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22등이 구른다.
"다음."
13등이 나가떨어진다.
"다시."
엘드미아의 입에서 '다시' 와 '다음' 외에 다른 말이 나오게끔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하나가 된 학생들은 자신들의 굳건한 의지가 대장간의 용광로처럼 타오른다고 믿었으나, 엘드미아가 7등을 거의 반쯤 집어던지다시피 했을 무렵에는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따지는 것도 아니고, 억울해하는 것도 아닌 그저 허탈함에서 툭 튀어나온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대련을 마친 모두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처음 바벨리가 일방적으로 던져지고 바닥에 구르게 되는 것을 반복하며 딱 3분이 지났을 때. 그와 비등비등하게 겨뤄왔던 25등까지의 학생들은 자신의 미래를 예측했다. 그들은 차라리 나았다. 마음을 다잡은 뒤 엘드미아를 선생으로 여길 준비라도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하위권과는 실력 차이가 명확하다고 믿어왔던 학생들은 달랐다. 일부는 맥없이 나가떨어지는 하위권을 한심하게 여기기도 하고, 자신은 3분은 넘기겠다고 자신감을 가지기도 하며 차례를 기다렸다. 하위권과 연거푸 대련을 반복하며 엘드미아가 체력적으로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인 것도 그들의 자신감에 불을 붙이는데 한몫했을 것이다. 그래, 10명만 상대해도 30분이다. 결코 쉬운 게 아니지.
"힘든 척하기도 쉬운 게 아니군. 다음 20등."
마치 그런 학생들의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히 21등까지 3분에 맞춰 내던진 엘드미아의 호흡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20등을 호명했을 때, 중위권 학생들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들은 뒤늦게 깨달았다. 엘드미아가 체력이 빠진 척하며 학생들의 발버둥을 유도했다는 것을.
하위권 학생들은 모두 마지막까지 발버둥 쳤다. 더 성적이 좋은 중위권들에게는 전력을 다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다시."
'제발 나는 3분을 넘어서기를.' 이라고 바라던 마음은 15등마저 3분을 채운 순간 '제발 손대중이 힘들어서 3분을 못 맞추기를.'로 바뀌었다. 스스로의 실력에 나름 객관적이라고 여겨 왔던 이들조차 식은땀을 흘리며 어떻게든 자신의 대련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3분 동안 바닥을 구르는 학생들의 모습을 면밀히 살펴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드미아는 모두 평등하게 3분간 굴릴 뿐이었다. 여전히 검 한번 뽑지 않은 채 모두의 바람을 산산이 박살 내며 4등까지 똑같이 굴렀을 무렵이 되어서야 절망에 빠져 있던 학생들의 머릿속에 엘드미아의 나이가 떠올랐다. 그리고 완벽한 정신 승리를 위한 방어기제를 떠올렸다.
천재다. 저게 천재지 별 게 천재인가? 그때 귀신같이 엘드미아가 읊조렸다.
"저놈은 천재다. 뭐 그런 생각하는 얼굴들이로군."
설령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더라도 공치사를 하는 격이다 보니 입에 담기 어려운 말임에도 여전히 덤덤하게 말하는 그에게로 학생들의 시선이 모였다.
"왕립 아카데미 수백 명 중 상위 성적을 유지해서 실전 과목을 듣게 된 너희는 노력가고, 나는 천재라서 강하다라... 이 수업을 듣지 못하는 다른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참 흥미롭지 않나? 다음."
그의 호령에 3등, 칼리츠가 기대감에 두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련장 위로 뛰어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학생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 뭔가 욱하는 마음에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다못해 넌 노력하는 천재인 거 아닐까? 라는 생각 반, 칼리츠부터는 다를 거라는 생각 반으로.
"지난번에 봤던 친구로군."
엘드미아는 여전히 덤덤히 반응하며 검조차 뽑지 않았다. 덕분에 학생들 사이에서 슬슬 의구심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사실 저 검은 장식이고 엘드미아는 무투가인 게 아닐까? 단두대라는 명칭에 휩쓸려 무의식중에 검사라고 생각했는데 굉장한 실력의 무투가라서 수도手刀로 목을 쳤던 거지. 저 칼리츠와 마주서도 꿀리지 않는 덩치를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잘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칼리츠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지금까지는 별말없이 그저 대련만 이어 나가던 엘드미아가 처음으로 의아함을 내비쳤다.
"한손검?"
"그렇습니다!"
"방패는 어쩌고?"
"하하하!"
칼리츠는 호쾌한 웃음과 함께 돌격으로 대답했다.
"과연. 세 번째답군."
자신의 무기를 숨기고 이점을 가져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그를 칭찬하며 엘드미아도 앞으로 달려들었다. 적을 알 수 없을 때는 우선 물러나 상황을 주시하는 것을 기본으로 깔고가는 학생들에게는 지나치게 과도한 자신감으로 여겨졌다. 무엇보다 그들은 이미 칼리츠의 방패가 어떤 구조인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엘드미아가 크게 한 방 먹을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의 허리에서 처음으로 검이 뽑혀 나와 허공을 베기 전까지는 그랬다.
"어...? 어어?"
검격이 전혀 닿지 않았음에도 큰 당혹감에 휩쌓인 칼리츠의 시선이 자신의 오른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로 향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연결되던 마나가 거짓말처럼 끊기더니 마나 실드를 활성화 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숨겨 놓은 패는 너만 있는 게 아니다."
뒤늦게 엘드미아에게로 시선을 옮겼지만 칼리츠는 그의 발차기를 피할 수 없었다. 명치를 강타한다기보다 강하게 밀어 차는 것에 가까운 공격을 눈치채고 버티려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칼리츠는 거하게 뒤로 날아가 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다시."
결국 칼리츠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3분을 고통받은 뒤에야 대련장을 내려올 수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그 처량한 모습에 묘한 동질감을 느낌과 동시에 이전까지 느끼고 있었던 자괴감과 박탈감이 묘하게 상쇄되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오가토르프까지 맨손으로 3분간 털린다면 이 모든 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떤 수를 쓴 것인지 몰라도 칼리츠의 마나 실드를 파훼할 때를 제외하면 엘드미아는 검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다음."
하지만 그리윌스가 대련장으로 올라서서 자세를 잡기가 무섭게, 그들의 희망이 처참히 무너졌다.
"맨손으로 1분 안에 나가 떨어지기. 검으로 3분 버티기. 선택해라."
대놓고 그리윌스에겐 힘 조절을 할 수 없다고 장담하는 엘드미아의 대답에 모두가 놀랐다. 일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 인간은 눈에 무슨 전투력 측정기라도 달아놨단 말인가? 대체 무슨 기준으로? 하지만 여전히 꿍꿍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잠깐 고민한 그리윌스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후자로 부탁드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대체 기준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엘드미아는 대답 대신 대련장 구석으로 걸어가며 케이프를 벗었다. 지금까지는 펄럭이는 케이프에 가려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육체가 옷 위로도 확연하게 존재감을 과시하는 모습에 남녀할 것 없이 시선이 쏠리는 사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엘드미아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잠깐 그리윌스를 바라보다가 검을 뽑아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머리 높이에서 수평으로 기울어진 롱소드의 첨단이 그리윌스에게로 향하는 일련의 과정은 조금도 빠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완벽하게 자신의 얼굴을 겨눠 고정되는 엘드미아의 검을 보며 그리윌스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 자세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완벽한 부동 자세를 취한 엘드미아가 뒤늦게 대답했다.
"자세 잡는 거 보면 견적이 나온다."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이해할 수 없었을 말이었으나, 이미 봐버렸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엘드미아가 취하고 있는 자세는 왕국 검술의 기본 중에서도 기본으로 취급하는 자세이자, 너무나도 흔해서 어지간한 삼류 검술조차 대충은 따라 하는 자세였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동시에 자신이 수천수만 번을 반복하며 연습해온 자세이기도 했다.
자신이 바라 마지 않던 완벽한 자세를 보는 것 같아, 그리윌스는 울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중단 자세를 버리고 엘드미아와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던 엘드미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마치 자신이 연습해왔던 것을 인정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고양됐다.
"성실하군. 이름이 뭐냐."
"그리...윌스입니다."
"몇 살이냐."
"열여섯입니다."
당신보다 한 살 많죠. 단 한순간도 부끄럽지 않게 훈련해 왔다고 믿었으나 이번만큼은 스스로 게을렀던 게 아닌가 싶어 부끄러워진 그리윌스와 달리 엘드미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래서 천재라는 놈들은 안 된다니까. 사람 허탈하게 만드는데 아주 도가 텄어."
"솔직히 이 말은 해야겠습니다. 그건 저희가 할 말 아닙니까?"
"어. 너희가 할 말 아니다. 헛소리 말고 다 보여봐라."
사실 나이를 속이기라도 한 것일까. 물론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기에 그리윌스는 엘드미아의 말에 맞춰 전력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간격이 좁혀짐과 동시에 손목을 돌려 엘드미아의 검을 아래로 쳐 내고자 검을 휘둘렀다.
손목을 노리는 것보다 지금 있는 자세를 파훼시킨 뒤 다음으로 이어 나가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자신의 직감을 믿고 휘두른 검이 곧장 엘드미아에게로 날아들었다. 똑같이 오러를 쓰는 이상 찰나의 싸움이었다. 그리윌스의 머릿속에서 엘드미아가 자세를 바꾸는 것과 검을 살짝 움직여 공격을 흘리는 것을 기반으로 온갖 경우의 수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드미아는 검과 검이 부딪치는 그 순간까지도 움직이지 않았다. 빈틈을 보였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보려는 것인가 의문을 가지는 순간.
-채앵!
휘둘러진 그리윌스의 검이 바위라도 후려친 것처럼 역으로 튕겨져 나왔다.
"깔끔하네. 막는 것도 봐볼까."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음에도 별다른 흔들림이 없었다는 사실에 기겁할 틈도 없이, 자세가 흐트러진 자신을 향해 파고들어 오는 찌르기를 가까스로 피한 그리윌스는 물 흐르듯이 회전하는 엘드미아의 검과 관자놀이를 양단할 기세로 이어지는 후속타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뻔 했다.
당연히 그럴 틈도 없었다.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이어지는 엘드미아의 공격을 막는 것만으로도 급급했다.
일부는 눈으로, 혹은 감각으로, 그 외의 공격은 피를 토해가며 연습한 동작이 본능적으로 튀어나왔기에 버틸 수 있었던 그리윌스는 결국 3분을 다 채우자마자 녹초가 되어 대련장에 드러누워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며 가까스로 숨을 고른 뒤에야 그리윌스는 자신이 단 한 번도 바닥을 구르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었다.
눈앞이 핑핑 도는 와중에 그의 옆으로 다가온 엘드미아가 내려다보며 물었다.
"몸에 검술이 아로 새겨질 정도로 훈련한 보람이 느껴지나?"
"...예. 느껴집니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된다. 조바심 내지 마라."
무심한 말이었으나 마치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고 있다는 듯해서, 그리윌스는 비 오듯이 흐른 땀이 눈에 들어갔다는 것을 핑계 삼아 아주 조금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