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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56화 (256/412)

최근 들어서 이티스엘 왕립 아카데미는 여러모로 시끌벅적했다.

그간 소문만 무성했던 반역자들의 모임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듯 몇몇 재학생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모습을 감춘 것도 그런 분위기에 크게 일조하고 있었지만 주된 원인은 반역자 엔벨데를 단신으로 격파한 인물에 대한 온갖 무성한 소문들 때문이었다.

외부인들이 보기엔 그 모습이 조금 의외이면서도 왕국의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이들에게 인간미를 느끼게 만드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미래를 이끌어나가기 위한 인재를 육성한다는 아카데미의 취지에 걸맞은 이들이 모였다고는 하나, 아직 20살도 안 된 이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자극적인 이슈에 귀가 팔랑거릴 수도 있겠다고 여길만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소문에 휘둘리는 건 일반적인 이유와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세간에 퍼진 것보다 훨씬 디테일한 정보를 쥐고 있었고, 거기엔 레비엥의 단두대가 누구이고 몇 살인지 그리고 최근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엘드미아가 직접 봤다면 지크멜이 자신의 정보를 가져다 판 게 아닌가 의심부터 할 상황이었지만 결국 왕실 정보부 소속의 요원들도 사람이고 누군가의 부모이며 자식에겐 한없이 약할 수밖에 없는 슬픈 존재이기에 나타난 결과였다. 당연히 그들도 정신머리는 제대로 박혀 있었기에 기밀이라 할 만한 사안들을 유출하지는 않았으나...

엘드미아에 대한 정보는 기밀보다 기밀이 아닌 게 더 많았다. 그리고 그건 셰릴 츠신 오가토르프에게도 굉장히 애석한 일이었다.

그가 어디 출신이고 누구와 함께 수도로 왔으며 그 뒤로 어디서 지냈는지까지 학생들이 알아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기에.

"그, 오가토르프 양? 괜찮으면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엘드미아라는 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데."

"셰릴? 엘드미아의 키가 2미터가 넘고 자기 키만한 대검을 들고 다닌다던데 정말이야?"

"오가토르프! 혹시 엘드미아 경과 대련을 할 수 있을까?!"

덕분에 본디 겨울방학까지는 평온하기 그지없어야 했던 셰릴의 아카데미 생활은 매일매일이 전쟁터와 다를 바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그나마 방금 대련의 기대감을 안고 달려든 거구의 사내 정도면 귀엽게 봐줄 만 했다. 최근 그녀에게 접근하여 어떻게든 연줄을 만들어 보려던 이들은 대부분 가십에 목말랐거나, 현재 오가토르프 가문밖으로 나선 엘드미아를 어떤 형태로든 잡아보려는 흑심이 있었으니까.

애당초 소문을 통해 능력이 충분하다는 걸 알면서 왜 그런 능력을 지닌 이가 오가토르프를 굳이 벗어났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일까. 아버지가 사람을 험하게 대한다는 소문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체 오가토르프조차 붙잡지 못한 인물을 저들이 무슨 수로 잡으려는 거지? 미인계? 나도 안...

멋대로 흘러가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붙잡으며 셰릴은 거구의 사내에게 집중했다. 학구열에 불타는 순박한 인상과 달리 남자는 검술 실기에서 학년 3위의 실력을 지닌 뛰어난 인물이었다.

엘드미아가 제 몸만한 대검을 휘두른다는 소문은 사실 누군가 이 남자를 보고 오해해서 생긴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큰 덩치의 소유자인 탓에 그 순박한 인상을 다 잡아먹는다는 게 문제였지. 남들은 그가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위축되었으나 셰릴은 언제나 그래 왔듯이 태연하게 그를 마주했다.

자신은 검술 실기 학년 1위였으니까.

"헛소리 말고 나부터 이겨라."

그래도 되먹지 못한 소리나 떠들기위해 접근할 뿐인, 경쟁 상대조차 못되는 이들보다 백만배는 나은 인물이기에 특별히 대답해주자 사내는 또 덩치에 안 맞게 우물거리며 징그럽게 몸을 비틀었다. 덕분에 스스로 흑심을 품은 여학우들을 뭐라 여겼는지 알아차릴 틈도 없이 셰릴은 강한 불쾌감을 느껴야만 했다.

"아, 아니. 그래도 다양한 사람한테 배워야..."

검술로는 자기 못지않다는 소문이 자자하고, 딱히 틀린 말도 아닌 벨룽드 가문의 장남이라는 자가 어찌 이리 검을 들었을 때와 안 들었을 때가 다른 건지 원. 그래도 주장 자체는 딱히 하자가 없었기에 셰릴은 고개를 내저으며 확답했다.

"내가 엘드미아에게 배웠다."

"어?"

"내가 엘드미아에게 배웠다고 했다. 그런 나도 못 이기면 넌 엘드미아에게 배울 게 없다."

"어? 아니지. 엘드미아 경이 네 가문의 식솔로 들어간 건 2년 남짓한 시간이라며. 나도 그 정도는 들었다고."

벨룽드 자작가의 장남, 칼리츠 다 벨룽드는 '이건 몰랐지?'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이 곰탱이에게 그런 정보를 모을 재주따윈 없었으니 분명 추종자라고 하는 이들이 물어다가 떠먹여줬을 것이라 생각하며 셰릴은 한심한 눈초리를 감추지 않은 채 맞받아쳐줬다.

"넌 지금 아카데미에 입학한지 2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으니 교수님들을 스승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가?"

"...어라?"

순간 사고가 정지한 것처럼 반응하는 칼리츠는 정말 미련한 곰 같았다. 물론 곰은 원래 영리한 동물이라고 하지만... 별 수 있는가? 그 관용구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꼴인데. 이 정도면 곰이 칼리츠고 칼리츠가 곰인 수준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넌 기숙사에서 지내잖아?"

"그런데?"

"그럼 기껏 해봤자 엘드미아 경이랑 검을 나눈 건 입학 전 잠깐이랑 방학 때뿐이었다는 거잖아."

"그래서?"

"그... 그런데도 배웠다고 하는 건 좀... 어, 어폐가 있지 않나 싶은 거지..."

나름 머리를 굴렸지만 그래 봤자 곰이었기에 셰릴의 눈초리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배우고 다듬은 검술을 들고 가서 방학 내내 겨뤘음에도 단 한 번을 못 이겼다. 대신 매번 교정이나 받았지. 그 정도면 가르침이라 하기에 충분하지 않나?"

"...지, 진짜?"

"이런 자질구레한 일로 거짓을 입에 담을 만큼 오가토르프는 가볍지 않다."

결국 칼리츠는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시무룩해져서는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 하니 어디선가 추종자들이 나와 그를 보듬어 주기 시작했다. 근육 돼지라는 표현에 어울리는 십수명의 남정네들이 얼싸안는 모습은 심히 보기 껄끄러웠기에 셰릴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고개를 돌리자 분명 방금 전까지는 없었던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어서 순간 주먹을 날릴 뻔했다. 남자도 움찔거리는 셰릴의 어깨를 본 것인지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다가 이내 헤실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진짜야?"

날카롭게 생겼다고 해야 할까 얄팍하게 생겼다고 해야 할까. 검술과에서 보기 드문 장발을 적당히 묶어 옆으로 늘어뜨린 뱁새눈의 남자가 던진 질문에, 셰릴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불쾌하다는 듯 코를 찡그렸다.

"넌 또 언제부터 있었나."

"너랑 칼리츠랑 대화할 때부터. 그보다 진짜야? 네가 한 번도 못 이겼다는 거?"

"하아...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내가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할 거라 생각하는 거지?"

"네가 거짓말을 할 거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거지. 평민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수도에 올라온 지 겨우 2년 만에 엘드미아라는 친구의 검술이 오가토르프 가문의 비밀병기보다 뛰어나졌다는 말인데 누가 믿겠어?"

때릴까.

차라리 놀란 척하고 한 대 때리고 시작했으면 좋았을 거 같았는데 이미 뒤늦은 후회였다. 셰릴은 더 이상 발걸음을 지체할 생각이 없었기에 남자의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 대답했다.

"2년이 아니다. 엘드미아는 8살 때부터 검을 휘둘렀으니."

"에이,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렇게 따지면 나도 검을 휘두른 건 10살이라고."

그리고 11살부터 검을 휘두른 너에게 지고 있지.

검술 실기 2위인 그리윌스는 얇은 미소 안에 불만과 마지막 한마디를 꾹꾹 눌러 숨기며 셰릴과 걸음을 맞췄다. 학년 수석이라 할 수 있는 선남선녀가 같이 걸음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시선이 쏠리고 셰릴의 불쾌지수가 상승했지만 그리윌스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말을 이었다.

"빠르게 검을 쥐었다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지, 너는 몰라도 나는 알아. 8살? 애가 검에 대해 뭘 알고 뭘 이해하며 휘두르겠어."

"내가 모르고 너는 아는 것처럼 우리가 둘 다 모르는 것도 있는 법이지."

"...8살부터 검을 이해하고 휘두르는 아이 같은 거?"

"2위인 값은 하는군. 칼리츠보단 똑똑해."

사실임과 동시에 명백한 도발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말이었으나 셰릴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윌스의 웃는 낯 아래에 깔린 게 자신을 향한 적의라는 걸 모를 정도로 둔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적의에 호의로 보답할 생각 따위 없었고 그건 그리윌스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흐응, 1위답게 아는 게 많으셔서 좋으시겠어. 그럼 모자란 2위한테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는지도 좀 알려주실 수 있으시려나?"

"네 알 바 아니다."

"어차피 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 알게 될 텐데 그냥 말해주면 안 될까? 서로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역시 때릴까.

강렬한 충동이 느껴졌지만 셰릴은 일단 참았다. 그리윌스는 검술 실력은 좀 부족할지언정 입소문을 가지고 노는 일은 잘했다. 지금 이렇게 이목이 집중된 상태에서 냉랭한 상태를 유지한 채 걷고 있던 셰릴이 그리윌스를 때리면 되도 않는 치정싸움으로 연결지을 여학생들이 많았다.

"새로 부임한다는 마법학 교수님을 뵈러 간다."

"궁정 마법사이셨던 레그네바 님? 넌 마법 안 배우잖아."

셰릴은 대답하지 않았다. 엘드미아가 레그네바와 사제의 연을 맺을 것이라는 건 아직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녀는 엘드미아도 아카데미에 다니게 되는 것인지 물어보기 위해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하고 멈춘 그리윌스를 뒤로한 채 최대한 걸음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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