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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59화 (259/412)

"미리 말하는데 내가 아카데미에 가게 된다는 걸 안 게 바로 이틀 전 일이다. 심통 멈춰!"

집에 돌아오자마자 셰릴이 있는 건 확인도 안 하고 일단 외치고 본 말은 다행스럽게도 공허한 헛소리로 끝나지 않았다.

셰릴에게 안겨 있다가 나에게로 달려오는 라이카를 쓰다듬어 주고 고개를 들자 앉아서 아실리에와 대화를 나누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린 셰릴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스승님한테 이야기 듣자마자 감이 왔지. 내가 폼으로 네 전속집사였겠니?"

2년 가까이 전속 집사로 일해놓고 성격을 몰라 허둥댈 수 있다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의 능력일 것이다. 무능력. 초기에 낙하산 인사 취급하던 일부 사용인들 입에 지퍼달게 만든 이몸과는 거리가 먼 능력이지.

"안 그래도 나중에 한 번 초대하려 했는데 네 성미 덕에 수고를 덜었네. 어때? 좋은 집 아니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어허. 귀족의 감성이 아니라 모험가의 감성으로 봐야지."

"그런 이야기가 아닌 거 알잖아."

"엥?"

당당하게 집을 둘러보며 말하다가 의외의 대답에 셰릴을 내려다 보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왜 내가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는 듯이 반응하는데 난 모르겠지?

"네가... 한 일들이, 아무리 널 위한 것이었다해도 겨우 이런 보상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어."

"...아."

그렇구나. 얘는 귀족원과 왕실의 은밀한 비밀 친구 관계를 모르지.

난 그제서야 셰릴의 눈에 담긴 억울함과 울분 비스무리한 것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꼴에 2년간 동거동락하며 붙은 정이 있다고 당사자보다 자기가 더 분해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오는군.

"아이고 기특해라. 그래서 막 그렇게 억울해서 울려고 하고 있었어?"

"그런 적 없다."

껄껄 웃으며 간만에 롱캣 셰릴을 시연해주자 급정색하는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손길을 거부하기 위해 바둥거리지는 않는 게 또 묘미다. 마치 툴툴대면서도 말은 잘 들어 주는 환상 속의 여동생을 보는 기분이다. 그러고 있는 사이 옆으로 다가온 아실리에가 웃으며 대화에 합류했다.

"처음에 왔을 때 진짜 세상 무너지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깜짝 놀랐지 뭐야."

"그, 그런 적 없습니다."

"넌 진짜 거짓말은 못해. 말 버벅이는 거 봐라. 기왕 왔으니 식사나 하고 가."

"그러네. 어차피 오늘은 수업이 없어서 시간도 빈다고 했었지?"

저택에 묵을 때에는 좀 거리감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없는 사이 대화를 좀 나눈 탓인지는 몰라도 꽤 자연스럽게 권유하는 아실리에였다. 셰릴도 어중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안을 받아들이는 걸 보니 딱히 일방적인 것도 아닌 듯싶다. 하지만 겨우 그런 거로 계속 품고 있던 불만이 사라질 정도로 단순한 애는 아닌지라 다시 내려주며 한 차례 머리를 헝클어뜨려 준 뒤에도 셰릴은 여전히 할 말이 많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왜 또."

"...귀족이 될 수도 있었어."

"하이고."

뭔가 잔뜩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우물거리던 셰릴이 힘겹게 말을 꺼낸 게 결국은 같은 이야기라는 게 웃겨서 난 외투를 벗으며 그녀가 잊고 있는 사실을 상기시켜줬다.

"그런 거에 내가 연연했으면 이미 제국 귀족이었겠지?"

"...으으음."

뭔가 납득하면서도 영 납득하고 싶지 않아 하는 분위기다. 얘도 왕녀처럼 내가 애국심으로 이 나라에 남아 있는 거라 믿고 싶은 건 아닐 텐데 말이지.

"그리고 받은 건 집뿐만이 아니야. 왕실에서 보증한 레미엘스카 은행 계좌에 아쉽지 않게 돈까지 넣어줬고, 며칠 전에 있었던 사건은 귀족원에서 적당히 도와줘서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일을 마무리 지었지. 덤으로 써먹을 일 없을 훈장까지 받았으니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만족스러워."

폴짝 폴짝 뛰어오르며 안아 달라고 극성을 부리는 라이카를 들어 올리며 말을 마친 뒤에 돌아본 셰릴은 여전히 뭔가 아쉬워하는 듯하면서도 어느 정도 납득은 한 눈치였다. 물론 지금 그녀의 입장에서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는 불 보듯 뻔하다.

"귀족들 손익 싸움에 내 공이 축소된 게 그리도 거슬리냐?"

"당연...하지."

다른 귀족이었다면 자신의 위신을 생각해서 기분 나빠할 수 있는 상황이긴 하다. 휘하 기사의 충절과 명성이 귀족의 명예를 드높이는 세상이니까. 하지만 이 당돌한 천재 아가씨는 제 위신은 스스로 챙긴다는 발상의 소유자라서 지금 이러고 있는 이유는 순전히 나 때문이다.

"간단히 생각해. 나 엘드미아 에가야. 장난질 치면 칼부터 나가는 미친놈이 가만히 있으면 이유가 있는 거 아니겠어?"

그 모습을 보면서도 무조건 진실을 숨기고 계속 신경 쓰게 만들기도 미안해서 넌지시 떡밥을 던져 주자, 잠깐 멍 때리던 셰릴은 또 급정색을 하다가 내 팔뚝에 주먹을 날렸다.

"아니, 그걸 미리 말해줬으면 되는 거잖아."

"악! 그걸 말로 해 줘야 알아? 넋 놓고 있다가 근본을 까먹을 네 탓이지?"

괘씸한 년. 이럴 땐 차라리 이해력이 떨어지거나 날 잘 모르는 편이 나았을 텐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기에 난 아실리에의 식사 준비를 돕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열심히 등짝을 맞아야 했다.

결국 셰릴의 폭력아닌 폭력은 그녀의 품에 라이카를 떠맡기고 두 팔을 걷어붇여 요리를 시작한 뒤에야 멈췄다. 그래도 명색에 새집에서 처음 맞이하는 손님이니 집들이하는 기분으로 지하 저장고에서 손질된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들고 왔더니 꽤 배가 고팠는지 눈을 떼지 못한다. 겨우 닭 한 마리를 전사 셋 중 누구 코에 붙이겠냐마는, 여기 닭은 뭔가 마수화가 되어 있는 건지 몰라도 거의 크기가 칠면조 만해서 메인디쉬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원래대로라면 조리 시간이 좀 걸리는 문제도 아실리에가 정령술 조금 사용하면 반절로 줄어드니 부족함이 없지.

거의 6인분 같은 한상차림이었지만 그 누구도 많다고 주춤거리지 않는 게 참으로 전사의 식탁스럽다. 그렇게 30분 만에 차려진 음식에 눈으로 만족할 틈도 없이 우리는 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나 내일부터 조교로 출근이라더라."

"마법을 못 쓰는 마법 조교라니 그건 좀 웃기지 않나?"

"어허, 마법을 못 쓴다니. 불씨 정도는 붙인다고."

"그거 성냥불 보다 좀 나은 수준이잖아."

"씁. 성냥불 보다는 많이 낫지 무슨 소리야."

의식하기 전에는 꺼질 위험도 없어 다 타들어갈까 봐 서두를 필요도 없어. 어딜 봐도 완벽한 상위호환인데 평가가 너무 박하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셰릴의 말처럼 마법학 교수의 조교로는 맥빠지는 수준이긴 하지. 나는 닭 다리 두 개를 찢어 하나는 아실리에, 하나는 셰릴에게 주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스승님 말씀으로는 딱히 할 건 없을 거라고 하시더라. 실제로 한동안은 실무보다는 잡일을 돕게 되겠지."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대체 왜 레그네바 전 궁정 마법사님이 널 제자로 삼으려고 하신 거야?"

귀족 셰릴이 아닌 탓인지 그냥 그게 편한 것인지 몰라도 닭다리를 맨손으로 들고 잘 뜯어먹던 셰릴이 던진 질문에 난 잠깐 손을 멈춰야만 했다. 생각해 보니 얘한테도 설명을 안 했네.

"그으으게에에... 설명을 하려면 조오오금..."

"네가 마력을 쓰는 거랑 연관이 있는거야?"

아니, 그걸 뭔 수로 알아냈냐 넌?

순간 빠르게 아실리에에게 시선을 옮겨보았지만 행복한 표정으로 닭다리를 뜯던 아실리에조차 내 시선에 당황하며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아실리에가 말한 게 아니라고? 나도 말한 기억이 없는데?

"뭘 그렇게 눈치를 봐. 오러도 잘 안 느껴지는데 마법도 어중간해, 그렇다고 정령술에 특화된 것도 아니야, 그런데 용사도 이기고 마족도 이기고 엔벨데와 휘하의 기사들을 썰어넘겼으면 네가 인간이 아닌 거 외엔 마족처럼 마력을 쓴다는 게 더 말이 되지 않을까?"

"...내가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지 않냐?"

"생판 남이었다면야 가능성은 그쪽이 더 높겠지만 우리가 남은 아니잖아."

그렇지. 그러기엔 많은 시간을 보냈지. 아무래도 나는 내가 셰릴을 이해하는만큼 쟤도 적잖이 날 이해하고 있다는 걸 간과한 모양이다.

그래도 보통 거기까지 생각을 하나? 현대로 따지자면 마술사 중에 한 명이 진짜 마법사였다는 수준의 비약인데? 이번엔 내가 쉬이 납득하지 못하고 여전히 손을 못 움직이고 있자 셰릴이 도끼눈을 뜨며 말을 이었다.

"네 검과 동작을 얼마나 오래 봐 왔다고 생각하는 거냐. 나는 셰릴 츠신 오가토르프다. 널 못 이겼을지언정 천재라고."

부끄러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덤덤하게 사실을 말한다는 태도로 저런 소리를 입에 담는다니 진짜 개쩌는 자신감이라 할 수 있겠다. 간만에 마주한 자신감에 벙쪄있는 동안 잠깐 눈동자를 굴리던 아실리에가 끼어들어 화제를 전환했다.

"엘디를 한 번도 못 이겼어?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엘디에게 가르쳐 준 엘프들의 검술은 정말 별거 없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는데?"

어찌 보면 도발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법한 말이었지만 셰릴은 아무렇지도 않게 닭다리를 뜯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술은 그랬죠. 하지만 엘드미아는 검술보다 검을 휘두르는 것 자체에 엄청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아카데미에서 가장 열심히 검을 휘두른다는 곰탱이조차 엘드미아보다는 덜 휘둘렀겠죠."

"그걸 알 수 있어?"

"너무 뚜렷해서 모를 수 없을 정도죠. 앞으로 2년 정도 더 단련하면 기술로 어떻게든 이겨볼 여지가 생기겠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지금의 엘드미아죠. 계속 단련을 하면 검술로만 이기는 건 빨라야 4년 입니다."

"그게... 견적이 나온다고?"

맨날 천재다 천재다 생각만 했지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걸 들어 본 건 처음인지라 굉장히 낯설기 그지없어서 나도 모르게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셰릴이 옅은 미소와 함께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래서 네가 평범한 거고 내가 천재인 거야. 그 간극을 훈련량으로 압도하고 있는 네가 이상한 거고. 그 이상함 덕에 스스로의 게으름과 부족함을 깨달았으니 나야 좋았지만."

좀... 미친놈처럼 휘두르기는 했지. 온갖 방향으로 완벽하게 검 휘두르는 연습을 뻔질나게 했으니까.

당시엔 그래도 이게 정말 의미가 있는 것인가 고민 많이 했었는데 이렇게 인정받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은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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