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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70화 (270/412)

이세계의 귀족들은 보통 식사를 길게 한다.

평민들에게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영양 섭취의 영역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귀족들은 그렇게 평민들처럼 시간에 쪼들려 살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참으로 느긋하게 처먹는다. 맛있는 음식을 따뜻하게 그리고 오래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곧 귀족의 증거 중 하나라는 그럴싸하면서도 병신같은 논리로 인해 평균 식사 시간이 한 시간은 그냥 넘어가고, 그러다 보니 그 시간 동안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누는 편이다. 딱히 할 이야기가 없을 때도 그렇게 시간낭비를 한다는 점이 또 사람 화병으로 숨 넘어가게 만드는 점이지만... 아무튼 그렇다.

현대에서 15분이면 식사를 끝마치고 커피까지 땡기러 갔던 내 입장에서는 아무리 환생을 했다고 해도 익숙지 않은 문화였다. 물론 그건 건강에 좋지 않을 정도로 빨리 처먹는 거였으니 지금에 와서는 고친 식습관이지만 그래도 한 시간 넘게 먹는 건 여러모로 고역이다. 다른 오러 유저들과 마찬가지로 신진대사가 일반적이지 않은 탓에 오지게 먹는데도 30분 정도면 식사가 끝난다.

"아카데미의 가장 좋은 점은 식사를 쓸데없이 길게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야."

그리고 그건 셰릴도 마찬가지다.

얘도 저 조막만 한 몸에 대체 어떻게 그 많은 음식이 들어가는 건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많이 먹는 주제에 나처럼 긴 식사를 견디지 못하는 편에 속한다. 대체 뼛속부터 기사 혈통인 애가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었는데, 미각에 심각한 하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생기고나니 이것저것 맞물려가며 납득이 되기 시작했다.

명예와 절제를 미덕으로 삼는 기사들이 남들 눈치 안 보고 즐길 수 있는 몇 안되는 컨텐츠가 식도락인데 혓바닥이 저 모양이니 마음에 안 들 수밖에.

"그 좋은 기간이 2년 밖에 남지 않아서 아쉽겠네."

"...나는 식사를 목적으로 아카데미에 다니는 게 아니다."

잠깐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은 뒤 푸짐하게 쌓아 올린 음식들을 먹기 시작하는 우리를 두고 잠깐 주춤거린 그리윌스는 처음에는 우리의 페이스에 맞춰 식사를 하려고 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포기하고는 헛기침과 함께 말을 걸어왔다.

"오가토르프 양과 조교님의 친분이 매우 두터워 보이는군요."

딱히 음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면서 먹는 거에 욕심을 내는 라이카에게 살을 발라낸 닭고기를 던져 주며 잠깐 생각을 정리한 나는, 어떻게든 부드러운 분위기로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어하는 녀석의 노력을 높이 사서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용인과 고용인의 관계치고는 원만한 편이지."

셰릴의 부당한 폭력과 행동들을 나열해서 곤욕스럽게 만들고 싶은 욕구가 샘솟기도 했지만 이미 무뚝뚝한 컨셉을 잡기로 마음먹은 탓에 포기해야만 했다.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자연스럽게 애를 놀려 먹게 될 테니까.

"솔직히 신기합니다. 전 아무리 호의적으로 대해도 영 쌀쌀맞거든요."

"넌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 같아서 영 내키지 않아."

"항상 저렇습니다. 무기 상인의 자식으로서 기사 가문과 좋은 유대를 지니고 싶을 뿐인데 억울하기 그지없다니까요."

그리윌스는 난처하다는 듯이 웃어 보였지만... 솔직히 나도 검술을 보지 않았으면 뒤가 구린 흑막 정도로 여겼을 생김새라서 편을 들어주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렇다고 존재 자체가 흑막 실눈캐의 클리셰같은 네 외견과 행동이 문제라고 말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애가 아직 어려서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 생각해라."

"......"

도끼눈을 뜨는 셰릴과 고개를 내저으며 웃는 그리윌스의 반응을 애써 무시하며 태연한 척 둘러본 식당은 굉장히 활기가 넘쳤다. 요 며칠 동안 봐온 모습도 충분히 학생다운 활기가 가득했었는데 초호화 뷔페의 힘인지, 용사 등장의 힘인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텐션들이 올라가 있다.

"이건 뭐 축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인데."

"사실 축제가 맞지 않을까요? 한 교단을 뒤흔들 뻔했던 악마가 토벌되었고, 용사 일행이 영웅적인 귀환을 하고 있는데."

"...듣고 보니 그러네?"

인생 하루가 멀다 하고 너무 스펙타클하게만 지내서 그런가, 그리윌스가 말하기 전까지는 정말 밥 말고는 대수로울 게 없다는 느낌이었다.

"내 삶이 워낙 뒤틀려 있다 보니 별다른 감흥을 못 느꼈나보군."

"겪으신 게 많은...큽!"

따악! 하는 소리가 주변의 소란을 뚫고 들릴 정도로 식탁 아래에서 거하게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를 악물고 있는 그리윌스와 그를 노려보고 있는 셰릴이 있었고, 딱 봐도 얘가 뭔 짓을 한 건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그런 걸로 신경 쓰는 거 본 적 있냐? 애먼 애는 왜 때려."

"안 때렸다. 저 혼자 탁자에 부딪쳤나보지."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과도하게 뻔뻔한 셰릴을 보며 혀를 차는 사이 갑자기 주변이 두 배는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학생들이 우르르 식당 입구 쪽으로 움직였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셰릴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네가 왔던 첫날을 보는 거 같군."

흠. 그날도 이 지랄을 떨었단 말인가. 애들이 힘이 넘치긴 한가 보다라는 감상을 지니며 결코 뚫리지 않을 것 같은 입구의 인파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자동문 열리듯 빠른 속도로 학생들이 길을 트기 시작했다.

"용사님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냐 이것들아! 좀 정숙해라 정숙!"

누구더라, 순수 검술 과목 교수님이었던 거 같은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아무튼 굉장히 깐깐하게 생긴 얼굴과는 달리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검술 교수의 외침이 무색하게 학생들은 미친 듯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용사! 용사! 용사!"

아카데미의 넓은 식당이 울릴 정도로 우렁찬 외침에 지크프리트가 무슨 쇼맨쉽을 발휘했는지는 몰라도 뜬금없는 환호성이 울려 퍼진다. 나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감성이었지만 멀리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신난 학생들의 반응을 보고 있자 하니 뭔가 감회가 새로웠다.

나에겐 그냥 조금 안타까운 지크프리트일지 몰라도 저들에겐 살아 숨 쉬는 기적이자 희망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 광경을 바라보며 닭다리를 뜯고 있었더니, 그 광경을 같이 바라보던 셰릴이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질문을 던졌다.

"엘드미아, 용사는 강했나?"

셰릴에게는 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준지 오래다. 당시엔 내가 큰 어려움 없이 이겼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이 질문은 단순한 무력의 강약을 물어보는 게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적이든 외적이든 내가 해줄 수 있는 평가는 똑같았다.

"여러모로 미숙하지만... 강했지."

검술, 마법, 정령술까지 총 망라한 인류의 결전 병기가 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할지언정 지크프리트의 정신력은 꽤 강한 게 맞다. 강제로 끌려왔으면 충분히 삐뚤어질만도 한데 잘 버티잖아? 나였으면 마왕이고 뭐고 일단 신의 멱살을 잡을 방법부터 찾고 봤을 것이다.

"뭐, 열심히 하면 용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아직은 아니라는 건가?"

"적어도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땐 애가 좀 모자랐지."

아무런 가감 없이 진심을 담아 한 말에 그리윌스가 매우 착잡한 표정으로 나와 용사를 번갈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보지 마라. 사이가 나쁜 건..."

그 꼴이 꼭 친구 사이에 어중간하게 껴서 우연찮은 악담을 듣고 당황하는 모습같아서 오해가 없도록 부가 설명을 해줄 겸 입을 연 찰나.

"동생! 형님 왔다!"

저 멀리서 날 발견한 지크프리트가 굉장히 유쾌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지만, 정작 내 눈에 들어온 건 녀석의 손에 들린 악마의 부산물 뿐이었다.

"...아니니까."

작은 크기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보냈던 부산물보다 압도적으로 큰 것도 아니다.

"야! 보이냐! 이게 바로 성광십자회를 혼란에 빠뜨렸던 악마 새끼가 남긴 부산물이다!"

예기치 못한 지크프리트의 행보에 얼이 빠져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일제히 그가 들고 있는 부산물로 향했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마치 자신이 이겼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힘차게 달려올 뿐이다. 그 거리감 없고 예의 없는 태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벙쪘지만 나와 녀석에게 그딴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쟤는 애초부터 자신을 추켜세우는 주변에 관심이 없고, 난 지금 그런 주변의 반응보다 훨씬 중요한 기로에 서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내가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자 지크프리트가 눈치 빠르게 들고 있던 부산물을 던져 주었다. 탁, 하고 손에 잡히는 묵직하면서도 참으로 좆 같은 감각. 그 촉감은 여지없이 악마의 부산물이다.

하지만.

"...제가 보냈던 것보다 작지 않습니까?"

받아들자마자 확신이 섰다. 내가 얻었던 부산물과 별반 차이가 없다.

동시에 깨달았다. 이건 정치질을 먼저 시전하는 쪽이 이긴다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내 한 마디에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던 지크프리트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다.

"뭐? 아니, 아니지. 헛소리하지마 임마. 이리보고 저리봐도 그게 훨씬 크지!"

"악마랑 싸우다가 한쪽 눈이라도 다치신 겁니까? 원근감을 잃어 버리신 거 같은데."

빼도박도 못할 정도로 차이가 났다면 이 짧은 만남동안 온갖 놀림과 자랑질을 당해야 했겠지만, 직접 저울에 올려 두고 비교하는 게 아닌 이상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비슷한 크기였기에 지크프리트도 확신을 가지지 못 하는 게 분명하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시 녀석에게 악마의 부산물을 던져 주며 쐐기를 박기로 했다.

"아니꼬우시면 비교해 보시던가요."

"아니, 그거 마...! 제 1 황녀한테 줬잖아!"

"안 가져오신 겁니까? 아쉽네요. 분명 제가 보냈던 게 더 컸는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당황하는 그리윌스와 묘한 눈빛으로 나와 지크프리트를 훑어보는 셰릴의 시선 속에서 지크프리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쳤다.

"아!! 눈이 삐었냐고!"

그리고 나는 반박거리를 찾지 못해 혼자 빡쳐하는 지크프리트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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