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릴. 네 차례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는 엘드미아의 모습에 학생들은 방금 전 그리윌스가 보여 준 대련에서 느꼈던 감정보다 더 큰 놀라움을 느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엘드미아가 오가토르프 가문에서 지냈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집사와 주인의 관계였다. 교수도 아닌 조교의 입장이니 당연히 존칭으로 부를 줄 알았다. 애초에 귀족과 평민의 관계인데 아무리 아카데미의 불문율이 있다고는 하더라도 저리 쉽게 부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 왔듯이 셰릴은 감정의 변화가 적은 평소의 상태를 유지하며 대련장에 올라섰다. 그러한 부름이 자연스러운 건지, 아니면 특유의 포커페이스로 당혹감을 감추고 있는 것인지 학생들은 알 수 없었다.
"실력은 좀 늘었나?"
"당연하지."
이제 엘드미아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학생들은 오히려 다른 기대를 품고 있었다.
셰릴은 엘드미아의 본 실력 중 어디까지 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1시간이 넘게 연속으로 대련을 해왔음에도 여전히 평온한 엘드미아가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교수님이 말씀하셨었지. 내가 가지고 있는 수단을 전부 동원해서 상대해 주길 바란다고."
마치 지금까지는 수중의 수단을 다 사용하지 않았다는 듯한 발언에 학생들 사이에서 의문이 맴돌기 시작했다.
마법사의 고속 시전과 대對기사용 행동 저지 마법들까지도 죄다 파훼하며 속수무책으로 쓰러뜨린 인간이었다. 초근접전에서 일부 학생이 던진 암기마저 대수롭지 않게 피하던 인간에게 아직도 숨겨둔 무기가 있다고? 아, 그래도 레그네바 교수님의 제자니까 마법을 쓸 수 있는 건가?
엘드미아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라이카, 이리 와."
그리고 그 부름에 지금까지 영리하게 모래 시계를 뒤집던 개가 헥헥 거리며 엘드미아의 발치까지 뛰어갔다. 그 모습에 절반은 얼이 빠지고 절반은 세상에 둘도 없는 흉악한 동물 학대자를 봤다는 눈으로 엘드미아를 바라보기 시작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리윌스에게 손짓했다.
"그리윌스. 이번엔 네가 시계 좀 뒤집어 줘라."
"아, 예..."
그리윌스마저도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라이카를 바라봤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그리윌스가 모래 시계를 쥐는 사이 묘한 눈초리로 해맑은 눈동자의 라이카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셰릴의 귓가에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히 엘드미아가 자신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것이라 여기며 그에게로 시선을 옮긴 셰릴은 엘드미아의 주변에서 빙글빙글 돌며 날아다니는 묘한 물체를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그건 또 뭐야?"
뒤틀린 뜨개질 바늘처럼 생긴 물건을 슬쩍 바라본 엘드미아가 여전히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지닌 수단. 라이카,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압박해."
개가 저 명령을 알아듣는다고? 셰릴의 의문은 그리윌스가 모래 시계를 뒤집어 놓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짧은 휘파람 소리가 신호라도 된 것처럼 라이카와 수상한 바늘이 동시에 셰릴을 향해 날아든 것이다.
"이 치사한!"
"정령 같은 거라고 생각해. 그럼 안 치사하잖아?"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번만큼은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귀여운 개를 볼모로 삼은 엘드미아의 악랄함 때문이 아니라, 저 순둥순둥하게 생긴 개가 평범한 개라면 절대 낼 수 없는 속도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재빠르게 투사체와 라이카의 속도가 같지 않은 것을 파악한 셰릴은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둘을 기다리다가 번개처럼 바늘을 쳐 내고는 튕기듯이 라이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다쳐도 모른다!"
"멍!"
평범한 개가 아니다. 그렇게 확신했음에도 검을 휘두르는데 약간의 주저함이 따라왔다. 하지만 결국 짐승은 고통을 두려워하는 법. 치명상을 피해 공격하며 개가 물러설 경우 바로 검을 회수할 수 있도록 세밀하게 휘둘러진 검은 예상치 못한 저항과 소음을 자아냈다.
-카앙!
"어?"
직접 품에 안고 쓰다듬기까지 했던 개의 부드럽던 갈색 털에 칼날이 닿자 있을 수 없는 금속음이 났다. 그리고 자신의 검격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으며 라이카가 시도한 몸통 박치기에 자세가 흐트러진 셰릴의 앞으로 엘드미아가 달려들었다.
"난 할 만 해서 한다니까?"
묘하게 웃음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와 함께 휘둘러진 검을 가까스로 막아 내며 뒤로 멀찍이 물러서는 셰릴이었지만 엘드미아는 틈을 주지 않았다.
-피이익!
휘파람. 반사적으로 라이카를 바라보려던 셰릴의 머릿속에 방금 전의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라이카는 휘파람에 조금 늦게 반응했다. 오히려 휘파람 소리와 동시에 움직인 건 바늘이었...
-챙!
"정신이 없네!"
잘 보이지도 않는 바늘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간발의 차이로 쳐 내는 사이 라이카가 셰릴의 다리를 노리고, 엘드미아의 검격이 흐트러진 자세를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해 휘둘러진다. 말 그대로 눈이 핑핑 도는 경험에 셰릴은 이를 악물었다. 마법사랑 정령술사들도 상대해봤지만 이건 수준이 다르다!
"당연히 그래야지."
무엇보다 얄미운 건 여전히 웃고 있는 엘드미아였다. 마치 자신에게 장난을 치는 것처럼 웃고 있는 주제에 검격 하나하나가 매섭기 그지없다. 한번 혹시나 해서 공격을 흘리기 위해 검을 섞어보았지만 그대로 밀고 들어오는 탓에 되려 뒤로 밀리기만 했다.
이게 바로 엘드미아를 상대할 때의 가장 큰 난관이었다. 검술을 떠나서, 휘둘러진 검을 흘려보내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는 것.
그리윌스가 공격을 해놓고도 오히려 튕겨 나간 것처럼 엘드미아의 검은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 대체 얼마나 무식하게 단련한 것인지, 막으면 다음 공격이 이어질게 뻔해서 어떻게든 옆으로 흘린 뒤 반격을 노리고 싶지만 바위에 뿌린 물처럼 허무하게 무산되기 마련이다.
그것만으로도 성가신데 개와 제멋대로 날아다니는 투척 무기라니. 여기다가 곧 마법까지 배운다고?
-피익!
휘파람 소리에 반응해 미리 파악해 두었던 위치로 시선을 돌렸지만 바늘은 그저 허공에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그럼 대체 뭐가...
"나 그거 한 개만 있다고 말한 적 없는데."
무게를 잡고 있어도 얄밉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반응해서 고개를 돌리니, 엘드미아의 주변에 또 다른 바늘들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몇 개나 있는 거야?"
"글쎄?"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검술만 따라잡기도 벅찬 와중에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저 모든 걸 극복하고 엘드미아를 이기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5년으로는 부족할 거 같은데.
"참고로 지크프리트랑 싸울 땐 라이카도, 이거도 없었다."
"지크프리트가 누군데?"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셰릴의 질문에 엘드미아는 잠깐 자세를 풀며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셰릴은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용사."
...실제로도 그랬다.
◈
결국 셰릴은 단 한 번도 쓰러지는 일 없이 3분을 버텼다.
과연 학년 수석다운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심지어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한 것치고는 단조로운 직선 패턴의 바늘들을 금방 파악하더니 대바늘과 라이카에만 집중 대응하며 감을 잡고는 순식간에 적응하여 검을 휘둘렀다. 막바지에는 몇 번 보여 준 적도 없었던 한 손으로 폼멜 잡고 수평베기까지 흉내 내서 내 허를 찔렀으니 남들이 보기에도 기가 찼을 거다. 이게 천재의 감각인가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적응력이었다
솔직히 적당히 압박하며 억울하다는 느낌을 줘서 놀려 먹으려고 했었는데, 영 쉽지가 않더라고. 마지막에 라이카가 혼신의 몸통 박치기를 날려 장외패를 시키지 않았으면 3분을 넘겼겠지만, 어림도 없지. 나는 말한 건 지키는 남자다.
"훌륭하군."
모든 걸 말 한마디 없이 관람하던 뤼비스 교수의 평가는 실로 간결하지만 확실했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싸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나 대신 학생들의 잘못된 습관과 아쉬운 점들을 설명해주며 수업을 마무리 지었다.
"너무 잘난 맛에 빠져 살면 귀가 베이는 법이다. 항상 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다른 학년도 마찬가지로 수업을 진행할 예정이니 관심이 있다면 참관해도 좋다."
뉘앙스만으로도 이해하기 충분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엘프들의 격언을 듣고 의아해하는 학생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난 뒤,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정강이를 노리고 발차기를 시도하는 셰릴을 열심히 피해야 했다.
"어허. 대련에서 좀 졌다고 조교를 패려고 해? 이거 신분 남용이야."
"허튼소리 마라! 그 이상한 바늘은 또 뭐고 라이카는 정체가 뭐냐! 왜 나만 힘든 건데!"
"이제 슬슬 검술 외의 대응도 할 때가 됐지. 게다가 검술로만 했으면 쉬웠을 거 같냐? 네가 머리는 똑똑해도 몸은 아직 한참 멍청하거든?"
우리 둘의 공격과 회피를 장난으로 여겼는지 폴짝 폴짝 뛰며 사이에 끼어드는 라이카도 있다 보니 결국 피하는 것은 한계가 와서 틈을 봐 롱캣 셰릴로 진화시킨 뒤 멀찍이 든 채 한참을 서 있고 나서야 셰릴의 화가 가라앉았다.
"이게 다 장기적으로 널 위한 거라니까 그러네. 오가토르프 가문 사람이 인맥을 통해 평가를 높게 받았다는 모함을 받아서야 쓰겠니?"
"네가 안 그래도 난 이미 충분히 고평가를 받고 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인정하면 지는 것이었기에 난 열심히 그녀의 주장을 부정했다. 괜히 억울해 하는 거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가는 뒷감당이 안 될 게 뻔했으니까.
"아, 셰릴? 혹시 성광십자회 총본산에 대해 뭐 들은 거 있어?"
"갑자기?"
"물어보려고 했던건데 까먹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있다 보면 이런저런 가십거리를 좀 알지 않을까 싶어서 던진 질문이었다. 교단 정화같은 큼직한 사건들에 대한 디테일한 이야기는 일반인들에게 퍼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 롱캣 셰릴 상태로 씩씩 거리다가 잠깐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한 셰릴은 뭔가 떠올랐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제국 용사가 성광십자회 내부에 파고든 악마 처단을 위해 교도들과 손을 잡고 원정을 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덕분에 도시 꼴이 말이 아니라는 이야기까지는 들었는데, 벌써 한 일주일은 지난 이야기라서 경과까지는 잘 모르겠군. 그건 왜 물어봐?"
"용사한테 밑밥을 뿌려놓은 게 있어서 그 일을 처리 했으면 분명 자랑하러 올 텐데, 영 소식이 없더라고."
"...?"
뭐 심각한 문제가 터졌다면 에스뮈에라도 연락을 했겠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오랜 격언을 떠올리며 난 셰릴을 놀리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