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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43화 (243/412)

내 행적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려는 히스예나 교구장의 관심을 무마시키며 주워들은 이야기는 별 내용 아니었다.

성광십자회 총본산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계속적으로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부 교단원들에게 악마의 속삭임으로 인한 타락의 조짐이 보이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성실한 신도들이 모여 대대적인 이단심판에 들어가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스케일이 작지 않은데 왜 별 내용이 아니냐고? 이 동네에서 타락이라는 건 어떤 게임회사에서 남용하는 것처럼 밥 먹듯이 튀어나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드문 것도 아닌 어중간한 경계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지.

악마 새끼들의 즐거움이 사람 엿 맥이는 건데 그중 가장 최고로 치는 즐거움은 성실한 성직자들 골로 보내는 거라서 잊을 만 하면 한 번 씩 튀어나오는 사건이다. 물론 이번엔 그게 총본산에서 시작된 거 같아 좀 문제이긴 하겠다만.

내 일 아니니 알 바 아니다.

"악마의 위협은 마족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이며 종교를 가리지 않고 힘을 모아야 하는 일이죠. 다행히 제국 신성회와 황실은 저희의 요청을 들어 주었으나..."

"용사가 거부했다?"

"하아, 맞아요. 밥그릇 싸움은 알아서들 하라는 답장이 왔더군요.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뉘앙스만으로 알 수 있었죠."

밥그릇 싸움이라... 성녀를 끼고 움직이는 이 일련의 움직임들을 전생의 기억으로 바라보면 타락한 종교쟁이들의 알력 다툼 정도로 보일 수는 있을 거 같다.

지크프리트가 아직은 아카데미에서 교육받는 입장인 만큼 제국과 제국 신성회에서 적극적으로 어필을 했다면 움직이긴 했을 것이다. 오히려 두 집단에서 지크프리트에게 결정권을 위임했다는 건 그의 성미를 파악해고 내린 결정일 가능성이 높겠지.

악마는 큰 피해를 입을지라도 결국 용사없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지만 마왕은 아니니까. 위신은 유지하고 싶고 딱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없기에 내린 결정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이미 악마 새끼한테 얻을 거라고는 어중간한 부산물 밖에 없는 상황이라 굳이 상대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빨리 수도로 돌아가서 마법 공부에 힘쓰는 게 장기적으로 백만배는 이롭다.

제국이나 제국 신성회도 딱히 다르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이거 안 돕는다고 마왕과 용사가 싸울 때 삐져서 힘 안 빌려줄 것도 아닌데 전투력 측정이 들쭉날쭉한 악마를 상대하려고 용사라는 카드를 내보이고 싶진 않겠지. 만에 하나 악마한테 지기라도하면 일이 어떻게 굴러갈지 감도 안 올 테니까.

하지만 이런 건 실전만한 게 없는 법이다.

"펜이랑 편지 좀 줘보세요."

"편지는 왜..."

"지크프리트한테 편지 좀 쓰게요. 교구장님께서 보낼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보내시면 됩니다."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도구들을 건네주는 히스예나 교구장을 애써 무시하며 딱 두 줄만 적어낸 뒤 곱게 접어 봉투에 넣고 양식에 맞춰 발신인과 수신인의 이름을 적어 부산물과 함께 건네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빛으로 질문해 왔다.

"동봉해서 보내세요. 도와줄 겁니다."

"...제국과 제국 신성회의 부탁에도 움직이지 않던 용사가 이 편지 한 통과 악마의 부산물만으로 움직일 거라구요? 이게 아무리 가치가 높다 하더라도 제국의 지원에 비하면 푼돈인데요?"

"부탁이 아니라 도발이니까요. 그리고 그 부산물값은 제가 교구장님을 돕느라 사용한 것이니 성광십자회에서 구입한 거로 하죠."

그놈 한국인이라서 도발은 절대 못 참을 거다.

"아 싫다니까 그러네."

아카데미의 개인 숙소에서 지크프리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미간을 찡그리고 최대한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온몸으로 거절 의사를 표현했다. 그 체통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모습에 에스뮈에도 미간을 찡그렸고, 에셀루아가 한숨을 내쉬며 지크프리트의 어깨를 찰싹 때린 뒤에야 그는 조금은 자세를 바로잡고 미간을 핀 상태로 에스뮈에를 마주했다.

참으로 할 말은 많았지만 에스뮈에는 일단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단어를 솎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만의 시간 속에서 겨우겨우 지크프리트의 방정하지 못한 품행에 대한 오만가지 조언과 잔소리들을 삭힌 에스뮈에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말했다.

"네가 좋고 싫고를 묻는 것이 아니니라. 이는 모두의 위신과 관련된 일이지."

"안해요 안해. 걔들도 딱히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니까 나한테 결정권을 위임한 거잖아."

"하아...당장 네 연인인 성녀 테니아시가 제국 신성회 내부에서 다지게 될 입지를 위해서라도 이번 성광십자회의 요청에는 응하는 게 좋다고 조언하고 있는 것이니라."

제국 신성회는 수많은 종교 중에서도 가장 속물적이다. 제국과 붙어 공생하는 관계를 가져 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절차였으나, 이는 용사와도 관련이 있다.

다른 교단은 신앙심을 기준으로 성녀가 나타나지만 제국 신성회에서는 그보다 격이 높은 용사가 신앙심과 관계없이 나타나니까. 신앙심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닐지언정 맹목적인 삶의 지표로 삼지도 않는 것이다.

마왕을 물리칠 경우 지크프리트의 귀족 작위는 필연이다. 그가 지금 연인들을 대하는 태도로 미루어볼 때 셋 모두와 혼약을 맺을 게 분명한데, 그럴 경우 엘프인 엔티레는 둘째치더라도 성녀 테니아시 릴레스만큼은 제국 신성회와 황실 간의 조율을 맡는 요직에 앉게 될 것이다. 당연히 만만한 자리가 아니다. 주변의 수작질을 견제하려면 미리부터 개개인의 평판과 위신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 번째는 성녀 테니아시 릴레스는 그런 관리 기회가 가장 적은 인물 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에스뮈에가 차기 황제일지라도 제국 신성회의 내부 사정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기에.

그들이 속세로 튀어나와 핑곗거리를 만들어 주지 않는 이상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대로 두어야만 한다. 성녀 테니아시가 지크프리트와 혼약을 맺는다 하더라도 그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예외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오롯이 지금 뿐. 이 언제가 될지 모르는 한정된 시간 동안 지크프리트 다음으로 많은 업적과 위신을 쌓아야 하는 게 바로 성녀 테니아시였다.

"저, 저는 지크님의 판단을 존중합니다 황녀님."

두 번째 문제가 바로 저 태도. 성녀 테니아시는 매우 우유부단하고 자존감 낮으며 가장 맹목적인 지크프리트 신봉자였다.

그야말로 이마를 탁 치고 싶은 에스뮈에의 심정을 쥐뿔도 눈치채지 못한 채, 지크프리트는 애정이 가득 담긴 미소로 테니아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테시가 날 존중해주는 만큼 나도 테시를 존중하고 싶어. 솔직히 에스뮈에가 말하는 게 아예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야. 네가 필요하다고 여기면 움직여도 상관없어."

"아, 아닙니다. 전 지크님 곁에 있을 수 있는 걸로 충분해요!"

옘병. 성녀 자격 부적합이라는 핑계로 차후 지크프리트의 약점이 되어도 그런 말이 나올까.

부글부글 끓는 속을 차 한 모금으로 애써 다스리며 에스뮈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표면적인 관계로 인해 그녀의 속이 썩어들어가는 것을 구경만 해야 하는 에셀루아 역시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똑똑

-지크프리트님. 서신이 왔습니다.

"지금은 제1 황녀님과 회의 중이다. 나중에."

에스뮈에는 가만히 생각한다. 한없이 한량처럼 굴면서도 이런 건 실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엘드미아와 비슷한 구석도 없진 않은 놈이라고. 물론 비교 대상조차 안 되지만.

잠깐의 잡생각을 떨쳐내고 어떻게든 지크프리트를 설득하고자 다시 머리를 굴리려 했는데, 놀랍게도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 그게... 급보로 분류되어 온 탓에...

"급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지크프리트는 일단 에스뮈에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에스뮈에 역시 의아함을 느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의 뜻을 내비쳤다.

"들어와."

문이 열리자마자 황급히 예를 갖추며 들어온 사용인의 손에 들린 것은 서신이라기보단 수하물에 가까웠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박스를 묘한 표정으로 받아 든 지크프리트의 눈썹이 이마 위로 솟구쳤다.

"엘드미아?"

"뭣."

동시에 에스뮈에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해지고 지크프리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종종걸음으로 물러난 사용인이 문을 닫고 확실히 멀어지자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던 지크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이야, 우리 동생이 제1 황녀님한테도 안 보내던 편지를 형님한테 먼저 보냈네? 선물까지 동봉해서?"

"......"

에스뮈에는 불만을 감추지 않으며 양 볼을 가득 부풀렸다. 이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란 말인가?

"하하하. 어디, 그럼 우리 동생이 대체 이 지크 형님께 뭘 보냈기에 급보로 보냈는지 살펴볼까아?"

지크프리트가 싱글벙글 얄밉게 웃으며 포장을 뜯어 확인한 물건은 사뭇 놀라운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물건의 등장에 모두가 벙찐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엔티레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악마의 부산물이네?"

"그, 그것도 상당히 강한 악마의 부산물이네요."

"뭐지? 이 타이밍에? 형님 용돈 챙겨드리고 싶다는 암시인 것인가? 편지에 적혀 있으려나?"

에스뮈에는 방금 전까지 품고 있던 불만와 서러움을 잠깐 뒤로 미뤄둔 채 지크프리트가 잠시 내려놓은 악마의 부산물을 살펴보았다. 지크프리트의 주먹 정도 되는 크기로 미루어 짐작컨데 테니아시의 말대로 꽤 강력한 악마가 남긴 것이 분명했다. 어디서 구한 것일까? 그 사이 악마와도 싸워 이긴 뒤 얻은 전리품인 것일까?

아니, 만약 그런 영광스러운 전리품이라면 응당 미래의 아내에게 주는 것이 맞는 게 아닌가? 어찌 이런 물건을 지크프리트에게 준단 말인가?

아직 물건의 출처도 알 수 없을 뿐더러 결혼하겠다는 확답조차 받지 못했으면서 혼자 손주까지 보고 있었던 에스뮈에가 다시금 강한 불만을 느끼며 볼을 부풀리려던 것을 지크프리트의 싸늘한 한 마디가 멈춰 세웠다.

"...악마 잡으러 간다."

"...응?"

"악마 잡으러 간다고."

고개를 들어 살펴본 지크프리트는 팔자주름이 다 보일 정도로 잔뜩 일그러져서는 심히 못생겨보이는 꼴을 하고 있었다. 딱히 화가 난 거 같진 않은데 뜬금없이 승부욕에 불이 붙은 모습이었다.

"이 괘씸한 동생 놈이 감히 국지도발을 걸어?"

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에스뮈에에게로 지크프리트가 읽던 편지가 전해졌다. 저 꼴로 또 편지는 잘도 준다는 생각을 하며 에스뮈에는 내용을 살펴보았다.

-제국 신성회의 용사이자 황실의 벗인 지크프리트 님께.

겨우 두 줄 뿐인 본문보다 수신인이 더 장황한 편지에 헛웃음이 나왔다. 벗은 무슨 웬수가 따로 없거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도 엘드미아가 쓴 편지라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 스스로를 한심히 여기며 본문을 살펴본 에스뮈에는 체통조차 잊어버리고 빵 터지고 말았다.

-쫄았습니까? 전 잡았는데.

겨우 한 줄만 읽고도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됐다. 대체 무슨 과정을 거쳐 성광십자회와 연이 닿아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결국 이 한 줄의 편지만으로 지크프리트를 움직이게 만들었으니 역시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다음 문장이었다.

-추신. 동봉한 악마의 부산물은 제국의 자랑이자 찬란히 빛나는 하얀 별을 위한 선물이니 잘 전달하시지요.

"...흠흠. 여를 이용한 건 괘씸하지만. 어찌 됐든 선물은 선물이고 결과적으로 여를 도운 것이니 참작하도록 하겠느니라."

비록 그 마지막 한 줄의 문장 마저도 우편물에 대한 기대감을 이용해 지크프리트를 분기탱전하게 만들기 위한 술수였다는 것을 이해했으나, 에스뮈에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편지와 부산물을 전부 챙겼다.

다행히 지크프리트는 쓸데없는 객기를 부리느라 편지에는 더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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