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55화 (255/412)

레스롬 공작과의 만남을 위해 구체적인 일정을 정하고 가벼운 잡답을 마치는데에는 삼십 여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 시간 동안 나눈 이야기는 어느 정도 내 의문들을 해소해 줄 만한 것들이었다. 최근 내가 날뛰고 깽판을 친 게 있다 한들 이렇게 적극적으로 보호해주는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결국은 이런저런 명분과 위신의 문제가 엮인 것에 가까웠다.

반역자 목을 친 놈이 한낱 모험가들과 알력 다툼했다는 걸로 구설수에 오르는 건 왕가의 위신에도 좋지 않다는 소리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흐지부지된 다음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한창 핫한 이슈이다 보니 빠르게 손을 썼다고 한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잠에서 깨어나 낑낑거리며 계단을 내려온 라이카가 내 곁으로 다가오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루세릭은 대화를 마무리 지음과 동시에 찻잔을 비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사흘 뒤에 귀족원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구금소를 벗어나자마자 냅다 훈장을 준다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니 적당히 텀을 두고 보자는 게 그의 의견이었고 난 별 말 없이 수락했다. 이번 일이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고 해서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아니었던만큼 감사의 표시라기보단 그냥 귀찮은 일을 빨리 끝내자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렇게 루세릭과의 대화 후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지난 아침, 난 그가 말했던 대로 구금소를 벗어날 수 있었다. 마치 단기 투숙하고 떠나는 여행자와 별다를 게 없는 행보에 메시엘라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이번에도 신세 졌습니다 메시엘라 씨. 잘 지내세요."

대체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 감을 못 잡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결국 웃어 보인 메시엘라 씨를 뒤로한 채 집으로 돌아오는 것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잔뜩 뿔이난 아실리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이미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하고 있는 그녀라고 해도 걱정은 별개인 법. 난 이번 일이 정말 별거 아니었으며 왕실의 체면 때문에 좀 커져 보일 뿐이라는 것을 열심히 어필해야만 했다.

"...하아, 가끔 보면 내가 백 년을 살아온 건지 엘디가 백 년을 살아온 건지 헷갈려."

불만으로 인해 잔뜩 튀어나와 있던 입이 들어가고 바짝 서 있던 귀가 가라앉을 때쯤 고개를 내저으며 아실리에가 중얼거렸고 난 적당히 웃어 보였다.

개의 평균 수명이 20년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해서 개의 시간 감각을 인간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장생종인 그녀의 입장에서 단생종인 인간의 사고와 사회는 항상 급박하고 다급하게만 느껴진다고 한다. 나도 그녀의 감각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결국 사람을 걱정하는 마음이라는 건 종족을 떠나 똑같다 보니 아예 공감 못 하는 것도 아니다.

"어련히 알아서 행동하겠지만 위드라 씨가 준비를 마치는 것도 머지 않았으니 좀 조심히 다녀."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짓는 엘드미아 아니겠어? 조심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당장 오가토르프 가문의 우수 집사, 레비엥 변경백의 우수 수행원이라는 화려한 커리어가 있는데 어찌 이리도 신뢰가 부족하지?

"...흠."

돌이켜보니 다 업보였다.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짓는다는 내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었으나 그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말과 이음동의어인 것은 아니었네. 어차피 이번 기회를 통해 한동안은 공부에만 집중할 예정이라고 장담하며 아실리에를 안심시킨 나는, 그동안 살펴볼 시간이 없어서 쌓아 두고만 있었던 성광십자회의 정보들을 훑어보기 위해 수많은 문서들과 함께 따뜻한 난로가에 자리를 잡았다.

공개 가능한 보고서와 정보들을 추리고 또 추려 냈음에도 불구하고 문서는 결코 적지 않았다. 저것들만 땔감으로 태워도 한 이틀은 따뜻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하긴, 7년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이렇게 쌓아 두고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있었다니. 최근 독립한다고 이래저래 바빴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며 나는 과거의 기록부터 차근차근 확인하기 시작했다.

문서에 적힌 내용들은 딱히 기밀까지는 아니되 일반적으로 구하기도 힘들거나, 구할 수 없는 정보들이다. 성광십자회의 교전 기록, 대외적인 활동 기록, 마왕군 조사 보고서 등등으로 이루어진 문서 더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성광십자회의 성기사와 성전사들이 민간 구제를 이어 나가면서 마주친 마족과의 자잘한 전투 보고서들이었다.

-자칭 자급 모험가들과 마왕군 척후부대의 교전. 빠르게 합류한 덕에 경미한 피해로 끝남.

-적급 모험가의 시체를 확인. 동료의 흔적 없음. 단독 척후 활동 중 마왕군을 마주한 것으로 예상. 근처에 마왕군의 시체 한 구를 발견.

-붉은 갈까마귀 용병단이 마왕군이 점령한 부락을 급습하여 유효한 피해를 입힘. 손해는 경미함...

마왕군은 힘의 논리로 돌아간다.

단순 무식하게 저들끼리 막고라를 떠서 이긴 놈이 대장이다 같은 단순 논리가 아니라 전투 능력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미다. 아, 막고라를 떠서 대장직을 해먹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더라. 어쨌든 그런 곳이기에 마족에게 '군'에 들어간다는 건 그 폭력의 피라미드 밑바닥에 자진해서 기어들어 간다는 의미이고,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먹고 살려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평균적인 인식이 그러하다고 한다.

당연히 그렇게 막 군대에 들어간 일개 병사조차 인간보다는 강하다. 표현 그대로 종이 다르니까.

지난 7년간의 전쟁으로 경험까지 쌓은 놈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평범한 적급이라면 죽을 각오를 하더라도 상처 하나 못 내는 게 '정상'인데... 성광십자회의 보고서는 전혀 다른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전령으로 고용된 청급 모험가 파티가 마왕군 첩보 부대를 발견. 격퇴.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여 추가금을 전달함.

-구호 활동을 위해 고용된 적급 모험가의 희생으로 진료소를 지킬 수 있었다. 야습을 틈타 화공을 시도한 마왕군 별동대 셋을 죽이는...

심지어 최신 문서에 이르러서는 청급 중에서도 마왕군을 상대하여 공적을 남기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기록되어 있다. 전쟁 초기에 작성된 보고서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사례들을 훑어보며 난 점차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강해지고 있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건 아닐지언정 전선에서 전투를 이어 나가는 인간들도, 마족들도 모종의 이유로 강해지고 있다. 단순히 전쟁과 전투에 익숙해졌다고 할 수 있는 수준과는 거리가 있는 강함이다.

아무리 인류의 특기인 물량 공세로 버티는 중이라고 한들 사람이 대나무처럼 자라는 것도 아니고 7년간 천문학적인 수의 장정들이 죽어 나간다면 나라가 멀쩡히 돌아갈 리 없다. 당장 지구의 2차 세계 대전만 하더라도 6년 정도에 걸쳐 이루어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잖는가.

하지만 여기의 인류는 지금도 멀쩡히 살고 있다. 전장에서 멀리 있는 사람들은 그 영향을 거의 못 느끼고 삶을 이어나갈 정도로 평범하게 살고 있다. 물론 유능한 인재의 부족은 절실히 느껴지지만 강제 징용도 없고, 애국심에 호소하여 추가 모병을 하려는 국가 단위의 프로파간다도 없이 여기까지 유지된다는 건 전선으로 향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안 죽고 살아남아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덕분에 애써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려 했던 의문 하나가 간만에 슬그머니 머리를 치켜들었다.

마왕과 용사. 반복되는 역사. 용사가 마왕을 물리치는 것만으로 전쟁은 끝이 나고 마족은 물러나게 된다는 전설 내지는 연극 각본과도 같은 결말.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세상을 이따위로 만든 거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덕에. 그곳에서 판타지라는 가공의 소설을 읽어오며 비슷한 클리셰들을 봤기에. 기어이 그 소설 속 세상에서 살아가는 입장이 됐기 때문에 십여년 정도 되는 세월을 항상 함께 해 온 의문.

동시에 '왜?'라는 질문에 '그냥 그런거야.'라는 대답 밖에 돌아오지 않는 의문이기도 했다.

[주인! 배고파!]

내 무릎 위로 올라와 헥헥 거리는 라이카가 잠시 사색에 빠져 정신을 놓고 있던 나를 깨워주었다. 목동견이었던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형상화 한 탓에 짧디짧은 녀석의 꼬리가 연신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자 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일 시키고 나서 안 챙겨 줬구나."

녀석의 턱을 쓰다듬으며 마력을 흘려 넣자 포만감에 라이카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녀석의 반응과 벽난로의 온기. 그리고 아실리에가 식사를 준비하며 자아내는 소음 하나하나를 듣고 있자하니 뭔가 지금까지는 쉬이 정리할 수 없었떤 의문이 끝을 고하고 있었다.

중형견답게 큰 몸뚱이를 열심히 돌돌 말아 내 무릎 위에 자리 잡기 시작한 라이카를 수 차례 쓰다듬어준 뒤, 들고 있던 문서를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애초에 다 읽으면 파기하기로 약조했으니 문제 될 건 없었다. 절세 비급이라던가, 몇 번에 걸쳐 반복 학습해야 하는 내용같은 것도 아니라서 굳이 보관할 이유도 없다. 그렇게 내용 파악이 끝나거나 내 의문을 해소하는 용도를 마친 문서들은 차례대로 벽난로에 지펴진 불길 속으로 사라져간다. 그와 함께 지금까지 품고 있던 의문도 같이 태워 버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자칭 신이라는 이름의 고등 지성체가 찰나의 유희를 목적으로 주사위를 굴리는 것인지, 아니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숭고한 뜻이 있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그냥 원래 이렇게 굴러가야 하는 세상인 것인지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미 한 번 죽고 다시 태어난 이상 난 결국 이 세계의 주민이니까. 신으로 태어나서 이 모든 걸 뜯어 고쳐야 하는 것도 아니니 그저 주어진 삶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신들이 어떠한 이유로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고뇌하며 두 번째 생을 허비할 생각은 없다. 그건 저 용사 지크프리트가 알아서 하겠지.

"나를 지키고, 내 주변을 지킨다."

아직까지는 그거로 충분하다.

오랜 시간동안 품어왔던 고민 하나를 해결해서인지는 몰라도 오늘따라 벽난로의 불꽃이 더 아늑하게 느껴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