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예나 교구장의 의뢰를 거절하고 지크프리트에게 도발성 편지를 보낸 뒤로 일주일이 더 흘렀다. 딱히 나에게 들려오는 소식은 없었지만 분명 알아서 잘 미끼를 물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사이 별다른 사건은 없었다. 성광십자회에서 받은 보수를 나누고 다시금 각자 갈 길을 가기 위해 헤어지고, 일이 얼추 정리된다면 반드시 세네란에게 찾아가겠다는 확답도 한 뒤 에카프 경에게 엔글렘에서 겪은 사건의 경위에 대해 보고하는 등의 자질구레한 일들만 있었을 뿐. 그마저도 엔글렘에서 워낙 열심히 잘 처리해준 덕에 군마 두 마리를 날려 먹은 것치고는 꽤 괜찮은 성과가 나와 에카프 경이 내심 좋아했다.
금전적인 것보다는 반역의 끄나풀이었던 뷩스를 통해 엔글렘의 충성을 확고히 할 기회가 되었다나 뭐라나.
하지만 그렇게 별다른 사건이 없었던 것에 비해 꽤나 빠듯한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드디어 오가토르프 저택에서 완전히 나오게 됨과 동시에 나와 아실리에가 살 작은 집을 하나 얻었기 때문이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런 식으로 이룰 줄이야."
"그런 꿈이 있었어?"
"아니. 그냥 해 본 말이야."
특별할 것은 없으면서도 있을 건 다 있는, 모험가 지구에 위치한 작은 마당과 마구간 그리고 지하까지 딸린 복층 주택은 왕실에서 제공한 보상이었다. 원래 친왕파 사이에서는 반역자를 단칼에 처단한 걸 높이 사서 작위를 수여하고 저택을 선물해야 한다고 지랄 발광을 떨었는데 레스롬 공작의 강력한 건의로 인해 이 깔끔하고 아담한 집과 명예 훈장. 그리고 포상금으로 끝났다고 한다.
그 영감님은 날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너무 잘 파악하고 있어서 문제야.
작위 수여한다고 했으면 아주 깽판을 칠 생각이었는데 어쩜 이리도 마음에 쏙 들게 정리해줬을까. 내 입장에서도 어차피 떠나게 되면 팔기도 힘들고 관리도 힘든 대저택보다 작은 부동산과 왕실 보증의 은행 계좌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 집은 나중에 별장처럼 쓰든 세를 내든 손도 덜 가니까.
무엇보다 집 구조도 가축 같은 걸 기르지 않는 모험가 맞춤형 디자인인지라 상당히 깔끔한 게 마음에 든다. 여기도 일반 가정집 중 축사랑 사람 사는 공간이 연동되어 있는 게 꽤 있거든. 덕분에 나는 레스롬 공작에 대한 내면의 평가를 귀찮은 영감님에서 괜찮은 영감님으로 승격시킨 뒤 한창 아실리에와 함께 살림살이를 꾸려 나가는 중이었다.
"끄응. 곧 겨울이라 그런가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갔네."
전생에서는 가계부조차 제대로 써본 적 없이 살아온 나이기도 했고, 아실리에와 함께 살았을 땐 그녀에게 대부분의 금전 관리를 맡겨 왔었지만 오가토르프 가문에서 집사로 일하며 집사장의 계산 업무를 도우며 거래처와도 안면을 터 온 나는 수도에서의 돈 관리만큼은 아실리에를 초월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처음엔 마치 철없는 아이가 돈 관리를 시도하는 모습을 지켜보듯 웃으며 구경하던 아실리에도 금방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견하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을 정도였다고.
"역시 식량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게 좀 아쉽네."
"그래도 이 정도면 싸게 구한 거 아니니? 엘디가 오가토르프 가문의 거래처를 몰랐다면 1.5배는 더 지출이 생겼을 거 같은데?"
"그렇긴 한데... 아쉬운 것도 사실이라서. 악마다 엔글렘이다 해서 뺏긴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어. 몇 주만 일찍 움직였어도 아낄 수 있었을 텐데."
냉장고라는 가구의 개념은 없어도 빙결 마법을 통한 음식 저장 시스템은 구축이 된 상태인지라, 귀족 저택에서 식자재를 주문할 때는 상당히 많은 양의 음식을 한 번에 주문한다. 손님을 대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것도 귀족의 품격이라고 여기기 때문인데 그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수레 가득 상품을 챙겨 수도로 오는 상인들의 왕래도 잦아지며 서로 경쟁하다 보니 물건을 구하기가 쉬워진다. 그렇게 귀족들을 상대하다가 필연적으로 덜 팔려서 남는 음식들을 노렸다면 굳이 흥정을 하지 않아도 싸게 먹혔을 것이다.
당연히 같은 생각을 하는 음식점 주인들과 눈치 싸움을 해야 했겠지만 거기서 우위를 가질만한 인맥도 충분해서 자신 있었는데 아쉽게 됐다.
"세상에. 엘디, 수도에 있는 동안 생활력이 너무 오른 거 아니니?"
아실리에도 당연히 살아온 시간이 있는 만큼 생활력이 부족하진 않았지만 도시 한 곳에 정착해서 살 때 필요한 것을 따지는 것은 익숙지 않은 편이었고, 덕분에 나는 그녀의 칭찬에 하늘까지 콧대가 치솟는 기분을 느끼며 열심히 집안을 점검하고 청소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최소 겨울이 다 끝날 때까지는 지낼 집이었다. 위드라 씨와의 수업에 따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수도 있으니 정말 내 집이라 생각하고 관리하며 지내야지. 물론 다 쓰러져가는 곳간같은 집을 준 것도 아니고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무려 마당과 마구간까지 딸린 중산층 이상의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굉장히 좋은 집이지만, 뭐든 마음가짐이 중요한 법 아니겠어?
"응. 이 정도면 얼추 정리된 거 같네."
"그러게. 내일 장작만 패서 넣어 두고 나머지는 그때그때 사면 되겠지."
깔끔하게 정돈을 마친 집안을 보고 있자 하니 덤덤하면서도 뭔가 참 간질간질하다. 역시 내 집 마련이라는 건 심금을 울리는 모양이다.
아직 점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기에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나는 약속대로 세네란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고 홀로 집을 나섰다.
[주인! 산책!]
"그래, 가자 산책."
지난 일주일 동안 라이카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늑대 투구 같은 걸 뒤집어쓴 것 같던 외형이 하루가 다르게 진짜 웰시 코기를 닮아가기 시작하더니 이젠 어디를 봐도 그냥 평범한 개의 외견을 가지게 된 것이다. 평범하게 마력을 식사로 줄 때마다 마검 주제에 용변을 본다며 쇳덩이를 싸재끼더니 지금처럼 평범한 개와 쉬이 구분이 안 가는 모습을 하게 되었다.
"너 근데 몸은 정말 괜찮은 거냐?"
[완전 멀쩡!]
덕분에 이젠 더 이상 검의 형상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나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그저 이게 정말 괜찮은 현상인지 확인하고 싶을 뿐. 내 주변에 그나마 마도구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게 세네란이다 보니 마침 데려가서 검사를 받아볼 생각이다.
[이제 똥도 안 싸! 개운해!]
잘됐다고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개에게 말 거는 미친놈이 되고 싶진 않았기에 난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누가 내 혼잣말에 신경이나 쓰겠냐고 생각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민간 거주 구역을 제외한 전 구역에서 나는 유명인이었다.
그동안 저질러 놓은 일들이 너무 많았으니 지당한 결과이긴 했다. 거기에 성광십자회의 공식적인 감사와 엔글렘 모험가 지부 및 반역자 뷩스 색출까지 끼얹어져 대대적으로 입소문이 나버린 탓에 나는 더 이상 대검을 들고 다니는 3미터 짜리 거인이라던가 송곳니가 이마까지 솟아오른 야만 전사 같은 게 아니게 되었다.
굉장히 구체적으로 외모가 알려져 버린 것이다.
큰 키에 근육질, 한쪽만 하고 있는 귀걸이에 웰시 코기 한 마리가 반드시 옆에 따라 붙는다는 것만으로 사람을 찾더라도 수도에서 나랑 이미지가 겹치는 놈은 하나도 없을 게 분명한 상황.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거리를 조금 거니는 것만으로도 알아서 길이 열리는 괴현상이 발생하는 중이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지.
[주인 강해! 다들 피해!]
라이카야. 이건 강해서 피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명시되어버린 내 외형과 달리 그간의 행적은 아직도 헛소문 속에서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농담이 아니라 나를 눈이 마주치면 그 대상을 중심으로 반경 3미터 안의 사람의 목을 다 베어 버리는 미친놈으로 여기는 새끼도 있었다. 심지어 적급 모험가라는 새끼가. 그 되도 않은 오해를 굳이 수고스럽게 바로잡아주지도 않았으니, 놈을 통해 또 어디까지 헛소문이 퍼져나갔을지는 에파가님도 모르실 거다.
"기분 참 오묘하구만."
뭐, 덕분에 느긋하게 거리를 거닐 수 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당장 눈이 내리더라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만연해진 추위 속에서 외투를 여미며 먹구름 낀 하늘을 바라보았다.
몇 년째 맞이하고 있는 겨울이지만 이번엔 뭔가 센티멘탈해지는군. 나중에 첫 눈이 내리면 아실리에랑 같이 마당에 눈사람이나 만들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대뜸 말을 걸어왔다.
딱 봐도 모험가였고, 별거 없어 보였으며, 옛날 오그웬에서 내게 어깨빵을 시도했다가 강냉이가 털린 양아치들과 비슷한 냄새가 나는 놈들 중 한 명이 조소와 함께 질문을 던졌다.
"이봐, 단두대. 네가 요즘 그렇게 날고 긴다며?"
"갈 길 가라."
모처럼 기분이 좋아서 적당히 봐주고 넘어가기 위해 놈들을 피해 건물 쪽으로 움직였더니 끄트머리에 서 있던 놈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대뜸 날 밀쳐 냈다.
당연히 밀쳐지지는 않았다. 그냥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을 뿐. 난 별 어이없는 새끼를 다 보겠다는 심정을 그대로 담아 놈을 바라보았고, 놈은 생각대로 밀리지 않은 내 모습에 주춤거리면서도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새끼, 명성 좀 올랐다고 우리가 우습냐? 적급 모험가들 알고 지낸다고 뵈는게 없어? 뒈질래?"
"단한대야."
"뭐?"
"니 강냉이 털고 기절시키는데 단 한대면 충분하다고 씨발놈아."
대답을 들을 가치도 없었기에 나는 그대로 놈의 죽빵을 갈겨 말한 바를 실천했다.
"억!"
인중을 후려치는 그 일격에 놈은 박살난 앞니 두 개를 코피와 함께 흩뿌리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딱히 마력을 쓴 것도 아닌데 반응조차 못했을 뿐더러 심히 녀석의 육체적 내구성이 의심되는 결과가 도출되어 내심 당황하는 것도 잠시, 나는 바닥에 꽂히기 시작하는 기분 속에서 스스로의 조울증을 의심하며 놈들에게 물었다.
"간만에 기분 좋았는데 별 개잡것들이 한 방에 조져놓네. 니네 뭐야?"
"너, 너 이 새끼 우리가 누구..."
"됐다. 누구인지는 나중에 알게 될 거 같으니 딱 대. 한 3주 정도는 죽만 마시게 해 줄 테니까."
뻔한 반응을 보인 새끼들은 나중에 가서도 하는 짓이 뻔하지.
갈길도 바쁜 와중에 말하는 꼬라지도 딱히 정겹지 않으며 어떤 형태로든 내게 지랄 할 게 분명한 놈들에게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남은 네놈도 쓰러진 녀석과 공평하게 대우하고자 주먹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