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를 마친 뒤 잠깐 담소를 나누는 것을 마지막으로 셰릴은 깔끔하게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귀족원의 입김때문에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불만도 어느 정도 사라졌고, 아카데미에 오게 되었음에도 아무 말 없었다는 점은 나도 몰랐다로 끝나버렸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떠나기 전 벽난로 옆에 잔뜩 쌓여 있는 성광십자회의 인장이 찍힌 문서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별다른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그 문서들이 뭘 의미하는지 눈치채서인지,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럼 내일 보도록 하지.”
“...너 말도 없이 온 거냐?”
마구간에 못 보던 말도 없길래 당연히 마차를 타고 온 뒤 근처 어딘가에서 기다리게 했겠거니 했었는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걸어서 돌아가려는 셰릴의 반응에 어이가 없어 질문했더니 여전히 덤덤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굉장한 대답이 돌아왔다.
“달려왔어. 아카데미에서 말을 대여 하려면 절차가 귀찮거든.”
“아니, 너 지난번에 라그니스 땐 잘만 타고 왔잖아.”
“강제로 타고 온 거였어. 안 그래도 그 일로 경고를 받아서 두 번은 눈치가 보여.”
강제로 아카데미의 말을 뺏어 타고 달려 왔었다는 사실보다 그런 행동을 취하면서도 결국 눈치는 본다는 점이 더 신기하다는 게 우스웠지만 어쨌든 본인이 아무렇지도 않다니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그렇게 셰릴을 배웅하고 돌아와 뒷정리 중인 아실리에를 도우며 설거지를 하고 있었더니 식탁 정리를 마친 아실리에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참 신기해. 엘디가 오기 전까지 잠깐 대화를 나눴는데 어쩜 저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더라.”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데.”
“본인만 모르는 거야. 말만 곱게 할 뿐이지 발상이나 행동 원리가 진짜 비슷하다니까?”
“제 풍부한 감성과 어휘는 셰릴과는 격이 다릅니다만.”
“귀족의 격식에 철저하고 감정을 절제할 필요성이 있다 보니 그게 몸에 배어 있어서 그러는 거지. 사실 전속 집사였던 엘디가 가장 잘 알지 않아?”
넌지시 웃으며 자문자답을 요구하는 아실리에의 교묘한 화술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긍정인 상황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발악이다.
알지. 괜히 동생처럼 느껴지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원래 팩트라는 건 면전에 들이밀면 대부분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법이다. 심지어 난 속세에 찌든 전생과 부당한 죽음을 거친 결과인데 쟨 그런 것도 아닌 순수한 15살이니 더 괘씸한 거고. 이건 아직은 말할 수 없는 비밀이기에 난 적당히 말을 돌리며 정리를 마치고 다시 난로가에 앉아 문서들을 읽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이제 아카데미로 출근하는 거 아니니? 입고 갈 옷은 괜찮은 거야?”
“아, 맞다. 안 그래도 귀족원에 들렸을 때 이야기가 나왔었어. 내일 아침에 그쪽에서 알려 준 의류점에 들려서 받아가면 돼.”
자연스럽게 다가와 묵직한 몸뚱이를 내 허벅지 위에 올리는 라이카를 쓰다듬으며 수년에 걸쳐 성전사들 사이에서 일어난 변화를 정리한 문서를 보고 있는 사이, 맞은 편으로 다가와 앉으며 아실리에가 던진 질문에 슬쩍 지나갔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주소도 대충 받았는데 아마 외투 주머니에 있던가?
레스롬 공작의 선물인 건 둘째치고 대체 무슨 수로 내 치수를 알아낸 것인지 물어 봤더니 임시 구금소의 유능한 메이드 메시엘라 씨가 그쪽 사람이더라. 그렇다고 스파이처럼 심어놓은 건 아니고 모종의 이유가 있어서 자진해서 구금소에서 일을 한다는데, 유능하고 과묵한 메이드 씨는 뭔가 사연이 많은 듯하다.
딱히 그녀에게 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안락한 생활을 영위했으니 대수롭지 않게 넘긴 이야기였다. 적당히 식후 잡담같은 느낌으로 이야기하자 아실리에가 고개를 고개를 내저으며 작게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15살 애가 겪을 일과 만날 사람들이 아니야."
"흐. 그러게."
너무나도 맞는 말이라 이번엔 나도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점점 추위가 거세지며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게 참으로 곤욕스러워졌지만 하필 또 반드시 나가야만 하는 날인 탓에 꾸역꾸역 침대에서 기어 나온 나는, 자고 있는 아실리에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준비해서 끼니를 때웠다.
[주인. 오늘도 나가?]
"이제는 거의 매일매일 나가야 하지."
[라이카도 같이 가?]
"어. 너도 같이 가."
세네란과 협력해 얘 상태를 구체적으로 알기 전까지 어지간하면 두고 다니고 싶지 않기도 하고, 얘가 진짜 웰시코기인지 유사 웰시코기인지 뭔지 정확하지는 않아도 집에 박혀 있는 것보단 산책 겸 데리고 다니는 게 여러모로 이로울 거 같아 내린 결정에 라이카는 세상 좋아하며 격하게 꼬리를 흔들기 시작한다.
정말 보면 볼 수록 어이가 없네. 대체 어떻게 이런 녀석을 마검의 재료로 써먹을 생각을 했던 것일까. 고대의 마검 제작자들은 죄다 공감 능력이 결여된 사이코패스들만 있었던 게 분명하다.
어지간한 수도의 가게들은 이제 겨우 문을 열었을 정도로 조금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수선을 해야 할 수도 있으니 일찍 출발하는 게 낫겠지. 나는 마지막 샌드위치를 우유 한 모금과 함께 넘긴 뒤 외출 준비를 마치자마자 라이카와 함께 집을 나섰다.
동시에 격하게 나를 반겨주는 추위에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사람은 적응하는 생물이라고 하지만 이 염병할 추위는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영 적응이 안 된다. 물론 여기 추위가 한국보다는 혹독하고 내 몸이 그때보다 월등히 단련되었음에도 이리 춥다는 점에서 비교하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는 상태지만 욕 나오도록 추운 걸 어쩌겠어. 그렇다고 신을 욕할 수는 없으니 추위를 욕해야지.
딱히 긴박한 상황도 아니고, 대처가 불가능한 상황도 아닌데 정령님을 휴대용 손난로처럼 썼다간 무슨 쓴소리를 듣게 될지 몰라 아득바득 옷만으로 추위를 이겨내며 약도를 따라 도착한 의류점은 드워프 지구에 위치해 있었다. 레스롬 공작이 준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어렴풋이 이럴 거 같은 조짐이 느껴지긴 했지만 참으로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이세계에서 대부분의 명품들은 드워프 제이고, 그건 의류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마법과 연동해서 여러 기능을 추가하다 보니 귀족에겐 편의성과 멋을 다 챙길 수 있는 사치품이고 모험가에겐 많은 돈을 벌게 되면 하나 쯤은 장만하고 싶어지는 생명줄같은 물건인 것이다. 대부분의 상품들이 '이게 왜 이렇게 비싼 거지?' 가 아니라 '아, 이래서 비싸구나.'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수준이니 참된 명품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급이 맞아야 그냥 명품이다 하는 거고. 한낱 청급 모험가가 입고 다니면 여러모로 비웃음만...
"아, 그렇구만."
혼자서 생각하던 도중 뒤늦은 깨달음을 얹은 나는 한숨을 내쉰 뒤 군말 없이 가게로 들어갔다. 굳이 따지면 전 궁정 마법사였던 아카데미 교수의 제자가 되는 거니까 일종의 품위 유지는 필요하다. 그렇다면 곱게 받아야지.
그렇게 들어선 의류점은 나무 냄새 물씬 풍기는 가구들과 잘 정돈된 많은 옷감들 그리고 별로 많지 않은 마네킹과 의상들이 차분하게 자리잡고 있는, 굉장히 고풍스러운 디자인으로 사람을 압박해왔다. 어지간한 무구점보다 더 시선을 끄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홀로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던 나이 지긋한 드워프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음? 이른 아침부터 왔구만."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잘 알지. 예약 손님."
요새 나도 모르게 벙찔 일이 많아지는 기분이다. 지금 저 어르신이 한 말이 내가 오늘 있는 유일한 손님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인 건가?
신문과 커피를 정갈하게 테이블에 올려 둔 드워프 노인은 느긋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더니 고개를 기웃거리며 슬쩍 훑어보고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흠, 치수 잰 사람이 아주 정확하게 쟀구만. 손볼 필요가 없겠어."
발쿤 씨도 눈대중으로 내가 쓰던 무기를 알아맞출 정도의 장인이었으니 저 정도는 새삼 놀랍지도 않다. 나는 몸속의 유교 드래곤이 시키는대로 노인에게 인사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어르신. 엘드미아 에가라고 합니다."
"허, 예의 바르군. 귀족 태생으로 보이진 않는데?"
"어쩌다보니 이곳에 오게 됐지만 일개 모험가에 불과합니다."
대충 봐도 발쿤 씨와 같은 장인의 스멜이 느껴지는 노인은 풍성한 흰 수염 너머로도 느낄 수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곳은 어쩌다 보니 옷을 맞출 수 있는 곳이 아닌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덕분에 어안이 벙벙하네요."
가감 없이 진솔한 심정을 입에 담았지만 어째서인지 노인은 유쾌한 듯 웃어 보일 뿐이었다.
"재밌는 인간 친구로군. 어떤 옷인지는 알고 왔나?"
"사실 전혀 모르고 왔습니다. 그저... 스승님을 따라 아카데미에 조교로 들어갈 때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옷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껄껄껄. 맞아.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되는 옷이지. 알만큼 알고 왔구만."
부끄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시선을 모을 수준의 옷들이 즐비한 장소와 자신이 풍기고 있는 분위기하고는 전혀 매치가 안 되는 말을 하며 긴 장대를 들어 벽에 걸려 있던 옷 하나를 꺼낸 노인이 정말 대수롭지 않은 물건이라는 듯이 내게 툭 하고 넘겨줬다.
"마법사라는 족속은 입는 게 좀 고만고만해서 알게 모르게 보는 이로 하여금 고정관념을 가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지. 덕분에 케이프 하나만 걸쳐도 마법사같아 보여. 그래서 옷은 그냥 자네에게 맞게 활동하기 편한 형태로 만들었네. 그렇다고 해서 외투랑 케이프가 거슬리진 않을 거야. 들어가서 입어봐. 구두는 안에 넣어 두었으니 갈아 신고."
장대로 스윽하고 탈의실을 가리키는 동작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괜히 위축된 나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탈의실로 향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뒤에서 기다리는 라이카에게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괜히 입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지는 터라 옷을 갈아입는데 조금 시간이 걸려 버렸지만 나는 옷가지를 하나하나 걸칠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맞춤 의상이라는 걸 한평생 입어본 적 없어서 비교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정말 딱 맞는 옷이었다. 잡아줘야할 곳은 잡아주고 여유를 줘야할 부분은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알맞게 여유롭다. 착용감 뿐만 아니라 디자인도 마음에 든다. 노인이 구두라고 부른 건 구두가 아니라 전투화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비주얼을 지니고 있었으나 절묘하게 정장 바지에 가려져 대충 보면 그냥 구두같아 보였고, 상의와 케이프도 화려한 장식 같은 건 최소한으로 달려 있어서 확실히 장식용이라는 느낌보단 실용성에 더 중점을 뒀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케이프는 좀 어떤가? 검을 뽑거나 할 때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만들긴 했는데."
"아주 편합니다. 근데 제가 전사인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수령인이 자네 이름으로 되어 있었거든. 자네 유명인인 거 모르나?"
맨날 시비터는 인간들만 만나다 보니 이런 형태로 내 유명세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게 매우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 잘 모르는 사람들만 만나서..."
덕분에 괜히 우물쭈물 대답했는데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여전히 대수롭지 않다는 어조로 대수롭지 않지 않은 말을 입에 담았다.
"그거 큰일이군. 아카데미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옘병.
제국에서 보였던 행동까지 소문나진 않았겠지? 나 동화 속 기사님 흉내 금지 먹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