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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41화 (241/412)

만족스러운 숙면을 취하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짐을 챙긴 우리는 천천히 오그웬으로 향할 채비를 마쳤다.

그러는 동안 어제 받은 보상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아 발생한 작은 헤프닝이 있었는데, 바로 우리가 보상이랍시고 받은 말들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일행들 모두 그냥 그런 게 오는 갑다 하고 있다가 오늘에서야 말들의 상태를 확인했는데 그 결과가 심히 감탄스러웠던 것이다.

"와, 이거 의외로 장관인데."

우리 머릿수만큼 받은 말들이 전부 고급 말들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혈통서까지 지참해서 아예 양도받았다고 한다.

"근데 어째 엘드미아 님이랑 아실리에 님이 타던 것보다는 좀 위압감이 약하네요."

"비교할 걸 비교해라. 그거 한 마리면 얘네 여섯 마리 정도는 살 수준이었으니."

"아..."

에카프 경이 준 말들이 워낙 좋은 말들이었을 뿐이지 얘들도 충분히 좋은 말이었다. 귀족들이 아니면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수준이니까. 솔직히 엔글렘과 모험가 길드가 지불해야 하는 배상금과 보상이 만만찮아서 이런 데에서는 좀 적당히 칠 줄 알았는데 기분 좋은 오산이었다.

"허어, 이거 기회를 봐서 팔아야겠구먼. 괜히 죽어 버리면 밤잠도 못 이루겠어."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말은 평생 타는 일이 없을 거라 여겼는데..."

"난 그냥 타고 다닐래."

가엔달과 긴 씨가 같은 반응을 보이는 와중에 예카트리나는 눈을 빛내며 남다른 포부를 내비쳤다. 안 그래도 그녀는 육중한 무게를 자랑하는 워해머 때문에 어지간한 말은 성에 차지 않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번에 받은 말은 태생이 전투마인지라 매우 마음에 든 모양이다.

"이야, 그 악마한테서 나온 부산물을 못 파는 게 아쉽네요. 이번에 같이 팔 수만 있었다면 최고가로 팔린 게 됐을 텐데."

"별수 없지. 의뢰를 완수했다는 증거품이기도 하니까."

다른 전리품들 값을 책정해주는 걸 보고 순간 혹해서 그대로 판 다음 증빙서류만 받아다가 성광십자회에 제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여러모로 많이 벌었으니 굳이 더 욕심내기보다 신용을 선택하기로 했다.

"돈은 무한재화지만 시간은 유한재화야. 그리고 그런 시간으로도 사기 힘든 것이 바로 신용이니 현명한 선택이지. 성광십자회도 이번 일로 너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릴 테니까."

우리 중에서 가장 많은 자산을 소유한 세네란의 말이라서 그런가? 돈에 관한 조언은 하나하나 뼛속까지 와닿는 기분이 든다. 물론 이미 성녀를 구해 준 것만으로도 할 건 다한 기분이 들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잠깐 들뜬 기분으로 수다를 떨며 정비를 마친 우리는 미련 없이 엔글렘을 뒤로하고 여행길에 올랐다.

"그 며칠 사이에 더 추워진 거 같네."

슬슬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려는 것인지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기 시작한 날씨는 이제 금방이라도 눈을 쏟아 낼 것만 같았다. 내 혼잣말을 들은 아실리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산에서 눈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겠네."

이번 여행을 대비해 우리의 옷가지도 좀 더 두터워졌고 말에는 엔글렘에서 구입한 동계 장비가 계획적으로 실린 상태였으나, 그럼에도 하늘에서 내리는 악마의 똥가루는 무시하기 힘들다. 진짜 농담이 아니라 눈에 깔려 죽으라는 듯이 내릴 때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전생에서 군대에 있을 때, 새벽부터 일어나 발목까지 다 잠길 정도로 쏟아진 눈을 치우고 점심 먹는 동안 다시 아침에 쌓인 눈이랑 똑같은 수준으로 내려 허탈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그 정도면 평범한 수준이니 말 다했지. 괜히 겨울이 되면 모험가들의 지역 이탈을 막고 의뢰 제한을 두는 게 아니라니까.

"개인적으로는 좀 시원하게 내렸으면 좋겠는데 이티스엘 사람들은 눈을 별로 안 좋아한단 말이지."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게 만드는 눈에 대한 걱정으로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내 옆으로 예카트리나가 다가오며 말을 걸어온다.

"사람 죽일 기세로 내리는 걸 좋아하는 게 더 힘들지 않을까요."

"하하하! 재밌는 농담이네 엘드미아! 가랑비에 익사하는 거랑 비슷한 느낌인 건가?"

뭐지? 가랑비? 의아한 표정으로 예카트리나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말하는 듯했다. 나름 열심히 달리고 있는 중인지라 일말의 여유도 없는 렐리에에게 설명을 부탁할 수도 없다 보니 난처한 와중에 아실리에가 설명해주었다.

"이티스엘에서 폭설이라고 할 만 한 수준의 눈이 러빌에서는 수시로 쏟아져서 그래. 거긴 정말 어떻게 사람이 사나 싶을 정도로 눈이 많이 오거든."

와...그럼 예카트리나는 여기 내리는 눈에서 향수병말고는 아무것도 못 느낀다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는 인식의 차이였지만 동시에 든든하기도 하다. 적어도 그만치 눈이 많이 내리는 곳에서 살았으면 폭설에 대응하는 오만가지 방법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라니, 대처법도 많이 알겠네요?"

"글쎄? 대처법이라고 할 게 있나? 은신처를 만들고 버티거나, 그냥 버티는 거지!"

젠장, 예카트리나는 문명과 야만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는 경향이 있군. 기본 육체 능력이 우월한 탓인가.

다행스럽게도 그런 불안한 출발과는 달리 우리가 숲을 지나 산을 넘고 서서히 얼어붙는 강을 구경하며 오그웬의 문턱에 다다르는 그 순간까지 눈은 내리지 않았다. 그래도 평소 착하게 살았다고 이런 부분에서 우주가 배려해 주는구나, 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성광십자회로 향한 나와 일행들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굉장히 달라져버린 신전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이건 좀 많이 본격적인데...?"

누가 보면 오그웬 지부가 아니라 성광십자회 총본산이라고 착각하고도 남을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돌담 하나 세우지 않았던 신전의 부지에는 더럽게 튼튼해 보이는 목책이 설치되어 있었고 아이들이 뛰어놀던 아담한 잔디밭에는 전술 막사 같은 게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의 눈을 사로잡은 건 '진짜' 성기사 둘이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광경이었다.

"미친 씨발 세상에. 저 태어나서 성기사님들은 처음 보는데요."

내가 할 말을 대신해 주는 센에 대한 평가를 조용히 상승시키며, 나는 성기사들이 입고 있는 갑옷에 내심 감탄했다. 저게 갑옷이라고? 쇳덩이로 만들어진 파워아머라고 해도 믿을 수준으로 거대해서 뭐라 할 말이 없다. 심지어 들고 있는 철퇴와 방패도 그에 못지않게 거대해서 예카트리나의 워해머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다.

무언가 마법적인 수단을 가하지 않고서야 절대 멀쩡히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방어구의 벽이 슬슬 움직이더니 우리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이곳은 성광십자회 오그웬 지부입니다. 무언가 용무가 있으십니까?"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나올 거라 여겼는데 놀랍게도 여자였다. 그만큼 몸의 굴곡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갑옷이다. 일단은 여전히 내가 파티의 입인 상황이었기에, 먼저 말에서 내리며 성기사에게 말했다.

"엘드미아 에가라고 합니다. 히스예나 신전장님께 받은 악마 퇴치 의뢰를 완수하여 보고하려고 왔습니다."

딱딱해 보이는 말투와 달리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기에 문전 박대만큼은 당하지 않을 거라 여겼거늘, 성기사들은 갑자기 어깨 갑옷의 걸쇠 같은 부분에 자신들의 무구를 걸더니 바이저마저 올리며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어조로 말을 걸었다.

"아! 성녀님을 무사히 모셔왔을 뿐만 아니라 일말의 주저 없이 악의 토벌에 나섰다는 분이셨군요! 형제님에 대한 사안은 교구장님께 전달 받았습니다! 성전사들조차 쉬이 완수하지 못 하는 과업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신 것 같아 정말 다행입니다!"

"아...예..."

"교단에 귀의하지 않음에도 이리도 숭고한 족적이라니, 그야말로 만인의 귀감이십니다. 이런, 피곤하실 텐데 실례를.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안 그래도 예상보다 늦어지시는 듯하여 교구장님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제멋대로 감격하고 제멋대로 악수하고 제멋대로 우리를 배려한 성기사들은 해맑은 미소와 함께 길을 열어 주었고, 우리는 최대한 의연하게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며 신전으로 향했다. 무려 말까지 잠깐 맡아 관리해주겠다는 성기사들의 과도한 친절을 뒤로하며 예배당에 들어서고 나서야, 렐리에가 고개를 내저으며 천천히 말문을 텄다.

"살다 살다 성기사한테 이렇게까지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될 줄이야."

"엘드미아, 자네랑 다니면 삶이 지루할 틈이 없겠어. 껄껄껄."

"그러게요. 좀 지루하게 사는 게 소원인데 말이죠."

"그런 소원을 이루려면 일단 평범하게 사는 게 먼저 아니겠느냐."

내 말을 농담이라고 여긴 것인지 웃음을 터트리며 성큼성큼 다가온 애셜 사제가 큼직막한 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그래, 교구장님의 의뢰는 잘 해결됐고?"

"예. 악마 놈 목 따고 왔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목을 따버렸지. 일말의 과장도 없는 그 표현에 애셜 사제는 크게 기뻐했다.

"근데 교구장님이라뇨? 히스예나 신전장님 말하시는 거 같은데, 승진하신 겁니까?"

"승진이라니. 참으로 세속적인 표현이다만... 틀린 말은 아니지. 그와 관련해서는 교구장님께서 직접 따로 말씀하실 거란다. 일행분들은 여독을 풀 수 있도록 우리가 모실터이니, 넌 교구장님을 뵈러 가거라. 응접실로 가는 길 기억하지?"

뭔가... 뭔가 촉이 온다.

이 앞, 번거로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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