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장.
전생에서는 관심도 없었고, 여기서도 나름 세력이 큰 종교들의 신전이 대도시에 위치했을 때 종종 신전장에게 붙는 직급 정도로만 알고 있는 수준이다. 내가 두 번째 삶을 살게 된 건 고맙지만 그거만으로 종교에 큰 뜻을 가지진 않았거든. 그냥 매번 감사하며 살자 정도였지.
하지만 반대로 '대도시'에만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리고 오그웬은 분명 도시로써의 면모를 갖춰나가는 중이지만 아직 대도시라고 부르기엔 하자가 있는 곳이지.
심지어 성직자들도 엄청 많아졌다. 원래 성광십자회의 성직자들은 대부분 전투도 겸하다 보니 몸이 좋은 편인데 그 위에 기본적으로 갑옷을 걸친 상태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이들이 평소보다 몇 배는 많이 보인다. 성녀를 보호하는 중이라기보단 당장이라도 숙청 작업 빡세게 들어갈 것만 같은 분위기에 가깝다.
그런 범상치 않은 광경에서 익숙한 사건의 냄새를 맡으며 도착한 응접실은 지금의 신전이 그러하듯 내 기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방금 형제님 한 분이 오셔서 소식을 전해주더군요.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엘드미아."
히스예나 교구장이 앉아 있는 의자와 책상 그리고 뒤에 놓인 간이침대를 제외하면 온통 책장과 문서와 서류 더미들로 가득하다. 최대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고는 하나 그 양은 결코 적지 않았고, 덕분에 난 지금 그녀의 상태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바쁘고 피곤해 보이시네요 히스예나 교구장님."
"음, 영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군요."
인사대신 건넨 한 마디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히스예나 교구장은 안경 너머로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실제로도 피곤하지만 당신이 무사히 의뢰를 완수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 덕에 조금은 기운이 날 것 같군요. 악마는 잘 해결됐습니까?"
"두 번 다시 이쪽으로 넘어올 엄두조차 못 낼겁니다."
품에서 악마의 부산물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 두자 히스예나 교구장이 조심스럽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미 죽어 버린 놈의 잔여물이라 하더라도 종교에 뜻을 지니고 있는 입장에서 불쾌하게 여길 법도 한데, 그녀는 더없이 덤덤하고 침착한 태도로 찬찬히 뜯어볼 뿐이었다. 겉뿐만 아니라 그 속까지 살펴보는 것처럼 한참을 확인하던 히스예나 교구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엘드미아. 악마의 부산물이 남는 조건을 알고 있습니까?"
"아뇨. 급하게 육체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설 정도만 들어 봤습니다."
"그쪽 학계에서도 발표된 지 얼마 안 된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이론 마법사와 연이 있나 보군요."
흠. 자기 도서관까지 차려서 연구에 힘쓰고 있으니 이론 마법사라고 할 수 있겠지. 그래도 정확하진 않은지라 적당히 침묵을 유지하자 히스예나 교구장이 악마의 부산물을 탁자 위에 올려 두며 말을 이었다.
"그 가설은 얼추 들어 맞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죠."
"...조건이요?"
"죽음을 통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빠르게 벗어나고 싶어 할 때. 결국 악마가 현신할 때와 죽기를 바랄 때 모두 서두르면 그 악마가 지닌 힘에 상응하는 부산물이 남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확신을 담아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난 껄끄러운 기분을 느껴야 했다.
마법사들이 그렇게 연구를 하는데도 아직 가설인 내용을 대놓고 확신한다고? 이거 교단 대외비 아니야?
"후후.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는군요."
"들으면 안 될 내용을 듣게 되었다면 보통 표정 관리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것치고는 세상 귀찮다는 표정인데요?"
"교단 대외비인 정보를 들었다고 무조건 당장 세상이 멸망할 것처럼 두려워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히스예나 교구장은 짙게 웃으며 갑자기 화제를 전환했다.
"이 정도 크기면 굉장히 비싼 값에 팔릴 겁니다. 악마 퇴치의 증거라고 무조건 들고 올 필요 없이 이름있는 상회나 마도서관에 부탁해 판매 보증서만 받아왔어도 됐을 텐데 왜 굳이?"
"뭐, 그런 생각이 안 들었던 건 아닙니다. 마침 엔글렘에서 가격을 높게 받을 기회가 있었던 터라 혹하기도 했고."
"그럼에도 일부러 가지고 왔군요."
"그저 사리사욕보다 확실한 의뢰 완수를 목표로 한 거죠. 괜히 찜찜하게 트집 잡히는 거 안 좋아하거든요."
"...그랬죠. 당신은 옛날부터 트집을 잡는 입장이었지, 잡히는 입장은 아니었으니까요."
이런, 좁은 동네였던 시절이 있어서 그런가 별걸 다 기억하고 계시는군.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해 멀뚱히 있는 사이 히스예나 교구장이 악마의 부산물을 내 쪽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놀랍다는 게 솔직한 감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교단에 보고된 악마의 부산물들은 이것보다 크기가 작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운이 좋았나 보네요."
"부산물의 크기는 결국 악마가 얼마나 많은 마력을 몸에 지니고 있었는지로 가늠하니 운이 나쁜 쪽에 속한 게 맞겠죠. 저희 측도 성기사가 아닌 성전사들이었으면 막심한 피해를 입었을 게 분명한 수준이니까요."
순간 온화한 웃음기만이 가득하던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걸 운이 좋았다고 표현할 정도면 전투에 있어서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는 의미겠죠. 도저히 15살 소년의 무용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동료들이 많았으니까요."
"...흠. 저희가 드린 도구는요?"
"......어."
씨발.
까먹고 있었다.
간만에 일천하고도 하나의 엘드미아들이 머릿속에서 좆망을 외치며 날뛰기 시작한다. 악마 새끼랑 싸울 때도 눈이 돌아가서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걸 이제서야 알게 되다니. 분명 아실리에의 짐 어딘가에 고이 모셔두고 있었던 거 같은데.
이렇게 고평가받는 악마인 줄 알았다면 그 성스러운 수류탄같은 도구라도 한 번 쓰거나 쓴 척이라도 했어야 했거늘!
"그게..."
그렇다고 뻔히 나름 강한 악마였다는 증거인 부산물이 있는데 이제 와서 '놈이 약해서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라는 건 쓸데없는 의심만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깜빡..."
"설마 이 정도로 강력한 악마를 상대하면서 저희가 준 대악마병기를 깜빡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는 말을 하려는 건가요? 본인이 직접 제안해서 받아 놓고는?"
씨이이바아알.
"아뇨, 오히려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치고는 정말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으로 지금까지 일관해왔잖습니까. 두 번 다시는 현신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과 함께."
"...원래 과거의 고통이라는 게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미화되는 법 아니겠습니까. 모험가 특유의 몹쓸 허세도 좀 포함해서요."
당연히 히스예나 교구장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채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모아 미간을 누르며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난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여기서 마밍아웃을 해야 하나? 사실 마력으로 대가리 땄더니 개좆밥이라서 복날에 개 패듯이 팬 다음 죽여 버렸다고 해야 하나? 마땅한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는 주제에 연신 대가리만 돌아가던 찰나 히스예나 교구장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뭐, 영업 비밀이라고 생각하도록 하죠."
그러고는 등을 쭉 펴며 악마의 부산물을 내 쪽으로 캐치볼 하듯 가볍게 던져 주었다.
"옛날부터 범상치 않은 아이였으니 비장의 수단 한 두 개 정도 감추고 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는 생각합니다. 교단에 종사하는 입장에서 후진 육성을 위해 알고 싶긴 하나...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들어도 소용이 없을 것 같군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받아 든 부산물을 주섬주섬 넣는 사이 히스예나 교구장이 안경을 고쳐 올리며 말을 이었다.
"대신 의뢰 하나만 더 들어줬으면 합니다."
"...불공정 거래인데요."
"말 그대로 '들어달라'는 겁니다. 받을지 말지는 당신이 선택하는 거지만, 되도록 받아줬으면 하네요. 원래 제국의 용사에게 부탁하려던 일인데 거절 당했거든요."
"지크프리트한테요?"
굉장히 뜬금없이 튀어나온 지크 놈의 이야기에 반사적으로 반응하자 히스예나 교구장의 눈이 다시 빛났다. 아뿔싸 씨발. 입이 방정이지.
"...그러고 보니 소문이 돌더군요."
"어떤 소문인지 몰라도 소문이라는 건 하나 같이 다 개소문입니다."
"레비엥 변경백과 함께 제국을 방문한 그녀의 수행원이 대련에서 용사를 이겼다는 소문이었죠. 돌아온 뒤에는 레비엥 변경백에게 씌워진 누명에 분노해서 역모를 꾸미고 있던 엔벨데를 저택에서 참했다는 이야기도."
"그거참 무슨 애들이나 볼 법한 소설책에서 나올 이야기네요."
"제국에서 굉장히 성공적인 우호 관계를 쌓고 돌아온 것인지 그 행동으로 인해 수행원이 구금되자 직접 하얀 별이 내방할 정도로 대사건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세간에서는 레비엥의 단두대라 하여 검을 뽑기만 해도 열 명의 목이 떨어져 나간다고까지 하더군요."
"하하. 역시 뜬소문답게 허무맹랑하네요. 세상에 그런 놈이 어딨겠습니까."
"저는 남자라고 한 적 없는데요?"
뻔한 변명이나 지껄이던 난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치고 말았다. 아니 오늘 왜 이러지? 한번 말렸더니 계속 말리네? 레스롬 공작도 그렇고 혹시 내 안에 잠들어있는 유교 드래곤이 노인공경을 강요하며 자꾸 판을 엎는 건가?
"있었네요. '그런 놈,'"
"하아...비참해지니까 그냥 용무나 말씀해주세요. 참고로 마지막은 진짜 헛소문입니다."
"세상에. 그럼 마지막 말고는 다 진짜란 말인가요? 전 당연히 대부분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진심으로 놀라는 히스예나 교구장의 반응에 난 괜히 울고 싶은 기분에 빠져야만 했다.
텄다 텄어. 빨리 정리하고 오늘은 좀 쉬는 게 맞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