 미개한 것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한 건 사실인 듯했다.
결국 그 겁쟁이들을 속여 수로로 향하게 만든 뒤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해 급하게 필요한 것들만 챙긴 그론즈엘은 자신의 은닉처에 물건들을 숨겨 놓은 뒤 이를 갈며 움직이는 중이었다. 혹여 용병들이 멀쩡히 돌아온다면 자신들을 속인 것에 대해 불만을 품겠지만... 제까짓 것들이 뭐 어쩌겠는가? 아무리 용병이라 한들 정말 오늘 하루만 사는 것도 아니니 알아서 기어 다닐 것이다.
"그래 봤자 한낱 모험가에 불과한 새끼가."
자신도 한 때 모험가였으나 이미 길드장의 위치에서 고위 관료와 귀족들을 대하다 보니 급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고 제멋대로 믿는 그론즈엘이었다.
하지만 주변에 그런 잘못된 사고방식을 바로잡아줄 이조차 없었기에 그는 철저하게 자신이 옳다고 믿으며 평소 신세를 지던 귀족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엔글렘에서 가장 호화로운 저택 중 하나이자 많은 개인 사병과 용병을 과시하는 곳 답게 예법에도 없는 쓸데없는 절차를 거쳐 만난 귀족은 통통한 볼살을 출렁이며 웃음으로 그를 맞이했다.
"아니, 세상에. 그론즈엘 자네가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인가?"
망할 돼지 새끼. 뻔히 알고 웃는 주제에 가식떠는 꼴하고는.
정말 급하게 부탁할 게 생기지 않으면 단 한 번도 예고 없는 방문을 한 적이 없었던 그론즈엘이었다. 그 행동방침은 그에게 도움을 주는 이들에게 충분히 학습된 상태였고, 이렇게 방문한 그론즈엘은 항상 큰 금액으로 보답한다는 것 역시 잘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귀족도 마찬가지였고.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불구하고 직접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작님. 다름이 아니라 남작님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라..."
"헛헛. 남작이 아니라 준남작이라니까. 자네는 항상 실수하는구먼!"
"이런, 뷩스 준남작님만 뵈면 이러는군요. 워낙 귀족의 품격이 충만하셔서 그런가 봅니다."
뻔히 입에 발린 칭찬을 던져도 뷩스 준남작이라 불린 남성은 적당히 손사래만 칠 뿐 헤벌쭉 웃으며 적극적으로 정정하려 들지 않는다. 가식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태도였으나 그론즈엘은 괘념치 않았다. 비록 전쟁을 틈타 돈을 주고 산 작위라고는 하나 그만큼 뷩스 준남작은 돈이 많았고, 엔글렘에서만큼은 영주인 남작 못지않은 영향력의 소유자였으니까.
수도에도 연줄이 있는 탓에 몇 년간 급성장해 온 그의 힘은 최근 몇 주간 잠잠히 있었다고 해서 사라질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손님을 이리 세워두는 건 예의가 아니지. 어서 들어오게. 도움이 필요하다니 내 성심성의 껏 도와줘야 하지 않겠나."
그론즈엘의 어깨에 친근하게 손을 올리는 뷩스 준남작의 태도와 움직임은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딱히 걱정거리도 없어 보일 뿐더러 혈색은 오히려 더 좋아진 듯했다. 역시 수도에 있던 연줄을 잘못타서 갑자기 몸을 사린다는 소문은 낭설에 불과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론즈엘은 뷩스 준남작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남작님. 다름이 아니라 법을 모르는 무뢰한이 제 신변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라서요."
"맙소사. 엔글렘의 발전에 항상 이바지하는 자네를 위협하다니. 대체 어느 근본 없는 천민이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일부러 남작이라고 불렀음에도 뷩스 준남작은 정정하지 않으며 그 호칭을 즐긴다. 자신을 걱정하는 척 연기하는 표정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과시욕에 진저리치게 되는 속마음을 애써 감추며 그론즈엘 역시 난감함을 연기했다.
"엘드미아 에가라는 모험가 나부랭이입니다. 이번에 저희 도시를 혼란하게 만든 도적놈들 소탕을 의뢰했더니, 다짜고짜 온갖 핑계와 날조를 들먹이며 절 위협하고 보상을 뜯어내려하더군요."
"허어! 못 배워 먹은 것들이란. 어디 왕국 법이 버젓이 바로 서 있는데 그런 야만인같은 짓을!"
"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이미 제가 개인적으로 용병을 고용해 조치를 취해 보았으나, 그치들도 결국 못미더운 건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결국 이렇게 믿고 부탁할 수 있는 인물을 되새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남작님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결국 뷩스 준남작이 보유한 사병이라고 해봤자 스무명 남짓이고, 그 외엔 자신이 고용했던 푸른 올빼미인지 부엉이인지 하는 용병들과 다를 바 없는 것들이었지만 당연히 그론즈엘은 그 사실을 입에 담지 않았다.
"걱정 말게나! 내 당장 병력을 움직이도록 하지!"
"정말 감사합니다 남작님."
"흠흠, 내 예상에 의하면 어차피 놈이 수로에서 기어 나온다 하더라도 용병과 싸우게 될 것이고, 그마저도 물리친다한들 피폐해진 몸을 이끌고 자네에게 항의하기 위해 길드로 향할 테지. 내 사병들을 길드로 출병시킬 터이니 자네는 안심하고 기다리게나!"
병력이니 출병이니, 전쟁 한 번 안 해 본 주제에 거창한 단어를 써가며 전략이라도 짜듯 떠벌이고 심취한 꼴이 퍽 우스웠으나 그론즈엘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웃음기를 숨길 수 있었다. 정확히 엘드미아가 수로를 벗어나 푸른 올빼미 용병단과 조우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현재에 이르게 된다.
"지금 뭐라고 했냐?"
길드장의 집무실을 확인하고 분노에 찬 상태로 1층으로 내려 온 엘드미아는 모험가 길드 홀에 정렬해 서 있는 스무 명의 사병들을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깡깡 거리며 다가온 라이카가 그의 발치에 앉아 꼬리를 흔드는 것을 보고 최대한 화를 억누르며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지만, 정작 상대의 입에서 나온 건 말이 아니라 방귀였다.
"네놈을 길드 사유 재산 훼손, 공갈 및 협박, 살인 미수, 절도 등의 혐의로 체포하겠다고 했다."
너무나도 당당한 사병의 태도에 엘드미아는 두 눈을 껌뻑이다가, 비벼보고, 다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사병이었다. 무릎을 꿇고 라이카를 쓰다듬으며 한 번 더 화를 삭힌 엘드미아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도시 경비대나 순찰대도 아닌 너네가 무슨 권한으로?"
"우리는 엔글렘의 명망 있는 귀족 뷩스 남작님의 사병대이다! 도시의 유지有志로서 이런 사태를 묵과하지 못한 뷩스 남작님께서 직접 칼을 뽑아드셨으니 얌전히 연행에 따르도록!"
"...도시의 유지? 남작이라며? 엔글렘의 영주님 말하는 거 아니야? 너희 경비대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당당하게 떠들어 대니 이젠 슬슬 스스로의 언어 이해 능력에 하자가 생긴 건가 의구심이 들 지경이다.
관문도시는 공작이나 백작들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왕실을 따르는 남작령으로 지정된다. 수도도 아닌 도시에 남작이 둘이나 있을 수는 없으니 저 뷩스인가 뭔가 하는 자가 정녕 남작이라면 그가 엔글렘의 영주이고, 그의 사병은 정식으로 군의 표식을 달거나 경비대 내지는 순찰대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
아니면 설마 남작이 둘이라고? 이세계에서 쌓아온 자신의 상식을 어긋나게 만드는 대화에 불편함을 느낄 틈도 없이 오히려 사병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하아, 뷩스 준남작님이시다."
"뭐? 방금은 남작이라며?"
"준남작이든 남작이든 뭐가 중요하냐? 네놈을..."
"이런 미친 새끼를 봤나."
목구멍에서는 욕이 튀어나왔으나 정작 엘드미아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사병은 그 반응을 명백한 비웃음으로 이해했고, 순간 욱하는 심정에 몸을 맡겨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촤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사병들이 제식에 맞춰 창을 꼬나들었다.
"범죄자 새끼가 얌전히 데려가려고 했더니..."
당장 주제도 모르는 모험가 놈에게 권력을 맛을 보여주려던 찰나, 엘드미아가 입을 열었다.
"공무집행 사칭으로 인한 왕실의 권위 훼손 및 모독. 적법한 형벌은 사형."
"...뭐?"
"귀족 사칭으로 인한 왕실 및 귀족원 기만, 사형. 일개 사병으로서의 명백한 월권행위로 인한 관문도시법 위반. 사형. 범죄 행위 가담, 증거 인멸 및 날조 미수. 판결 형량에 따른 구금형. 허나 그 사건이 도시의 비리 및 월권과 관련되어 있을 시, 최대 사형까지 가능하다. 개인 사병으로서 창 소지가 허가된 근무지 이탈. 그로 인한 국가 정규 병력 사칭 미수. 군법에 따라 사형. 모든 집행은 왕실의 인가를 받은 법 집행관에 의해서만 이행될 수 있으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는 죄목과 사형의 남발에 사병의 눈이 미친 듯이 구르기 시작했다.
"...이에 따른 범법자들의 범죄행위에 대항하기 위한 정당 방위는 사후 증인과 증거를 통해 입증이 가능할 경우 무죄로 인정한다."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땐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와 반대로 엘드미아는 오가토르프 가문에서 일하는 와중에 없는 시간을 쪼개 코피까지 쏟아가며 외운 법들이 빛을 발한다는 점에 크나 큰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씨발 너희 같은 새끼들 합법적으로 대가리 따기 위해 팔자에도 없는 법 공부 더럽게 열심히 했다."
엘드미아는 웃었다. 아예 빤스런을 해 버린 줄 알았던 길드장이 어디에 있고, 누가 배후인지까지 단번에 알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에.
"자, 이제 누가 범죄자지?"
"고, 공겨..."
"라이카. 물어."
빵실한 엉덩이를 흔들며 라이카가 번개처럼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