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요?"
오라고 해서 온 귀족원에서 레스롬 공작과 찻잔을 기울이다가 나온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참 쌩뚱맞다고 생각되는 내용이었다. 덕분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되물었으나 레스롬 공작은 언제나처럼 초연한 태도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렇다네. 위드라가 자네를 위해 공직까지 내려 두고 준비하고 있...다고 하기엔 그 친구 개인적인 사심도 많이 있으니 애매하겠구먼. 아무래도 평생에 걸친 염원이다 보니."
물론 거기서 내가 배울 게 아예 없진 않겠지. 제국 아카데미에서도 배울 게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아카데미는 이론을 통해 기술 발전에 이바지하게 만들던가, 실전을 안전하게 학습시켜 전장에서의 사망률을 낮추거나, 지휘관을 양성해 부대의 작전 수행 능력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다.
내겐 하나도 적용이 안 된다는 소리다. 차라리 가엔달 파티랑 의뢰 한탕을 더 뛰는 게 훨씬 이득이다.
"솔직히 각하와 레그네바 전 궁정 마법사님께서 그런 담화를 나눌 만큼 친분 넘치는 사이라는 것부터 걸고 넘어지고 싶지만 그 정도는 이제 그러려니 하겠습니다. 혹시 제가 아카데미에 입학해야 하는 겁니까?"
"입학하고 싶나?"
"전혀요."
풋풋한 학창 시절의 추억을 만들고 싶은 것도 아닌데 졸업하면 국가 노예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곳을 내가 왜 기어 들어가.
위드라 씨에게 이것저것 도움을 받고 배우게 될 입장이라고는 하지만 레스롬 공작의 말대로 그 역시 나에게 무상으로 교육을 제공하는 건 아닌 상황이니, 그걸 빌미 삼아 이제 와서 아카데미에 입학하라고 할 경우 아무래도 조율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쉽군. 뭐, 걱정 말게. 자네는 학생으로 입학하는 게 아니라네."
다행히 그런 의견 조율의 시간을 가질 필요는 없어 보였지만 아무래도 내가 아카데미에 가게 되는 것만큼은 기정 사실인가 보다.
"...'학생으로' 라는 건 결국 다른 무언가로 들어는 가야 한다는 말씀이잖습니까."
"너무 그렇게 지레짐작해서 질색하려 하지 말게. 자네는 그저 위드라의 제자일 뿐이니. 명목상으로는 조교 정도로 여겨지겠지."
위드라 씨가 남들은 원해도 못한다는 궁정 마법사의 지위를 내려놓은 건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인간이 마력을 사용한다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의 기밀성을 유지하며 안정적인 자본과 시설을 빠른 시간 안에 갖추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
연구 하나 때문에 그런 자리를 손쉽게 내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위드라 씨도 평범한 마법사는 아니라는 걸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분명 세네란과 죽이 잘 맞을 것이다.
처음 들었을 땐 한낱 아카데미보다 왕실의 지원이 더 빵빵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기밀 유지라는 점에서 납득하고 말았다. 왕실의 지원을 받아 연구를 하면 꾸준하게 경과를 보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타국으로 정보가 유출될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아카데미 교수의 비밀 연구보단 왕국 궁정 마법사의 비밀 연구라는 타이틀이 더 무게감 있는 법이니까.
이직의 과정이 너무 갑작스러워도 의심을 살 여지가 있으니 이런저런 절차를 준비하느라 이제서야 정리가 됐다는 이야기다.
"간단히 말해서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지. 주로 아랫사람들이 말이야."
"임시 구금소에 머물고 있을 때 제국 제1 황녀님이 방문하셨던 게 떠오르는군요."
"껄껄껄. 그 일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자네가 말 한마디만 덧붙였어도 부하들의 노고가 물거품이 됐을 텐데 말이야. 덕분에 수고했다는 의미로 성과급을 지급하는 데에도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네."
겨우 넌지시 이야기를 꺼낸 것만으로도 일사불란하게 가구를 옮기던 것을 묵인했던 내용이라는 걸 알고 바로 받아 내는 레스롬 공작은 과연 능구렁이 같은 영감님이었다. 하지만 유쾌함만큼은 진짜였는지 이제는 익숙해진 레스롬 공작의 차를 한 모금 마시는 동안 계속 웃어 보인 그는 뒤늦게 잦아드는 웃음소리와 함께 말을 이었다.
"그에 대한 마무리 절차로 아직 바쁘다 보니 이렇게 내가 핑계 삼아 자네를 불러낸 김에 설명해주기로 한걸세. 완전히 자유로울 것이다...라고는 하기 힘들겠지만, 솔직히 다른 조교나 제자들에 비하면 날로 먹는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는 되겠지."
"표현이 참으로 서민적이십니다."
"인간미가 넘치는 게지."
가끔은 이마저도 다 호감작을 위한 연기가 아닌가 두려워진다. 만약 그렇다면 굉장히 성공적인 연기라고 할 수 있을 거 같거든.
"그래도 한 달 정도는 좀 바쁠 거라네. 아무리 위드라가 사적인 목적을 위해 아카데미의 품으로 들어갔다고 해도 할 일은 해야 하니까. 그 친구에게야 전혀 어려울 게 없겠지만 그 과정이 물리적으로 바쁜 건 사실이야."
"겨울방학을 겨우 한 달 정도 남겨두고 움직이니 그럴 거 같긴 합니다만..."
"정확하네. 이런 사례가 아예 없지는 않다 보니 여러모로 바쁘지. 그가 내년에 제대로 수업을 개설하기 위해서는 겨울방학 동안 계절학기와 비슷한 개념으로 사전 수업을 개설해야 하는 의무가 있어."
아무리 궁정 마법사라고 하더라도 교수로서의 능력은 시험한다는 것일까. 마인드만큼은 참으로 훌륭하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커리큘럼을 비롯해 장기적인 방침과 수업 목표를 알리는 용도에 가깝다고 한다. 자진해서 듣는 학생도 있고, 수강 인원이 애매할 경우 아카데미에서 이런저런 혜택을 기반으로 살살 꼬드겨서 일종의 평가단을 꾸려 집어넣기도 하는 모양이다.
"물론 위드라의 명성을 생각하면 수강 인원이 부족하진 않지. 그래도 이제 제자가 될 텐데 스승의 업무를 어느 정도 도와야 하지 않겠나?"
"그거야... 그렇죠."
세네란처럼 단순 협력 관계면 모를까 사제의 연을 맺기로 한 이상 나도 할 수 있는 도리는 다 할 생각이다. 내가 인성이 빻은 것도 아닌지라 그 옛날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열심히인 사람에게 모질게 대하기 힘든 것도 있고.
"그나저나 마력이라, 자넨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군."
"그거까지 말씀하신 겁니까?"
"딱히 콕 짚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평생 들어온 게 있는데 당연한 거 아니겠나."
하긴 이야기를 들어 보면 굉장히 막역한 사이인 거 같은데 당연한 귀결이겠지. 안정적인 직장을 내팽개치고 제자 하나 붙잡아서 연구를 시작하겠다고 했으면 돌대가리가 아닌 이상 눈치를 채는 게 정상일 것이다.
"어디 가서 말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게. 자네를 제자로 받게 된 과정도 나름 자연스럽게 각본을 짜놓았으니 쉬이 들키지도 않을 거야."
껄껄 웃으며 말하는 레스롬 공작과 달리 난 괜히 불편해져서 차만 홀짝였다.
◈
그렇게 레스롬 공작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와 성광십자회의 문서들을 읽으며 난로가의 불을 지피기를 이틀 정도 반복했을 무렵이 되어서야 나는 왕립 아카데미로 향하게 되었다.
다른 건 다 모르겠는데 출퇴근이 더럽게 불편할 거 같더라. 귀족 거주 지구에서는 말 타고 10여분 정도만 느긋하게 가도 아카데미가 있는 학원 지구로 넘어갈 수 있다고 셰릴이 그랬던 것을 기억하는데, 모험가 지구에서는 중간중간 속도를 낼 기회가 있었음에도 30여분이 넘게 걸렸다. 그나마 엔글렘에서 받은 말을 에카프 경이 집들이 선물처럼 쥐어 줘서 망정이지 이거 없었으면 골머리 좀 썩었을 게 분명하다.
"허어, 왕국 아카데미도 좀 치네."
실상 수도에 지내면서 나와 가장 연이 없던 구역을 꼽으라고 했을 때 아무런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학원 지구는 나와 아무런 연이 없었다. 전생에서 규모 좀 있다고 하는 대학 부지만큼 넓은 구역에 온갖 편의 시설이 다닥다닥 붙어 상권을 이루고 있는 학원 지구는 대충 봐서는 모험가 지구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활성화가 되어 있다.
저 멀리서 유독 우뚝 서 있는 아카데미 건물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덕분에 초행길임에도 미아가 되는 일 없이 무사히 아카데미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 뒤로 경비와 학생들에게 길을 물어가며 마법동 교수실에 위치한 위드라 씨의 방에 도착하자 한창 분주히 방을 정리하던 그가 반갑게 나를 맞이해주었다.
"당당하게 일주일이 걸리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치고는 꽤 시간이 걸렸다만... 중간에 이야기를 하려해도 네가 퍽 바쁘게 움직이는 터라 시간이 맞지 않더구나."
"그러게요. 저도 이렇게 밖으로 나돌아다니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악마랑 엔글렘의 비리에 엮여 시간을 지체하게 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보상이 만족스러워서 웃어넘길 수 있는 거지 시간만 날렸으면 속이 쓰라려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것이다. 내 진심 어린 대답에 위드라 씨는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웃음을 드리우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하하하, 나 역시 마찬가지였던 거 같구나. 하지만 이는 마법사의 관점에서는 좋은 징조라 할 수 있지. 항상 계획대로 흘러간다는 것은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뜻이니까."
"그간 마법사와 깊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어서 그런가 처음 듣는 격언인데요."
심지어 아실리에조차 한 번도 말한 적 없었던 이야기다.
"아무리 강대한 힘을 지니더라도 자신이 필멸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하라는 오래된 격언 같은 것이지. 그래서 큰일을 치를 때 계획에 미세한 차질이 생기면 길조로 여기는 미신 같은 거야."
아무래도 단명종 한정의 격언같은 거였나보군. 그나저나 거짓말을 멀리할 뿐만 아니라 겸손한 자세까지 겸비하다니.
내가 소설에서 읽었던 대다수의 마법사들은 힘에 취해 하나같이 좆간 네버 체인지를 몸소 외치던데 벌써부터 스승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두터워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