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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65화 (265/412)

뤼비스 교수를 따라 도착한 대련장은 실내 체육관같은 곳이었다.

나름 휴식을 위한 공간도 있고,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약재와 붕대들을 옮기는 인원이 있는 것을 보면 비상시를 대비해 구급 요원 같은 사람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모습이 굉장히 체계적이고 신기해서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더니 뤼비스 교수가 슬쩍 말을 걸어왔다.

"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지. 원래는 저마저도 없었는데 전쟁 초기부터 생겨났다."

원래부터 있었던 문화는 아니었나보군. 그래도 추가돼서 전혀 나쁠 게 없는 시설이니 좋은 게 좋은 거였다.

"포션도 있는 걸 보아하니 상당히 공을 들이는 모양이군요."

"성광십자회를 필두로 다양한 신전에서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하더군. 덕분에 부상 걱정할 필요 없이 수업을 할 수 있어서 편하다."

결국 여기서 배우는 건 몬스터를 죽이든 사람을 죽이든 뭔가를 죽이는 기술이니까 부상의 위험이 줄어드는 건 좋은 일인 게 사실인데... 어째 이 아저씨가 말하니 애들 막 굴릴 수 있어서 좋다는 의미로만 들려서 불안 불안하다.

이곳까지 오는 십여 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질문에 시달리며 파악해 본 바, 뤼비스 교수가 딱히 소시오패스이거나 감정이 결여된 존재인 건 아니었다. 그저 좀 표현이 서툴고 극한의 효율충같은 모습을 종종 보일 뿐이지 학생들이 더 많이 배우고 인재로 나아가길 바라는 선생이다.

왜 그런 사람이 엘프가 얼마 없는 나라 중 하나인 이티스엘까지 와서 교수 노릇을 하고 있으며 전에는 뭘 하며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심성 자체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엘프이면서 인간의 시간관념을 이해하려고 하다 보니 얼핏 맞물리는 듯하면서도 거하게 어긋나는 감각을 지녔다는 게 문제다. 1분, 1초에 쫓기듯이 움직이는 엘프를 봤다고 말하면 아실리에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내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대련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니 그대도 같은 방법으로 상대해 주길 바란다."

"마법이랑 검술을 같이 배우는 학생들이 많습니까?"

"적진 않다. 배틀메이지도 있고, 마법 기사 지망생도 있지. 마도구를 준비하기도 하며 치명적이지 않은 수준의 암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진짜 무차별급 배틀 로얄인가? 뤼비스 교수의 설명에 나도 모르게 표정이 오묘해졌는지 잠깐 내 얼굴을 확인한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제국과 왕국의 차이점이지. 제국은 먼 미래의 인재를 육성하지만 왕국은 졸업과 동시에 쓸 수 있는 인재를 원한다. 한 우물만 파는 것보다는 효과가 좋지."

아카데미에 천재만 오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한 분야의 끝을 볼 수 있는 인재는 한정적이니 굳이 그거만 가르칠 이유는 없다는 것일까. 주입식 교육처럼 안 되는 거 붙잡고 있게 만드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성과가 있는 편이다. 상대하다 보면 참신한 학생들을 보게 될 테니 기대해도 좋다."

매우 많이 연장자인 사람이 저렇게 말하니까 괜히 기대되네. 이백 살 먹은 엘프에게 참신하다는 말이 나오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재능이지 않을까 싶다.

"수업 인원은 어떻게 됩니까?"

"각 학년별로 30명이다. 실기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학생들만 신청할 수 있는 과목이라 그럭저럭 봐줄 만 한 실력일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대에겐 성이 안 찰 가능성이 높겠지."

"저를 상당히 고평가해주시는군요."

"고평가할 만한 이유가 하지 말아야 할 이유보다 많으니까."

태연하게 내 실력에 강한 신뢰를 보내던 뤼비스 교수는 그 후로도 학생들이 모일 때까지 그간의 수업 내용이나 시설에 대한 설명들을 이어 나갔다. 겉으로 보이는 태도와 달리 참 말하는 걸 좋아하는 엘프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난 오늘의 행동 방침을 계획했고...

그렇게 오늘 수업의 목표는 엘드미아의 3분 요리 교실로 정해졌다.

실전 과목은 학생들 사이에서 일종의 훈장과도 같은 수업이었다.

상위권 중에서도 실기에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출해 진행되는 수업은 자연스럽게 엘리트들을 위한 특별 수업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고, 강함을 동경하는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레그네바 교수님의 제자 겸 조수이자 한동안 실전 과목 시간제 강사를 맡게 된 엘드미아 에가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인식에 걸맞게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지니는 이들이 절대다수였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자만은 하지 않되 자부심만 지닌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고, 극소수를 제외한 인원들은 갑작스럽게 수업에 끼어든 엘드미아에게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오늘 수업은 너희와 나의 대련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엘드미아는 대련장에 걸터앉아 여유롭게 자신의 개나 쓰다듬으며 무미건조한 태도로 학생들을 훑어볼 뿐이었다.

용사를 이기고, 반역자 엔벨데를 죽일 실력이라는 건 알겠다. 근데 그게 아카데미 한 학년의 엘리트 서른 명을 혼자서 이겨 먹겠다는 말을 지당하고 합당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주진 않는다. 심지어 그냥 검술도 아니고 마법이든 오러든 뭐든 사용 가능한 실전 과목에서? 결국 자신감에 난 스크래치와 의아함을 견디지 못한 학생 하나가 손을 들어 반문했다.

"그게 의미가 있습니까?"

"네가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해라."

"강한 사람과 싸우는 거면 뤼비스 교수님으로 충분한 거 아닙니까? 에가 조교님의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다른 과목도 아닌 실전 과목에서 두 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동안 저희 30명 전부에게 유익한 배움을 줄 거라고 기대하기 힘든데요."

당연히 그런 반응이 나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던 셰릴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관심이 없어서 누군지 기억도 안 나는 청년이었다. 중위권 성적이었던 거 같긴 한데, 저런 말을 자신감 있게 내뱉을 실력은 안 되는 학생이었다. 적어도 상위권이라 할 수 있는 학생이 조심스럽게 꺼내 봐야 하는 화두를 지나치게 당당하게 꺼내서인지, 아니면 엘드미아의 실력을 은연중이 무시하는 발언이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많이 언짢은 놈이라고 생각하며 셰릴은 괜히 눈을 흘겼다.

하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은 태도는 조금 다를지언정 그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바라보며 엘드미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예?"

"왜 배움이 없을 거라 여기는지도 말해라."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용사와 반역자 엔벨데를 이겼다고 한들 실전 과목은 생사결이 아닙니다. 가르침을 줌과 동시에 상대방을 최대한 안전하게 무력화시킬 실력이 있어야 하며, 그걸 30회 반복해야 하죠. 에가 조교님은 스스로 그런 실력이 된다고 믿으시는 겁니까?"

엔벨데가 검 하나만으로 자기 가문을 세웠다고 하나, 솔직히 아카데미에서 자신은 그러지 못할 거라 여기는 학생들은 하나도 없었다. 얕잡아보지는 않으나 고평가하지도 않는다.

용사가 강하다고는 해도 진짜 강했으면 전장에 투입되지 않았겠는가? 결국 똑같이 배우는 입장이다. 이 역시 대단하다고 해 줄 수는 있으나 그게 30명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가져갈 실력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냐고 하면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잘났어도 동갑 혹은 또래다. 자신보다는 강하겠지만 30명을 다 상대하는 건 별개의 이야기라는 생각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 저 학년 1위에서 내려오질 않는 검의 천재라 불리는 오가토르프조차 그리윌스와 칼리츠를 상대하고 나면 힘이 빠지는데?

"식견이 짧은 거 같으니 좋은 거 두 가지를 알려주마. 첫째. 네가 속한 집단에서 네가 이해하지 못할 인사 조정이 발생했는데 네 위의 상사 혹은 지휘권자가 너보다 뛰어난 인물일 경우, 네 모자란 식견으로는 미처 알지 못하는 깊은 뜻이 있다고 여기는 편이 부끄러운 과거를 덜 만들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내가 시간제 강사로 들어온 것은 뤼비스 교수님이 직접 요청 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무능한 이가 머리 위에 있을 경우는 다른 이야기다. 그 사람이 정말 무능한 게 맞는지는 별개로 치더라도 말이지. 농담처럼 가볍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여보이는 엘드미아였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농담에 웃지 못했다.

"그래서 할 수 있다는 겁니까?"

"둘째. 나는 할 만하니까 한다. 잘 기억해 두도록. 수도 한복판에서 귀족의 목을 치고 임시 구금소를 초토화 시켰음에도 아무런 형량도 없이 무죄 방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니까."

여전히 덤덤한 태도로 이어진 대답과 달리 내용은 살벌했다. 그 순간만큼은 질문한 학생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엘드미아는 정말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대답이었다는 듯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대련장 위로 올라가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실전 과목인데 더 이상 말이 필요하진 않겠지. 30등부터 1등까지 순차적으로 상대한다. 알아서 올라오도록. 라이카. 모래 시계 준비해."

라이카가 누군데? 학생들의 시선이 허공을 방황하는 사이 뽈뽈뽈 움직인 엘드미아의 개가 대련장 끝에 위치한 의자 위에 올려져 있던 모래시계를 요령좋게 물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충분히 귀여운 모습이었으나 당장 처한 상황이 너무 충격적인지라 학생들은 그 행동에서 뭔가 느낄 틈이 없었다.

"3분짜리 모래 시계다. 이번 수업에 내가 너희 한 명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은 3분까지라는 말이지. 봐주기는 할 텐데, 내가 살면서 그런 경험이 별로 없어서 조절이 쉽지 않다. 빨리 탈락하더라도 낙담하지 말도록."

절대다수의 학생들이 느끼기에 명백한 도발과 다를 바 없는 말이 엘드미아의 입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에.

"...바벨리 라고 합니다."

비록 실전 과목에서는 최하위 성적이지만 결코 떨어지는 성적이 아닌 남학생이 이를 갈며 대련장에 올라서자 엘드미아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대답했다.

"통성명은 필요 없다. 필요한 이름은 내가 기억할 테니까."

바벨리는 화를 내기보다 평정심을 유지하기로 마음먹으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라이카가 모래 시계를 뒤집으며 난 '탁'하는 소리에 반응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 속도로 오러를 응용하며 엘드미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전력을 다한 선공을 엘드미아가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며 눈으로 좇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넌 빨리 탈락할 일은 없겠다."

검도 뽑지 않은 채 역으로 파고든 엘드미아의 어깨가 바벨리의 명치를 들이받음과 동시에 그의 손이 순식간에 휘감기며 검을 쥐고 있는 바벨리의 두 팔을 봉쇄했다. 오러를 둘렀기에 어지간한 충격은 버틸 수 있다고 믿었던 바벨리는 숨이 턱 막히는 충격에 놀랄 틈도 없이 얼굴에 강한 충격을 받고 뒤로 나가떨어져야만 했다.

"수준이 너무 낮아서 굳이 신경 써가며 힘을 조절할 필요가 없거든."

귓가에 들려오는 엘드미아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바벨리는 자신이 검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그대로 엘드미아의 양쪽 팔꿈치에 얼굴을 가격 당해 바닥에 널브러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빠르지도 않은 움직임이었는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제압을 당한다고? 오러조차 별로 안 느껴졌는데?

-챙그랑!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려 하는 것을 엘드미아가 막았다. 빼앗은 검을 다시 바벨리 앞으로 던진 것이다. 하지만 바벨리는 검을 빼앗겼다는 것과 그 검이 다시 던져졌다는 사실에 굴욕을 느낄 틈이 없었다.

"다시."

힘겹게 침을 삼킨 바벨리는 남은 2분 50여초의 시간 동안 무슨 꼴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며 자신의 검을 쥐었다.

그리고 엘드미아의 목소리가 명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번 더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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