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가와 모험가 길드라는 건 그렇게 대수로운 게 아니다. 굳이 비교하면 인력 알선업체와 거기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 정도?
모험가 중에서 특출난 프로들이 있다고는 하나, 결국 퍼센티지로 따져 보면 극소수에 불과하니 전체가 특별하다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으며 그런 점은 길드 역시 마찬가지다.
모험가라는 존재가 대륙에 순기능을 불러일으키니 사방팔방에서 적절한 지원과 투자 및 의뢰를 해와서 그럴싸하게 구색을 갖출 뿐, 하나부터 열까지 국가의 정책에 따라 필요에 의해 의무적으로 구성되는 집단이다.
그게 그냥 조건이 맞는 도시마다 하나씩 있으니 연합같아 보이고 거대하게 느껴지며 길드장이라는 사람이 다 이뤄놓은 것처럼 보이는 것에 불과한 거지 실상은 가만히만 있어도 절반은 가는 보직에 가깝다.
물론 나머지 절반을 얼마나 잘 하느냐가 길드장의 능력이긴 하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 객기부리며 나대면 그론즈엘 꼴 나는 거고, 새 길드장이 부임하게 되는 것이지.
준남작도 입지만 놓고 보면 모험가 길드장과 비슷하다.
왕실에서 관리하는 귀족들의 명단에는 포함되나 법적으로는 평민인 어중간한 귀족들. 가뜩이나 이티스엘은 전쟁 자금을 확보한답시고 준남작위를 좀 열심히 팔아서 그 가치는 더더욱 떨어진 상태다.
사회적으로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닐 수 있으며 그에 따른 대우와 지위도 기사 이상 남작 미만에 위치해 있지만 법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한 현실이 기다리는 직위라는 거다. 법으로 깐깐하게 분류하면 평민인지라 귀족들의 면책특권이 제대로 적용되지도 않을 뿐더러 얘네가 죄 지어서 뱉어내는 돈은 빠짐없이 국고로 환수되다 보니 오히려 더 예민하고 깐깐하게 법으로 두드려 맞는 경향도 적지 않다.
왕권이 약하면 몰라도 내가 수도에서 겪어본 왕실이라면 분명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 골수까지 빨아먹을 것이다. 이번엔 제 집 앞마당이라고 제멋대로 월권까지 남발했으니 말할 가치도 없지.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나쁠 것도 없었다. 어쭙잖게 뷩스가 끼어든 덕에 내가 취한 행동에 금칠이 된 것이다.
뷩스가 끼지 않았으면 관문도시의 영주는 내심 불편해하면서도 명분이 없다는 이유로 울며 겨자 먹기식 무죄를 선고해야 했을 텐데, 지금은 그가 연루됨으로써 발생했던 모든 비리와 문제들을 파악하고 평가하느라 오히려 내게 상을 줘야 하는 꼴이 나버렸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이제는 익숙한 임시 구금소에서 빈둥거린지 이틀 째 되는 날 아침인 지금, 의도치 않은 방문객이 모습을 드러내며 다 알려 줬기 때문이지.
"...그래서 깨달았죠. 역시 당신을 움직이는 건 애국심이었다는 것을!"
등장조차 쌩뚱맞고, 꺼낸 말조차 쌩뚱맞으며, 내 의도를 곡해하는 방식조차 쌩뚱맞기 그지없는 방문객의 이름은 메시나 반스 다 이티스엘. 왕녀님 되시겠다.
덕분에 난 제멋대로 일그러지려는 안면 근육을 전력으로 붙잡으며 힘겹게 예의를 차려야만 했다.
"응극으...븍승인...을드므으 으그...응느늠으...층츤으 믐 들 브를 므르긌슴느드..."
"'왕국의 백성인 엘드미아 에가, 왕녀님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하신 건가요? 혹시 어디 다치셨나요? 당장 성직자를..."
"하아... 괜찮습니다..."
메시나 왕녀에게 내가 대놓고 표현하는 불편한 기색과 불만을 명확하게 인지할 정도의 눈치는 분명히 있어 보였으나, 내 방만하다고 할 수 있는 태도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아니, 자리를 지킬 뿐만 아니아 제멋대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까지 했다.
"여기서 당신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죠. 오라버니가 바쁜 터라 대신 온 것에 불과했는데,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어요. 반갑네요!"
"제가 보기에는 매우 나쁜 선택이었습니다만."
"원래 선택과 결정이 불러오는 결과에 대한 감상이라는 게 상대적인 거 아니겠어요? 안 그래도 당신이 엔벨데를 처단하여 증명한 용기와 충성심에 대한 보상을 검토하는 게 너무 늦어지고 있어서 한 번 정도 개인적으로 공식적인 자리를 가지고 싶었답니다!"
"제가 지난번에 드렸던 부탁을 대놓고 무시하시는 계획이라고 사료됩니다만."
"그럴 리가요. 엘드미아는 그 당시에 '이런 만남'이 없길 바란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몰래 찾아가지 않았어요. 그 약속은 앞으로도 지켜질 것이랍니다."
그땐 한큐에 떨어져 나가길래 평생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더니 누가 왕족 아니랄까봐 단어를 휘두르는 솜씨가 날카롭다.
"...지당하신 말씀이군요. 한 수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누추한 곳에는 어인 일로 행차하신 겁니까?"
"왕실 모독을 저지른 대역죄인이 있으니 왕가의 사람이 직접 심판해야 옳지 않겠어요?"
씨이바알. 분명 그런 관행이 있긴 했지만 누가 봐도 변명에 불과했다.
"사문화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왕국이 쥐꼬리만 하고 한창 왕권 강화가 필요할 때야 실행된 법이지, 아무리 비룡을 타고 날아가도 왕국 끝까지 몇 날 며칠이 소모되는 마당에 바쁘디 바쁜 왕족이 그런 사소한 일로 매번 부재중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당연히 메시나 왕녀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랬죠. 이티스엘 건국 100주기 무렵에. 그래도 법은 법이니까요?"
그런 케케묵은 내용을 들먹이며 여기까지 왔다는 걸 보면 이미 작정하고 날아온 게 분명하다. 그저 남일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겠으나 안타깝게도 그녀가 이렇게 작정하고 날아온 게 나랑 연관이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호의를 베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이미 한 번 놓쳤으니까요."
"...이미 아시겠지만 굳이 왕녀님의 도움이 없어도 끝날 문제였습니다만."
"아쉽게도 그렇더라구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왕실에 도움을 준 인물에게 인사라도 하겠다는 핑계로 방문 해봤어요!"
세상 아쉽다는 듯 즉답하는 메시나 왕녀를 보며 기어이 한 번 더 한숨을 내쉰 나는 우선 가장 근본적인 오해부터 바로잡기로 했다.
"다 좋다고 치고, 아까 말한 애국심은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고 거하게 뒤틀린 해석과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열심히 떠들어야만 했다.
다행히 눈치가 있고 머리가 있는 인물답게 메시나가 지닌 오해는 쉽게 해결됐다.
기대했던 결과는 아니었으나 수확은 있었다는 말을 남기며 쿨하게 자리를 떠난 메시나 왕녀와 바톤 터치하듯 방문한 것은 길드 접수원 쿤즈였다. 처음엔 그저 의뢰 보수 지불과 내 전리품 분실에 대한 걸 처리하기 위해 온 줄 알았는데, 쿤즈가 꺼낸 이야기는 도시의 일에 억지로 엮이게 된 것에 대한 사과였다.
"엘드미아 님께서 휘말리기 전에 움직여야 했는데... 제 결단이 늦었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어떻게 수도에서 이렇게 빠르게 입질이 온 건가 싶었는데, 내가 수로에 들어선 순간부터 길드장의 독단을 참지 못하고 고발 행위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길드에서 깽판을 칠 때도 보이지 않았던 거 같다.
길드원인 이상 길드장의 비리 사실을 모를 수는 없었으나, 그도 도시 속에서 먹고살아야하는 사람이니 한쪽 눈을 감고 쉬쉬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대 사회의 톱니바퀴로 살아갔던 입장에서 그 마음과 처지를 모르지 않았기에 딱히 화가 나지는 않았다. 물론 그러한 설명 뒤에 따라온 사후 처리와 관련된 이야기가 워낙 마음에 든 것도 한몫했다.
"그론즈엘이 횡령하여 숨겨둔 개인 자산들은 이미 발견한 상태입니다. 거기에 말은 없었으나 다행히 엘드미아 님의 전리품들은 그대로 있는 듯했습니다. 여기, 국고로 환수되기 전에 전리품을 비롯해 피해 예상액을 책정하고 추가 보수까지 얹어 기록한 문서입니다."
"...꽤 빨랐네요?"
"당장 뵈러 오지 못한 이유였으니까요. 직원들이 모여 이틀을 철야로 작업해야 했습니다."
어쩐지 다크서클이 장난 아니더라니.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여겼는데 내가 또 언제 터질지 몰라 최우선으로 처리한 모양이다. 어찌 됐든 나에게는 좋은 이야기였기에 적당히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쿤즈가 내민 문서를 천천히 확인했다.
적힌 내용은 상당히 많았지만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사죄의 의미로 내 전리품들을 1.5배 가격으로 매입할 예정이라는 것, 죽은 군마를 대체할 말을 엔글렘에서 제공할 뿐만 아니라 영주님이 직접 오가토르프 가문에 사과하고 적합한 절차를 걸쳐 합당한 보상을 지불하고자 회의 중이라는 것, 수로의 도적들을 처리한 것에 대한 보수뿐만 아니라 도시 안정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따라붙은 금액들은 흡족하다고 말하는데 있어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역시 내 정당 방위를 인정하고 아무런 죄도 없음을 영주의 이름으로 공식 선언한다는 내용이었다.
"영주님이 양식있는 분이라서 다행이군요."
"좋은 분입니다. 이번 사건을 스스로의 부족함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여기는 분이기도 하죠."
그게 얼마나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도시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떠날 사람은 받을 거만 제대로 받고 떠나면 되는 것이다.
"보수와 별개로 엔글렘 모험가 길드는 엘드미아 님이 주신 도움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있으면 언제든 도와드리겠습니다."
도움이라, 패고 부수고 죽인 것밖에 없는데 이런 말을 듣는 것도 참 우습다.
"뭐, 사양은 안 하겠습니다. 문서에 적힌 것들은 언제쯤 받아볼 수 있을까요?"
"이미 묵고 계시는 여관으로 옮기는 중입니다. 저는 이제 구금이 끝났다는 말씀과 더불어 문서를 전해드리려고 온 것에 불과하죠."
오늘 들었던 말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이로군.
나는 조기퇴소하는 예비군같은 기분 속에서 구금소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