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가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칠 수도 없는 유용한 인적 자원이었기에 모든 국가들은 뜻을 모아 그들의 권익을 보장하며 활동을 장려하는데 동의했고 여러 지원 속에서 모험가 길드라는 집단이 꾸준히 유지되어왔다. 이는 결국 길드의 뿌리부터 정치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집단이라는 의미였으며, 이티스엘 수도 모험가 길드장 엔그림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관계이기도 했다.
그래서 엔그림은 지금 몹시 머리가 아팠다. 자신의 책상 위에 펼쳐진 서류들을 보며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엔그림은 나직이 푸념했다.
"이렇게 큰 친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업무라고 하기엔 많지 않은 양이었으나, 한 사람이 일으킨 사건과 그에 대한 여파를 조사하고 분석하며 향후의 움직임을 예상한 보고서라고 하면 결코 적지 않은 양이었다. 파바에라 사건 이후로도 꾸준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업무를 이어온 조사원의 보고서는 목표가 제국으로 날아갔을 때를 제외하면 매우 디테일한 부분까지 작성되어 있었기에 부실한 내용은 없었다.
지금은 오히려 그게 문제였다. 조금 있으면 조사원을 만나 향후 방침을 전달해야 했음에도 엔그림은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바뀔 리 없는 보고서를 다시 한번 흘겨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으로 푸념했다.
"대체 오가토르프는 어쩌다가 이런 친구를 주워 온거야..."
고작 몇 달 사이에 엘드미아 에가는 걸어다니는 폭발 마법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오죽했으면 오가토르프의 여식과 조용히 지내던 시절이 그리울 정도일까. 무슨 보고서만 놓고 보면 재수 없게 굵직 굵직한 사건들에 휘말리는 자급 모험가라고 해도 믿을 수준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관인 것은 왕실에서 직접 전달해준 정보였다. 보고서에 의하면 제국에 있었을 때 황녀 암살 및 납치 미수 사건을 막고 공을 세우는 과정에서 게이트를 통해 마족 특수 부대 한가운데로 떨어졌음에도 부대의 대장을 죽이고 살아서 귀환했다는데, 왕실의 인장까지 찍혀 있었음에도 엔그림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게 최근 귀족들과 모험가를 가리지 않고 유행하고 있는 유희 소설인지 보고서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함부로 유출되면 안 되는 내용이었기에 다른 이들과 의견을 공유하지 못했을 뿐이지, 보여 줘도 되는 거였다면 헛웃음을 터트리며 접수원들과 돌려 보고 싶은 내용이 한두 개가 아니다. 조사원의 보고서와 대조해서 살펴보는 정보들이 하나 같이 헛소문 같은 진실들이라서 더 골 때렸다.
이래서 모험가 등급을 더 세분화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주장한 것인데 아직도 그간 이어져 온 전통이라는 이유로 바뀌지 않는 게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이게 대체 어딜 봐서 청급이란 말인가. 그렇게 엔글렘 길드장의 비참한 죽음까지 읽은 엔그림은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들어오게나."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서류를 깔끔하게 정리하며 혼란한 머릿속도 정리하는 엔그림의 얼굴을 보자마자 낄낄 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길드장님 얼굴에 근심걱정이 가득하구만. 엘드미아 형씨의 기막힌 모험담을 다 읽으셨나 봐?"
원래 좀 타고나기를 험악하게 타고난 얼굴 때문에 그 웃음조차도 참으로 사악하고 비열하게 느껴질 여지가 있었으나 엔그림은 조사원인 남성의 웃음이 진짜 그냥 웃겨서라는 걸 잘 이해하고 있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에게 화를 낼 구석은 전혀 없었다. 이 모든 세밀한 보고서들은 모두 저 남자에게서 나온 거였으니까.
그래서 엔그림은 귀한 초콜릿을 꺼내 대접하며 힘없이 웃어 보였다.
"이거 적당한 소설가에게 던져 주면 적당히 팔리는 소설 하나 나올 거 같다고 생각하지 않나?"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제대로 읽은 건 맞네. 대체 오가토르프 가문은 어쩌다가 이런 친구를 데려온 거야?"
그 감상마저도 나와 같군. 엔그림은 쓴웃음을 지으며 오랜만에 만난 조사원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게. 아무리 험악해도 우리 길드의 우수 조사원 아닌가."
"이야, 그게 실종 신고까지 마다하지 않는 정보원에게 할 소린가? 섭섭해서 초콜릿 좀 주워 먹어야겠는데."
엔그림이 가장 신뢰하는 조사원 가룬은 더욱 험악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다소곳하게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이미 초콜릿과 차를 세팅하고 있는 엔그림을 도우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친구야. 파바에라 때 보여 준 무용만으로도 오줌을 지릴 뻔했는데 그게 새 발의 피였다니까?"
"왕실에서 보내준 정보가 아니었으면 아무리 자네라고 한들 과장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어처구니없게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더군."
"진짜 말도 마. 감도 좋은데다가 옆에 엘프도 붙기 시작하고, 최근엔 안 보이는데 꿈을 섬기는 자까지 어디서 달고 나타나가지고 하마터면 걸릴 뻔했다고."
가룬은 실력 있는 모험가였다. 한 때 자급 모험가들 사이에서 악당 가룬이라고 하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척후였던 그는 그 기술만으로도 은급의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오른팔에 입은 치명적인 부상만 아니었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겠으나, 지금은 은퇴 후 길드원으로 활동하며 숙련된 추적술과 은신술을 통해 여러모로 큰 공헌을 해주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엘드미아와 엮이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였다. 원래 그는 파바에라의 동향을 확인하고 감시하기 위해 보낸 거였으니까. 살면서 나쁜 일이라고는 어릴 적 동생의 사탕을 뺏어먹은 게 전부인 그에게 '악당'이라는 이명이 달리게 만든 험악한 얼굴에서 천천히 미소가 지워지며 본론이 흘러나왔다.
"계속 지켜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이 이상은 위험해. 빨리 손을 써서 우호적인 관계를 쌓던가, 하다못해 이런 뒷조사만이라도 멈춰야할 거야."
"...그 정도인가?"
"주변에 사건사고가 터지는 만큼 큼직한 인물들도 자꾸 엮이고 있어. 이번 성광십자회 내부의 이단 숙청이 끝나면 오그웬의 교구장은 주교가 되겠지. 황금의 마법사는 모종의 이유로 인해 그와 협력관계를 맺기 시작한 거 같고, 그림자 발과 인연이 있는 장인 발쿤과의 접점도 결코 흐지부지하지 않아. 저 어린 친구가 어떻게 그리도 사회생활을 잘하는 건지 아주 마음에 쏙 든 모양이더군."
보고를 받았음에도 당사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가룬은 평소처럼 일말의 과장없이 냉정하게 상황을 평가하며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을 나누려고 했다. 그런데도 저런 앓는 소리가 나오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엔그림은 떠오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당장 거기만 하더라도 재수 없게 걸리면 바로 그림자 발에게 뒷목을 잡힐 수준인데 이제는 옆에 마검이었던 개까지 끼고 있잖아? 가끔씩 말 거는 거 보면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지능이 있는 거 같던데, 솔직히 정상적인 능력을 한참 넘어선 개의 추적을 피할 수 있다고 장담하진 못하겠어."
"그냥 혼잣말일 가능성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지만, 전혀 없어. 그리고 그것과 관련돼서 방금 전에도 사건이 하나 터졌지."
"뭐?"
"최근 가엔달 파티와 문제를 일으켰던 민간 길드. 걔들이 우리 형씨를 건드렸거든."
엔그림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싶은 것을 정말 힘겹게 참으며 초콜릿을 집어 입에 넣었다. 평소엔 그 가격을 생각하며 입도 안 댔을 텐데 어째 오늘은 자연스럽게 손이 갔다.
"아무리 미친놈들이라고 하더라도 수도 안에서 사람을 죽이려고 들지는 않았을 터이니 그냥 어디 몇 군데 부러뜨리는 정도로 끝내지 않겠는가? 어차피 그 친구는 누울 자리를 봐 가면서 드러누우니..."
"글쎄. 나도 그 민간 길드에 가입한 놈들 중 낯익은 놈들이 없었다면 그리 생각했을 거야."
"...낯익은 얼굴?"
가룬이 여유를 부린다는 건 여유를 부릴 만하기 때문이다. 그게 이미 손을 쓰기엔 너무 늦어 버린 것일 수도,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 것일 수도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엔그림은 조바심을 내고 싶지 않았으나 그의 말이 암시하는바가 너무나도 불길한 탓에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소린가?"
"당텔 패거리들이 거기 가입했거든."
짝. 결국 참지 못하고 엔그림은 자신의 이마를 치고 말았다. 나이 때문에 슬슬 넓어지기 시작한 이마에서 난 소리는 너무나도 경쾌했으나 정작 그의 머릿속과 현재의 상황은 조금도 경쾌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상황만큼은 여러 의미로 경쾌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날 의뢰를 마치고 돌아온 엘드미아는 당텔 패거리를 개 패듯이 팬 다음 확실하게 선언했다. 패거리 만드는 등의 헛짓거리를 하면 저승길로 보내버리겠다고.
그리고 정황을 놓고 봤을 때, 그는 진짜로 그들을 다 죽이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가볍고.
상쾌하게.
순식간에 두통이 밀려왔다.
"한동안 조용히 지내는가 싶더니..."
울상이 되어가는 엔그림을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보면서도 가룬은 말을 이었다. 물론 그의 표정은 안타까워한다기보다 비아냥거리는 게 아닌가 싶은 상태였으나 엔그림은 오해하지 않았다.
"적급 모험가들이 움직이니까 이때구나 하며 달라붙은 거지. 사실 가엔달 파티보다 모자랄 뿐이지 이번 까인 거로 원한을 가진 놈들 중에는 실력만큼은 나쁘지 않은 애들도 좀 있는 편이니까. 근데 내가 보기에 이대로 가면 오늘 그 친구들 중 반절 이상은 죽을 거야."
모험가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하지만 유용한 인적 자원인 것 역시 사실이다. 그리고 정말 없느니만 못한 인성을 지닌 게 아닌 이상 적급은 그런 유용한 모험가의 시작점이다. 아무리 수도가 다른 지역보다 평화롭다고 한들 열 명 남짓한 적급 모험가들과 그들의 휘하에서 보호와 가르침을 받겠다며 모여든 스무 명가량의 모험가들의 공백을 가벼이 여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제 곧 눈이 내리는 진짜 겨울이 시작된다. 의뢰에 혹해서 무리한 이동을 하다가 죽을 것을 우려해서 활동에 제약을 둔다는 건, 그들이 혹할 만한 의뢰들이 겨울에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건 수도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물자 뿐만 아니라 사람도 비축해놔야 하는 계절. 그게 모험가 길드의 겨울이었다.
그랬기에 평소라면 아무런 주저 없이 바로 사람을 동원에 중재에 나섰을 엔그림이었으나...
"하필...당텔..."
이번엔 저울의 균형이 너무나 제멋대로 움직이는 탓에 쉬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끙끙거려야만 했다.
가룬은 그런 엔그림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초콜릿을 하나 더 입에 넣었다. 자신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길드장만큼은 안하리라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