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 아카데미는 평소와 달리 아침부터 떠들썩했다. 대부분의 아카데미 교직원들은 다가오는 겨울방학이 또 학생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으나 진실은 조금 달랐다.
기숙사에서 떨어져 등하교를 해야 했던 여학생 하나가 이른 아침에 졸린 몸을 이끌고 아카데미로 향하던 도중 봐버린 것이다.
드워프 침선장針線匠 굴라의 가게에서 걸어나오는, 식견이 있다면 단번에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굴라의 의상을 두른 청년을.
밤하늘을 연상케 하는 남보랏빛 케이프를 두른 채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나오는 모습까지는 대수로울 게 없었으나 문제는 요즘 아카데미에서 한창 돌고 있는 소문과 청년이 매우 많이 부합한다는 점이었다.
청년의 훤칠한 키와 케이프 위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떡 벌어진 어깨, 그 발치에서 귀여운 얼굴로 헥헥 거리고 있는 다리 짧은 한 마리의 개까지 확인한 여학생은 잠이 확 깨는 것을 느끼며 청년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열성적인 달리기 끝에 아카데미에 도착하자마자 학우들에게 외친 것이다.
"나 방금 등교하다가 진짜 엘드미아 에가를 본 거 같아!!"
"이번엔 또 무슨 이상한 걸 봤길래 아침부터 난리야?"
여학생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최근 몇 주간 그녀가 들고 온 허위 정보를 생각하면 학우들의 반응은 지극히 타당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이번만큼은 육하원칙에 근거하여 자신이 본 청년을 자세하게 묘사하게 된 여학생은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친구들에게 배신감을 느꼈으나, 정작 친구들은 아무도 그녀의 배신감에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다.
대신 이번엔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정도는 열어뒀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점심 무렵에 확신으로 바뀌게 되었다.
"맞을걸. 오늘 있을 레그네바 교수님의 수업에 참가한다고 했으니."
엘드미아와 가장 많은 접점을 가지고 있는 셰릴 츠신 오가토르프의 발언을 통해 말이다.
처음엔 여학생이 본 청년이 엘드미아가 맞는지만 확인하려 했던 학생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정보가 담긴 그녀의 대답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식당을 뒤집어 놓기 시작했고 그런 분위기를 사전에 미리 읽지 못했던 셰릴은 미간을 찡그리며 자신이 실수했음을 뒤늦게 눈치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은 그녀를 향한 질문 공세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엘드미아가 아카데미에 들어왔대!"
식당의 문을 박차며 들어온 누군가의 외침에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셰릴은 마른 세수를 한 번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의 대이동으로 2학년 대부분이 빠져나갔을 뿐만 아니라 곰탱이 칼리츠와 그리윌스도 보이지 않는다는 게 심히 마음에 걸렸으나, 어떠한 형태로는 난장판이 될 게 뻔한 곳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결국 셰릴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생각들을 정리하여 짧게 입에 담았다.
"뭐, 본인 업보니까."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를 이어 나가려다가, 기어이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
이름도 모르는 드워프 노인의 옷 가게를 나온 나는 집으로 돌아와 이제 막 커피를 마시며 정신을 차리고 있던 아실리에의 앞에서 한 차례 새 옷을 뽐내고는 점심 식사 후 아카데미로 향했다.
"진짜 이번엔 기사 흉내 내면 안 된다?"
"그럼 그냥 평소처럼 행동해?"
"으으음... 그건 좀 위험할지도. 그냥 과묵하고 쌀쌀맞은 척해!"
연거푸 주의를 주는 아실리에를 뒤로한 채 말이지.
검과 바늘을 허리에 차고 평소 허리에 두르고 다니던 파우치에 들어 있는 구급약들을 꺼내 케이프 안 주머니에 옮겨담았음에도 어디 늘어지거나 흉해 보이는 구석 하나 없는 의복까지 확인을 마친 뒤 집을 벗어났을 땐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어 유동 인구가 꽤 많이 늘어난 상태였다.
비싼 옷 때문일까. 평소보다 나에게 쏠리는 이목이 더 늘어난 것 같다. 명품 브랜드처럼 어디 대놓고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징표 같은 게 달려 있는 것도 아닌데 평소에 내 얼굴을 보고 수군거리던 사람들 외에도 내가 입고 있는 옷에 집중하는 이들이 확실히 많아졌다.
차라리 내 말안장 앞에 위풍당당하게 타고 있는 라이카를 바라봐라. 뭔 옷에 저리들 관심이 많을까.
명백하게 좋은 옷이니 아는 사람들은 눈이 갈 수밖에 없기야 하겠지만 당사자는 참 불편할 따름이다. 그나마 길이 막히지 않아 쑥쑥 나아가 어제보다 빠르게 아카데미에 도착할 수 있었고,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라이카와 함께 말에서 내렸다.
"근데 아카데미엔 경비도 없나? 어제도 그렇고 외부인이 이렇게 아무렇게나 막 들어와도 되는 건가 싶은데."
임시로 말을 둘 수 있는 마구간만 덜렁 있는 정문은 이틀에 걸쳐 아무리 둘러봐도 경비병이 있을 만한 여분의 공간이 없었다. 어제야 그냥 교수실까지 말을 타고 쭉 들어갔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막상 말을 두고 가려니 이게 말이 되나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제처럼 또 타고 가자니 거긴 말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단 말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스승님한테 좀 물어볼 걸. 생각이 짧았다.
"에이, 뭐 방범 마법이라도 깔아놨겠지."
명색에 왕국 아카데미인데 아무 이유 없이 허술할 리가.
혹시라도 나중에 말이 사라지면 한바탕 뒤엎어 버리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손님용 마구간임이 분명한 공간에 말을 묶어둔 나는 신나게 뛰어다니는 라이카를 뒤에 붙인 채 교수실이 있던 건물로 향했다.
그리고 또다시 늘어나는 주변의 시선 속에서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무슨 감시카메라라도 달아 놓은 건가."
명백히 내가 왔다는 걸 인지하고 구경하기 위해 온 움직임을 보이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 하니 메르델라가 썼던 감시 마법인지 추적 마법인지가 떠올라서 마력시를 활성화 시키자 아카데미 하늘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마법 구체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저래서 경비가 없는 거구나 싶을 만큼 거대한 구체였다. 저걸로 방문자를 감시하던 누군가가 이야기를 퍼트린 게 분명했다.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하며 무신경한 척 갈 길을 갈 수 있었으나 어째 구경꾼들이 늘어나는 속도가 내 예상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몰래 소근 거리며 보던 애들이 아예 웅성거림을 만들며 대놓고 구경하는 수준으로 바뀌었다고...
모르는 척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지경인데 교수실 도착은 아직도 먼 상황. 아예 대놓고 주변을 둘러보며 시선을 뿌려 봐도 학생들은 물러서기는커녕 호기심에 불을 붙이기 바쁘다.
"하아... 예의가 없군."
결국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아실리에의 조언에 따라 차갑게 쏘아붙이기로 했다.
"우리에 갇힌 짐승 구경하듯 바라보는 건 불쾌하니, 볼일이 없다면 다들 비키는 게 어떨까."
작게 말하는 것까지 들릴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기에 일부러 조금 크게 말했다. 제발 귀중한 점심시간을 헛짓거리로 날려 먹지 말고 가서 마저 쉬거나 먹던 점심이나 마저 먹길 바랐지만 어째서인지 웅성거림은 더욱 커져갔다.
그렇게 웅성거리는 학생들 사이에서 마치 내 말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덩치 큰 남학생 하나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혹시 엘드미아 에가 경이십니까?"
뭘까 이 곰탱이는.
나랑 눈높이가 얼추 비슷할 뿐만 아니라 뭔가 앞뒤로 근육이 두 배는 더 붙어 있어 보이는 근육 돼지는 자기랑 비슷한 근육량을 지니되 키는 머리 하나 정도 작은 녀석들 대여섯 정도를 이끌고 와 정중하게 말을 걸어왔다. 위협이 목적이라기엔 상당히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였기에 적당히 대답은 해주기로 했다.
"엘드미아 에가는 맞는데 경은 아니지."
잘못된 호칭을 지적했을 뿐인데 어째 주변에서 탄성이 흘러나오고 곰탱이도 감격했다는 듯 부담스러운 낯짝으로 날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제국에서의 경험에 입각하여 추측했을 때, 딱 봐도 마법보다는 검과 더 친해 보이는 녀석이 이런 반응을 보이면 보통 원하는 게 하나다.
"왕실의 은혜를 잊은 극악무도한 반역자들을 뿌리 뽑는데 일조했음에도 이런 겸손한 자세라니! 그야말로 기사의 귀감입니다! 부디..."
그걸 알았기에 난 녀석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첫째. 난 이곳에 레그네바 교수님의 조교이자 제자로 온 거지 칼잡이로 온 게 아니다. 기사의 귀감은 더더욱 아니지."
"대련을...예?"
"둘째. 난 아무나 붙잡고 대련하는 취미는 없다."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할 때마다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일부러 크게 말하고 있지 않으니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서 알아서들 조용해지는 모습에 만족감을 느끼며 난 마지막으로 약지 손가락을 펼쳤다.
"셋째. 소문은 언제나 과장되기 마련이니 괜한 환상 품지 말고 아카데미 수업에나 열중해라."
얘들이 대체 무슨 소문을 어떻게 들었는지 몰라도 뜬구름 잡는 헛소문부터 사실까지 다양하게 주워듣고 가십거리 삼아 씹어먹었겠지. 그걸 일일이 교정해주는 것만으로 내가 강해진다면야 얼마든지 도와줄 의향이 있으나 나보다 약한 애들하고 투닥거리며 그런 거 해봤자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제 길을 비켜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친절을 발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확실하게 끊어 말하자 곰탱이는 머뭇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길을 열어 주었다. 그래도 말이 통하는 친구라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려고 했더니 이번엔 다른 방향에서 질문이 날아왔다.
"그럼 어떤 소문이 진짜인지 하나만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정중한 질문이지만 어딘가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실눈의 흑막 캐릭처럼 생긴 장발의 남학생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례라는 건 알지만 아카데미에서 에가 경...실례, 에가 님의 명성은 굉장히 드높거든요. 이렇게 점심시간까지 쪼개서 뵙고 싶어 할 정도로 말이죠. 이런 모습을 봐서라도 하나만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쟤도 셰릴이랑 동갑이거나 비슷한 또래일 텐데 적당히 추켜 세우고 밀고 당기는 게 참 귀족스럽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무시하고 가려던 찰나, 하나만 확실히 해 두면 귀찮은 일이 줄어들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 짧게 대답해주었다.
"단두대."
아카데미 생도씩이나 되는 똑똑한 애들이니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아들을 것이라 여기며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스럽게도 따라오는 학생들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