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방면에서 '이긴다'는 결과를 얻기 위해 쓸 수 있는 방법은 항상 다양하다.
싸움 역시 마찬가지다. 무기의 선택부터 비겁과 정정당당, 직접과 간접 등등 고려해야 할 일들과 고려해야만 하는 일들이 무궁무진하다는 건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이다. 그 수많은 방법들 중 무엇을 선택했는가에 따라 다른 이들이 그 승리를 인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한다는 건 더욱 당연한 일이다.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룬은 잠시 고민에 빠져 보았다.
과연 사람들은 엘드미아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엘드미아는 당연히 모르겠지만 가룬은 파바에라 사건 이후 의도치 않게 그를 조사하며 알게 모르게 정이 많이 든 상태였다. 물론 그가 악당이라거나 쾌락살인마였다면 정이 들기는커녕 모든 행동들을 긁어모아 증거랍시고 왕실로 보내버렸겠으나 행동과 업적만큼은 이미 날고 기는 용병 뺨치는 소년은 법규따위 개뿔도 신경 안쓰는 듯하면서도 선을 지키고, 사람을 막대하는 듯하면서도 정이 많았다.
그만큼 눈 밖에 난 존재들에게 가차 없는 것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그가 살면서 만나온 수많은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엘드미아 정도면 괜찮은 인격자에 속했다. 그저 발작을 일으킬만한 요소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인간이라서 그렇지.
그랬기에 가룬은 엘드미아가 오래 활동하며 더 많은 이야기를 써 내려가길 바랐으나, 대외적으로 보여지는 엘드미아의 모습이 혼돈 그 자체라는 게 문제다.
선행은 과시하지 않으며 보복은 적당히가 없을 뿐만 아니라 상대가 누구인지 가리지 않고 수틀리면 일단 밀고 나간다. 그 당당함 뒤에는 대체 저 어린 친구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길래 저런 거까지 알고 있는 것인가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명확한 근거가 뒷받침하고 있다 보니 면밀히 살펴본다면 생각 없이 날뛰는 미친개와는 거리가 많이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덕분에 좀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들은 그 범상치 않음을 이해하고 골 때리는 친구라 여기며 적당히 거리를 두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긍정적인 관점으로만 그를 주시할 리 없다.
15살짜리 청급 꼬마가 자기들보다 잘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들보다 그렇지 못한 이들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니까. 최대한 모난 곳 없이 지내려는 이조차 뛰어난 재능만으로 질투의 대상이 되는 마당에 제 재능을 믿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미쳐 날뛰는 것처럼 구는 것처럼 보이니, 잘 모르는 이들 입장에서는 더더욱 고깝게 보일 것이다.
그의 곁에 유명한 이들이 엮이고, 권력이 붙을수록 그 시선은 더더욱 차갑게 식어 가겠지. 설령 엘드미아 본인이 주변에 어떠한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지라도 결국 그가 유도한 상황이 멋모르는 이들로 하여금 특혜를 받고 날뛰는 재수 없는 놈으로 보이게 만들 테니까.
"으음. 예상대로 거하게 저질러 놨네."
그런 이들에게, 뭉쳐서 만들어지게 된 계기는 좀 많이 머저리 같을 지언정 표면상으로는 나름 정상적이던 민간 길드 하나를 통째로 엎어 버린 엘드미아의 행보는 결코 곱게 보이지 않으리라.
"실례합니다. 모험가 길드에서 나왔습니다. 좀 지나가겠습니다."
항상 몸을 숨겨야 했던 평소와 달리 구경꾼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당당하게 길을 뚫고 나아가는 건 참으로 색다른 경험이었으나, 엘드미아가 저질러 놓은 일이 워낙 특출나다 보니 별다른 감흥도 없다. 나름 서둘러서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늦어 버린 그의 시야에 건물 밖에 쓰러져 있는 민간 길드 소속 모험가들이 들어왔다.
아니, 정확하게는 모험가들'이었던' 시체들과 부상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봐도 일곱은 죽고 서너 명만 숨이 붙어 있는 꼴이 엔그림의 미간에 새겨질 주름 개수로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가 알기로 민간 길드원들은 엘드미아와 미리 부딪쳤던 인원을 제외하고도 스물 남짓이었다. 결국 남은 인원은 저 건물 안에서 엘드미아와 대치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쓰읍. 초콜릿 좀 더 주워 먹고 오는 거였는데."
그랬다면 소강상태에 이르렀을 때 도착하지 않았을까.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도 없고, 이미 길드 관계자라고 말하며 구경꾼들을 뚫고 입장한 가룬에게 엘드미아가 나올 때까지 대기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는 부디 엔그림이 따로 경비대에게 보낸 길드원들이 제 때 도착하길 바라며 던전과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 안으로 발을 디뎠다.
박살난 문 때문에 난장판이 되어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거와 달리 건물 내부는 딱히 부서진 곳 없이 깔끔했다. 바닥도 깔끔했고, 계단도 깔끔했다.
그리고 계단과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여섯 구의 시체도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끄응, 그 정체불명의 무기를 들고 왔나 보네."
죽은 시체들은 하나같이 몸에 바람구멍이 난 상태로 눈을 뜬 채 죽어 있었다.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투사체로 사교도들을 원거리에서 쓸어 버리던 광경이 떠오른 가룬의 얼굴이 짐짓 심각해졌다.
이 좁은 곳에서 적급 모험가들이 무더기로 달려들었는데도 그들의 상처는 동일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격에 관통당한 것도 아닌 게, 급소를 뚫리긴 했으나 전부 제각각이다.
검 한 번 제대로 휘둘러볼 틈도 없이 죄다 꿰뚫어 죽일만큼 빠른 화살이 궤도마저 제멋대로라니, 직접 보지 못했다면 질나쁜 농담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춤추는 화살인가..."
자신이 현역이었다 하더라도 결코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인물 리스트에 엘드미아가 자리매김하는 동안 빠르게 시체를 살펴본 가룬은 2층에서 들리는 소음을 눈치채고 빠르게 뛰어 올라갔다. 이미 늦은 것과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살릴 수 있는 놈들은 살려놔야 엔그림의 주름이 하나라도 덜 생긴다.
그리고 그의 주름이 덜 생기는 상황이 와야 자신의 업무도 편해진다.
의도적으로 큰 소리를 내며 향한 소음의 발신지는 2층 테라스로 이어지는 복도 끝이었다. 건물에서 유일하게 스테인드 글라스로 만들어진 테라스의 문이 가로등 빛을 받아 형형색색의 빛을 뿌리는 아름다운 풍경과 달리 거기서 금방이라도 사람을 때려 죽일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시선을 돌린 엘드미아를 보며 가룬은 솜털까지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정작 엘드미아는 가룬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벙찐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가룬?"
이런 세상에. 겨우 한 번 봤을 뿐인데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엘드미아의 뒤를 캐고 다녔다는 걸 들키게 될 경우 어떤 반응이 돌아올 지 알 수 없었기에 가룬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두 팔을 들어 올려보였다.
"이야, 형씨! 오랜만이야. 날 기억해 줄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말이지."
"어떻게... 죽은 거 아니었나?"
"아? 아! 파바에라. 이거 오해를 남겼구만. 나 사실 길드 소속 조사원이야. 그땐 파바에라를 조사하기 위해 일부러 몸을 숨긴 거였지."
당혹스러움과 놀라움이 공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엘드미아의 뒤에는 두 무릎에 구멍이 뚫린 채 바닥을 기고 있는 당텔이 식은땀과 눈물을 쏟아 내며 연신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하지만 엘드미아가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린 틈을 타 도망치려 하지는 않았다. 가룬은 그게 당텔의 의지라기보다 엘드미아의 머리 옆에 둥둥 떠 있는 예의 춤추는 화살로 인한 강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게 내가 지금 여기에 오게 된 이유지. 자네만 괜찮다면 일단 그 성범죄자 새끼는 내버려두고 잠깐 대화를 해봤으면 하는데, 어떤가?"
"...그게 길드의 입장인가?"
제기랄. 저게 어딜 봐서 15살이야. 내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눈치채고 거두절미하며 본론부터 꺼내는 15살?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모험가 소설도 그런 주인공은 내세우지 않을 걸.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기분 속에서 가룬은 태연한 척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부디 이번만큼은 자신의 얼굴이 좀 덜 험악하게 느껴지길 바라며 최대한 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길드의 입장은 항상 분쟁을 최소화하는 거지. 만약 자네가 물어본 게 그거라면, 맞아. 하지만 이 민간 길드 소속 친구들을 보호하고 옹호하는 입장이냐고 물어본 거라면, 아직은 아니지. 우린 사건의 전말을 모르거든."
다행히 나쁜 대답이 아니었는지 자신을 향해 쏟아 내던 적의를 거두며 엘드미아는 자신의 턱을 쓸어 만졌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다면 무언가 고민한다는 소리였고, 가룬은 거기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래도 길드 우수사원이라서 자네에 대한 소문은 좀 들었어. 요즘 자네 전적이 화려하다 보니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거든."
"...그런데?"
"그러다 보니 자네가 왜 이러는지는 얼추 감이 온다는 거지. 판 깔리기 전에는 날뛰지 않는 친구가 날뛰었으면, 보통 그럴 만한 판이 깔렸다는 뜻이잖아?"
마치 더 말해 보라는 듯이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엘드미아에게 가룬은 은근한 호의를 드러내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쪽 친구들도 보아하니 아주 작정을 하고 달려들었는데 자네는 제대로 된 무기조차 뽑지 않고 상대했으니 정당방위가 성립될 거고, 그 전에 이렇게 부딪치게 된 원인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조사하면 알 수 있게 되겠지. 그간 퍼져온 자네의 소문이 진짜라면 어차피 아무런 문제도 없이 끝날 거야. 하지만 당텔은... 의도치 않게 조금 별개가 되었다는 말이지. 무력화된 상태잖아."
제대로 된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을 뿐더러 무릎이 박살 난 것인지 다리를 가누지도 못하고 있다. 차라리 다리라도 멀쩡했으면 모르겠으나 가룬에게도 입장이라는 게 있었다.
"길드 소속인 이상 나도 결국은 공무를 위해 온 입장이거든. 무력화된 상대를 향한 폭력 행위는 막아야 해. 그런데 지금 자네가 녀석을 죽여 버리면, 길드의 정식 중재에 불응한 것처럼 보일 수 있어."
"그래서?"
"협박하거나 강요하기 위해 말하는 건 아닌데... 나름의 처벌은 피할 수 없다는 말이지. 자네에겐 대수롭지 않은 처벌일 수 있지만, 당텔에게는 그럴 만한 가치도 없잖아?"
그러니 일단 무기를 거두고 물러나자.
똑똑한 친구니까 굳이 뒷말을 입에 담을 필요는 없었다. 실제로 엘드미아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기에 가룬은 자신의 설득이 먹혔다고 생각했다.
"맞아. 지금은 그럴 가치가 없지."
하지만 엘드미아는 입으로 동의한 것과 달리 팔을 뻗어 당텔의 멱살을 쥔 채 들어 올렸다. 엄연히 성인 남성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평범한 짐짝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태연하기 그지없는 그 모습에 잠깐 얼이 빠진 가룬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엘드미아는 이어서 말했다.
"이 새끼는 죽어야만 가치가 생기거든."
"씨, 씨발! 개 같은 새끼! 좆 까! 좆 까라고! 개! 좆...!"
가룬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엘드미아는 침을 튀기며 욕설을 내뱉는 당텔을 그대로 문을 향해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 들어 올릴 때보다 더 강한 힘에 휘둘린 당텔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얼굴로 유리문을 박살 내며 밖으로 날아갔다.
"씨바아아알!!"
긴장한 가룬의 신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상황을 천천히 눈에 담기 시작했다. 마치 세계가 느려진 듯한 모습 속에서 가룬은 자신이 얼마나 긴장했는지를 뒤늦게 통감했다.
그 느려진 세상 속에서 비산하는 유리들을 뚫고 테라스 밖으로 피를 흩뿌리며 날아가는 당텔의 모습과 그를 내던지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엘드미아의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인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기이한 찰나의 시간 속에서 엘드미아가 말했다.
"내 경고에 두 번은 없다는 걸 증명하는 결과물로써의 가치."
그 말을 신호 삼아 엘드미아의 옆에서 빠르게 회전하던 투사체가 당텔을 향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