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실리에의 기사 흉내 금지령을 지키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으나, 엘드미아는 많은 것을 간과하고 말았다.
안일한 판단을 내렸다...고 하기에는 애매했다. 충분히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이었으니까.
레비엥의 단두대와 모험가 단두대를 두고 퍼져 있는 소문은 하나같이 흉흉한 이야기들 뿐이다. 애초에 처형기구가 별명인데 흉흉하지 않으면 뭔가 많이 뒤틀린 거니 당연한 결과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슈라고 할 수 있는 엔벨데와 그의 반역 세력들이 하나같이 목이 날아갔다는 점에서 흉흉함은 최고조에 이르른다.
상식적인 사람들의 반응은 그런 소문을 지닌 이와 거리를 두는 것이다.
설령 친해지고 싶더라도 조금만 조사해 보면 왕실의 호의와 귀족원조차 지나가는 똥개처럼 취급한다는 걸 알 수 있으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다른 선택지를 고르는 이는 그 시점부터 이미 비정상이다. 여건만 갖춰진다면 앞뒤 안 가리고 목부터 날리는 정신 나간 존재란 결코 가벼이 여길 대상이 아니다.
거기까지는 실로 합리적인 판단이었으나, 엘드미아는 이곳이 아카데미라는 것과 자신을 둘러싼 학생들의 나이를 간과했다.
15살. 많아도 17살을 넘지 못 하는 이들. 그나마 18살인 칼리츠만이 독보적인 연장자로 위치한 2학년.
중2병이라는 게 현대 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엘드미아가 미리 알았다면 아실리에가 삐지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은 기사다운 태도로 그들을 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위에는 나이에 비해 성숙한 이들이 너무 많았다. 15살이 얼마나 비이성적일 수 있는지 잊고 그냥 이세계 평균인가 보다 싶을 정도로.
그 결과 엘드미아가 보여 준 모습은 수많은 남학생과 여학생들의 심장에 불을 지폈다.
당연히 실력조차 알 수 없거나 형편없는 몰골을 한 이가 말했다면 비웃음이나 샀겠지만 결국 외형과 옷이 개연성이었다.
"저게... 단두대의 품격...?"
"그, 그러고 보니 제국 아카데미에서도 활약했었다고 했던가?"
"잠깐, 그럼 단두대와 관련된 모든 소문들은 사실이라는 거야? 사람인가?"
"오늘부터 나는 왕립 아카데미의 단두대가 되겠어!"
"지랄을 해라. 그래서 니 성적을 단두대에 올려 조져놨냐?"
"오늘만큼은 교수대가 되어 주마!"
생명을 위협한다는 압박감으로 불을 꺼트리려던 목적과 달리 어차피 엘드미아에게 적대적일 생각조차 없는 학생들은 그가 보여 준 단호함과 행동에 눈이 멀어 자체적으로 기름을 들이 붓는 중이었다. 일부는 호기심, 일부는 호승심, 또 다른 일부는 온갖 기대감과 열망으로 뒤섞여 지금까지 아카데미에 퍼져 있었던 소문들 외의 새로운 소문마저 창조해내기 시작하는 대환장 파티를 엘드미아가 직접 봤다면 앞으로의 행동 방침에 대대적인 수정을 가하고 싶었으리라.
시무룩해진 칼리츠와 그 정신없는 광경에 한숨이나 내쉬는 셰릴. 그리고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리윌스 정도가 침착함을 유지하며 다른 이들과 차별화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재밌는 분이더라."
그리윌스의 말에 시무룩하게 있던 칼리츠가 딴지를 걸어왔다.
"별로 재밌는 모습은 보여 주지 않으시던데."
"왜 그렇게 심각해? 딱히 네가 욕먹은 것도 아니잖아."
"...그게?"
면전에 대고 욕만 박지 않았을 뿐이지 꺼지라는 표현을 많이 돌려 말했다고 받아들인 칼리츠로서는 그리윌스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딱히 틀린 해석은 아니었으나 그리윌스는 악의 없이 엘드미아를 따라다니며 정보를 뿌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카드가 알아서 떨어져 나가게 둘 생각이 없었다.
"레그네바 교수님의 제자이자 조교로 왔고, 아무나 붙잡고 대련 안 한다는 건 결국 수업과 관련된 거면 상황에 따라 대련도 한다는 거 아니겠어? 말이 좀 쌀쌀맞아서 그렇지 공과 사를 구분 지었을 뿐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그런...가?"
"마지막 말도 그렇잖아. 소문에 휘둘리지 말되 학업에는 집중하라는 거. 조언임과 동시에 레그네바 교수님의 수업을 잘 들으라는 이야기 아니겠어?"
뒤늦게 왔음에도 하도 학생들이 사방팔방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탓에 얼추 사건을 파악한 셰릴은 간만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리윌스를 바라보았다.
이게 아주 곰탱이를 구워삶아 먹으려고 하는구나. 아니나 다를까 새로운 견해를 좀 주워들었다고 단순한 칼리츠의 표정이 밝아졌다.
"듣고 보니 그런 거 같네! 역시 그리윌스야! 눈이 번쩍 뜨이는군!"
하지만 셰릴은 굳이 나서서 그의 착각을 바로잡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칼리츠에게 악감정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어차피 호의로 접근하는 이상 엘드미아에게 해코지를 당할 일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가문에 있을 때도 그랬다. 오가토르프 저택에는 엘드미아보다 나이 많은 종사들만 열 명이 넘었다. 다행히 인성에 문제가 있는 이들은 아니었기에 순순히 엘드미아의 실력을 인정하며 절차탁마를 원했고, 엘드미아는 격렬하게 귀찮아하면서도 그들에게 모질게 대하지는 못했다.
"검술과의 희망이 이런 일에 풀이 죽어서 쓰겠어?"
"맞는 말이야! 나도 모르게 에가 경의 기세에 눌려 위축된 모양이군! 당장 수강 신청을 해야겠어!"
미친놈아 너 마법 못 쓰잖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셰릴은 이번에도 참아냈다. 사실 칼리츠가 열성적으로 대련을 요구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나쁠 게 없었다. 검술과의 우수한 인재가 평생 쓰지도 못하던 마법 수업까지 들어가며 조교와의 대련과 가르침을 구한다는 이야기가 퍼진다면 아카데미에서도 뭔가 조치를 취할 테니 이번만큼은 겸사겸사 편승하기로 했다.
"그런데 정말 강한 거 맞아? 오러가 거의 안 느껴지던데."
"안 강하면 엔벨데가 죽었겠나."
그리윌스가 내뱉은 말에 저도 모르게 반응하고 말았다. 엘드미아를 무시하는 것 같아 욱했다기보다 괜히 허튼 생각하고 건드렸다가 칼부림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혹시 몰라 바라봤지만 다행히 그리윌스의 뭔가 꿍꿍이 많아 보이는 얼굴에는 의아함만 피어올라 있을 뿐이었다.
"아, 물론 나도 그 업적들을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야. 오러를 떠나서 나도 좀 쫄았는걸. 그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많이 다른 분위기여서 궁금해진 거야."
"분위기?"
"좀 더... 직접적인, 그러니까 10검 같은 위압감을 풀풀 풍기며 다닐 줄 알았거든."
얼핏 당혹감 비스무리한 것마저 담겨 있는 듯한 반응에 단무지 눈썹을 꿈틀거린 셰릴은 뭔가 그리윌스의 화술에 휘말리는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목구멍 언저리까지 올라온 질문을 삼키며 자리를 피했다. 상인 집안답게 교묘한 화술을 지닌 뱀 같은 남자였다. 생긴 것도 그렇고 그 특유의 싸움법도 그렇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괜한 반발심을 일으킨다.
"에이, 뭘 또 그렇게 혼자 서둘러 가시나. 어차피 너도 체험 수업을 들을 거잖아. 같이 가지?"
"쫓아오는 건 마음대로지만 같이 갈 생각 없다."
그랬기에 셰릴은 차가운 태도로 일관하며 걸음을 옮겼다. 기운을 차린 칼리츠가 점점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생각보다 셰릴과 에가 경은 성격이 비슷한 거 같지 않아?"
"...흠. 듣고 보니 그러네."
그 의견에 가볍게 동의하며 그리윌스는 칼리츠와 함께 셰릴의 뒤를 따랐다.
◈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교수실에 도착해 스승님과 만나 간단한 수업의 개요를 들으며 준비물을 챙긴 뒤 강의실까지 깔끔하게 청소한 나는 수업까지 30분 남은 지금 스승님에게 아카데미에 들어와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을 이야기했다.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냐고? 벌써부터 강의실을 만석으로 채우고 있는 밀도 높은 2학년 학생들을 보며 강한 의구심을 느낀 스승님이 내게 뭔가 한 게 있냐고 물어 봤기 때문이지.
"...설마 그거 때문에 저리 많이 온 건 아니겠지?"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매도 당하고 싶은 변태들도 아니고 그딴 반응에 열광해서 오다니, 정신이 이상한 게 아닌 이상 말도 안 되지.
"스승님 수업이 마법의 이해와 실전 응용이니까 온 거겠죠. 한창 자기들 실력 겨뤄보고 싶은 나이 아닙니까."
"그런...가? 그런 것치고는 너무 많은데. 마법을 배우지 않는 검술과 학생들도 많은 거 같고..."
"체험 수업이 다 그런 거 아닐까요? 저도 뭐 배울 게 없나 궁금해서 들어왔을 거 같은데."
"하긴... 나도 아카데미에 다닐 땐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많은 수업을 들으려고 했었으니."
과연 궁정 마법사까지 찍은 분답게 학구열이 엄청났나보군. 이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스승님이었으나 묘한 당혹감은 아직 남아 있었다.
다른 교직원들은 수강생들이 적을 수도 있으나 거기에 너무 괘념치 말라는 조언을 했었다던가. 아마 조언과 현실에서 오는 갭이 너무 큰 탓에 잠깐 당황하신 모양이다. 스승님은 이내 마음을 다잡으며 마지막으로 강의 자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으로 자료를 훑는 것과 달리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나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검술과에 있는 교수들 몇몇이 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물어보더구나."
"제 도움이요? 그쪽에 도와줄 수 있는 거라고는 애들 패는 거 밖에 없을 텐데."
애초에 누굴 가르칠 생각으로 살아온 것도 아니고 내가 배운 걸 남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풀어 설명해주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 결국 대련해서 애들 샌드백 만들기 정도밖에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그치들이 그런 도움을 원했을 거 같지는...
"하하, 그들이 원하는 게 마침 그런 거더구나. 네 업적은 여러모로 유명하잖느냐. 안전한 실전 교보재가 되어 줄 수 있냐는 거지."
...않았는데 아닌 게 아니었네. 실전이 중요하긴 하지. 그래도 나도 바쁜 와중에 남한테 무상으로 봉사하는 건 조금...
"반드시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합당한 보수를 지불해서라도 도움을 받고 싶다고 하더군. 다들 뭐 악의는 없어 보였으니 한번 생각해 보거라. 어차피 마력 기관을 완성할 때까지는 딱히 바쁠 것도 없으니 말이야."
"나중에 만나보겠습니다."
역시 아카데미 교수들은 달라. 배운 사람답게 사람을 움직일 때 뭐가 필요한지 잘 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