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는 이명異名을 너무 좋아해서 문제다. 내가 모험가들 사이에서 광견이나 단두대라고 불리는 것도 그렇고, 귀족들 사이에서도 레비엥의 단두대라 불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며 그러다보니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 인간들이 이명에 신경 쓰느라 정작 사람 이름을 모르는 것이다.
귀족은 귀족대로. 평민은 평민대로 자기들의 소문을 공유한다. 귀족이 평민의 소문을 듣는 건 마음먹기에 따른 일이지만 평민이 귀족들의 소문을 듣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나에 대한 소문을 접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레비엥의 단두대와 모험가 단두대가 동일 인물이라는 발상을 못 한다.
이름을 알면 '어? 같은 사람인가?'라는 의심이라도 해 보겠지만 모험가가 귀족을 상대로 깽판을 친다는 발상도, 귀족 사이에서 깽판을 칠 수 있는 무명의 인물이 모험가를 한다는 발상도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현실감 없는 판타지일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아마 모험가 단두대는 개 한 마리 데리고 다니고 레비엥은 개가 없다는 식으로 구분할걸.
'두 단두대가 붙으면 누가 이길까?' 같은 걸로 술자리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으니 뭘 더 기대하겠는가.
보급화된 통신 수단도 없어서 이 입에서 저 입으로 옮겨 가는 동안 복잡하고 외우기 귀찮은 이름보다 그간의 행적을 통해 얹어진 강렬한 인상의 이명만 기억하게 되고, 엔글렘의 뷩스처럼 수도에서 엔벨데가 누구 손에 죽었는지 제대로 된 정보조차 못 듣게 되는 경우가 허다한 세상인 것이다.
이러니 제대로 된 정보를 쥘 수 있는 것만으로도 돈이 되고 권력이 될 수밖에 없지. 정보가 없으면 내 손에 강냉이가 털린 놈들처럼 바닥을 기게 되는 거고.
졸지에 하등 의미 없는 랜덤 인카운터를 경험한 나는 깊은 빡침을 추스르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경비? 모험가 지구에서 주먹 싸움 때문에 경비대가 온다면 누군가 뇌물을 먹이거나 가족인 거다. 저것들 말뽄새를 보아하니 청급 혹은 적급이었을 텐데 지들 쪽팔려서라도 조용히 찌그러져 있다가 개수작이나 부리기 위해 움직이겠지.
그렇게 드워프 지구로 향한 나는 개쩌는 무기를 두 개나 선물해 준 발쿤 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할 겸 적당한 술병을 두 개 구입해 방문했다. 하나는 혼자 마시고 하나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적당히 한 잔씩 돌려 마시라고 독한 걸 들고 갔더니 그는 입이 귀에 걸릴 기세로 웃으며 나를 반겨 줬다.
"껄껄껄, 뭘 이런 걸 다 가져 왔나! 거 온김에 장비 정비도 받고 가게나!"
앞으로도 장기적인 도움을 받게 될 거 같아 인맥 관리한다는 느낌으로 선물한 것이었지만, 순식간에 웃음꽃이 피는 모습을 보고 있자 하니 이래저래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잠깐의 담소를 나누고 성대하게 배웅을 받으며 도착한 세네란의 마도서관은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도 훨씬 붐비고 있었다.
모험가들도 겨울 동안은 비수기를 맞이해 월동 준비하는 곰처럼 장기 투숙을 하기마련인데 왜 이렇게 붐비는지 잘 이해가 안 가 어리둥절하며 구경하고 있었더니 직원 하나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손님. 이번엔 엘프분 말고 다른 일행을 데려오셨네요?"
"...아. 지난번에 안내해주셨던."
어딘가 좀 어벙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사람은 아실리에와 함께 방문했을 때 안내해주던 싹싹한 직원이었다.
"넬비라고 합니다! 도서관장님께 이야기는 들었어요! 손님이 오시면 위층으로 모셔오라고 하셨거든요."
"다행이군요. 안 그래도 찾아뵙는다고만 말했지 구체적인 시기나 방법을 이야기하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밖의 날씨와는 차원이 다른 따듯함에 외투를 벗으며 인사를 건네자 해맑은 미소로 화답한 넬비는 이내 발치에서 주변을 구경하며 헥헥거리고 있는 라이카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너무 귀엽네요! 혹시 만져 봐도 될까요?"
"딱히 신경 안 쓸겁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라이카를 쓰다듬어 본 넬비는 자신이 쓰다듬어도 별 반응 없이 그저 주변만 구경하는 라이카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내 말을 이해하고 신기해했다.
"엄청 얌전하네요? 똑똑한 견종이라서 그러려나?"
"일반적인 개보다는 많이 똑똑하죠."
적당한 대답에 적당히 납득한 넬비의 안내를 받으며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오르던 나는 문득 뒤를 돌아 라이카를 내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엔 짧은 다리로 아등바등 어떻게든 계단을 오르려고 노력하는 눈물 나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주, 주인! 나 계단 힘들어!]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싸우기 위해 날뛰는 거라면 훌쩍 뛰어넘었겠지만 평범하게 움직일 때는 그저 웰시코기인 라이카를 안아 들며 다시 넬비를 따라 올라가니 놀랍게도 계단이 3층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것도 마법인가요? 분명 밖에서 봤을 땐 2층 건물이었는데."
"맞아요. 협회에서 제공하는 몇 안 되는 특혜 중 하나죠.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기도 하구요."
잠깐 마력을 사용해서 주변을 확인해봤으나 내부에서 작용하는 게 아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건물 밖에서 확인하면 뭐가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도착한 3층은 다른 공간 없이 오롯이 개인이 사용하는 공간이라는 것처럼 문 하나만 덜렁 놓여 있었다.
그리고 넬비는 그 문으로 다가가 세 번 두드리더니 대답도 듣기전에 다짜고짜 문을 열어 버렸다.
"사장님! 손님 오셨어요!"
"대체 노크는 왜... 드디어 왔구나!"
대충 묶은 머리와 펑퍼짐한 옷을 입은 채 안경을 끼고 뭔가 열심히 만지작거리던 세네란은 화색을 띠며 자리를 박차고 다가오다가 뒤늦게 내품에 안긴 라이카를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라이카 아니야? 뭔가 좀 바뀌었는데?"
"안 그래도 그거에 대해서 조언을 좀 듣고 싶어서 데려왔죠."
손짓만으로 넬비를 물린 세네란에게 우선 라이카의 변화 과정과 그간 보인 행동들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꽤 시간이 흘렀으나, 정작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뒤에도 그녀의 얼굴에서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황당하네. 원래 몸을 구성하고 있던 재료들을 배출하고 마력으로 몸을 구성하다니. 네가 유례가 없는 마력 사용자인 것처럼 라이카도 마검이면서 마검이 아니게 된 유례가 없는 경우라서 비교할 만한 사례가 전혀 없어 보여."
오히려 굉장히 심각한 표정을 하며 라이카를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내 입장에서는 마력으로 몸을 구성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녀는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악마를 상대했으니 마력으로 몸을 구성한다는 게 뭔지 대충은 알겠는데, 겨우 마력으로 식사를 대체한 것만으로도 이런 효과가 난다구요?"
"바로 그게 문제야. 마족들도 마검을 쓰는 놈들이 수두룩한데 이런 사례는 전혀 없거든."
"...굉장히 확신을 담아서 이야기하시네요?"
"난 원래 마족령 출신이거든."
너무나도 심드렁한 그녀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부터 확인했으나 뿔은커녕 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내 적나라한 반응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린 세네란은 괜히 부스스한 머리를 한번 휘적이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난 인간이야.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한 20년 정도 거기서 연구하며 살았지."
세상에. 20년? 많이 봐줘도 20대 후반으로밖에 안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녀는 소설 속에서나 보던 노화를 늦춘 마법사였나보다. 그런 놀라움이 내 표정에서도 드러난 것인지 세네란은 조금 못마땅한 듯 도끼눈을 뜨며 말했다.
"나이 물어보지 마라."
"제가 엘프하고 살아와서 나이에 좀 무감각합니다."
"흠흠."
괜히 헛기침을 하며 한차례 라이카를 더 살펴본 세네란이었으나 결과는 다를 바 없었다.
"당장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좀 두고 전문적으로 관찰해야 할 거 같아."
"뭐, 바로 모든 걸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그럼 이제 제 스승님이 되실 분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눠보고 싶은데요."
"위드라? 이미 서한을 보내서 이야기를 나눴어. 네 말대로 이번엔 제대로 답장하더라."
"예? 벌써요?"
워낙 한 맺힌 것처럼 굴길래 중간에 서서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할 거라 여겼는데 세네란은 보기보다 과감한 행동력의 소유자였다.
"적당히 알게 된 계기를 설명하고 마학의 발전을 위해 협력할 의사가 있다고 하니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하더라."
"전 전혀 들은 바가 없는데."
"나도, 위드라도, 너도 바빴으니까. 이번 주 안으로 얼추 정리해서 확정지을 생각이었어."
연구에 맹목적인 사람치고 상당히 배려심이 넘치는군. 다행히 그녀는 매드사이언티스트 계열은 아닌 모양이다.
"일단 오늘은 네 마력 표본만 간단하게 얻고 싶은데. 문제 없지?"
"엥? 그거 표본같은 걸 얻을 수 있는 겁니까?"
"마족들이 사용하는 도구지. 그치들도 마법사가 있고 집단이 있는 종족이거든. 당연히 내가 쓰려면 좀 번거롭지만 그 정도는 이미 준비해놨지."
싱글벙글 웃으며 뭔가 오묘하게 생긴 스포이드 같은 것을 꺼낸 세네란이 열성적인 시선으로 동의를 구해왔기에 난 고개를 끄덕이고 순순히 마력을 활성화 시켰다. 마력을 느끼는 것까지는 가능한 세네란은 그것만으로 방방 뛰며 내게 스포이드를 가져다 댔다.
"드디어!"
그 의미심장한 미소가 솔직히 아주 조금 소름끼쳤지만 악의는 없는 게 확실했기에 난 그녀가 들고 있는 도구에 집중하기로 했다. 자세히 보니 스포이드라기보단 주사기에 가깝지 않나 싶은 구조다. 저걸로 날 찌르는 건가 싶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내 쪽을 향해 가까이 댄 뒤 손잡이를 쥐어짜면서 잡아당겼을 뿐.
그러자 놀랍게도 유리로 된 도구의 몸통에 형형색색의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 몸에서 마력을 빨아들이는 건 아니다. 그저 겉으로 흩어지고 있는 마력을 그러모으는 것에 가까웠다.
"오. 이게 그냥 보이네?"
마력시를 사용하지 않아도 마력이 보이는 게 내심 신기해서 순수한 감탄을 입에 담자 싱글벙글하던 세네란이 두 눈을 부릅뜨며 반문했다.
"뭐? 이게 지금 보인...? 잠깐, '그냥 보이네?' 너 마력을 볼 수 있었어?"
어라, 보이는 거 아니었나? 딱히 마력시를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빛이 보이길래 세네란도 보고 있을 거라 여겼는데 전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차피 같이 협력하기로 한 이상 딱히 감출 것도 아니었기에 난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주었다.
"네. 눈에 마력 좀 집중해서 사용하면 보이는데요."
순수하게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고자 내뱉은 말에, 세네란은 세상의 모든 불공평함을 마주한 것처럼 인상을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