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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71화 (271/412)

용사 지크프리트를 성대하게 환영하며 한창 축제와 다를 바 없는 분위기에 심취해 있던 학생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사실 상황 파악이라고 하기엔 많이 애처로운 행동이었다. 사고가 정지된 상태로 멀뚱히 서 있다가 눈을 비비고 다시 지크프리트와 엘드미아의 거리감없는 대화를 지켜보는 게 고작이었을 뿐이니까.

당장 눈 앞에 펼쳐진 기이한 광경에 정지된 머리가 돌아간 것은 지크프리트가 한참 동안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겨우 진정하게 된 다음이었다. 씩씩거리며 엘드미아가 미리 가져다 놓은 음식들을 뺏어먹기 시작하는 지크프리트를 보며 엘드미아가 태연하게 질문했다.

"가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정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뱉은 것치고는 일반적인 감각에서 굉장히 많이 어긋난 말이었다. 어디 관광 명소를 구경하고 온 사람도 아니고, 지크프리트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한 교단의 심층부에 타락의 위험을 몰고 온 강력한 악마와의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사람이었다.

악마는 누가 뭐라해도 악마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고블린조차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와중에 신의 뜻마저 거역하는 그 사악한 피조물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굳이 직접 두 눈으로 봐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실질적인 무력이 강한 악마부터 사악한 계략과 마법으로 혼란에 빠뜨리는 악마까지 단 하나도 만만하지 않다. 성광십자회 총본산에서의 전투가 어땠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분명 영웅적인 서사시 한 편을 써 내려가기에 충분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생사의 갈림길이 수없이 펼쳐졌을 게 분명한 고된 전투를 저렇게 가볍게 말하다니, 당장 한 대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의 망언이라 여긴 학생들의 얼굴이 급격히 굳은 것과 달리 뚱한 표정으로 닭고기를 씹어먹던 지크프리트가 정말로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씨발, 비교는 나중에 한다고 치고. 좋은 경험이긴 했다."

"제가 상대했던 악마는 사람들을 반강제로 기절시키는 재주가 있더군요. 신앙심이 깊을수록 쉽게 당할 수밖에 없는 공격이었습니다. 용사님 쪽은 어땠습니까?"

"지 잘난 맛에 더러운 촉수를 뻗어오는 정신 나간 새끼였지. 고위 악마일수록 인간형 육체에 집착한다는 말이 있던데, 그렇지 않은 놈치고 강했다고 하더라. 교단 측 사람들은 이름도 알던데 더럽게 길고 꾸불거리는 이름이라서 기억이 안 나네. 딱히 네가 말한 정신 공격같은 건 없었지만 물리적으로 귀찮았어."

마치 방금 전에 일을 끝내고 돌아와 복습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둘의 모습은 그들의 대화 내용만큼이나 이질적이었다. 슬금슬금 최대한 자연스럽게 지크프리트와 엘드미아의 주변으로 식판을 들고 움직이던 학생들 중 한 명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자신의 친구에게 조용히 물었다.

"악마 정도면... 인생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나...?"

그 작은 중얼거림을 주워들은 학생들은 말없이 동의했으나 정작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둘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첫 대면과 달리 본격적인 이야기는 매우 무미건조하게, 그리고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처럼 이어졌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누구 부산물이 더 컸는지를 두고 애처럼 티격태격했었는데 지금은 세상 더없이 진중한 얼굴로 정보를 교환하고 있으니 옆에서 보고 있는 셰릴과 그리윌스조차 정신이 없었다.

사이가 좋은 건지, 좋은 척을 하는 건지. 그도 아니면 사실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동생. 솔직히 형은 동생이 무슨 수로 그 악마를 잡았는지 더럽게 궁금해."

"그렇습니까."

"그런 밍밍한 반응으로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걸 동생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지 않아? 그 새끼 하나 잡겠다고 내 드래곤 슬레이어가 졸지에 성광십자회의 성검이 되어 버렸어. 축성 받기 전에는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아주 지좆대로 피하더만."

지크프리트가 허공에 손을 뻗자 공간이 갈라지며 거대한 몽둥이같은 손잡이가 튀어나왔다. 그의 손에 붙잡혀 공간에서 뽑혀 나온 것은 검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큰, 거대한 쇳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무식한 크기의 대검이었다. 과연 용을 벤다면 저 정도 크기는 돼야 할 것이다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는 무기를 마치 롱소드처럼 가볍게 다루며 식탁에 기대어 놓은 지크프리트는 여전히 주변 따위 신경 쓰지 않은 채 오직 엘드미아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동생이 유능한 건 이젠 너무나도 익숙하고 당연한 일이라 형도 어지간하면 안 놀라려고 했는데, 이번 건 좀 신기하더라. 교단에서 줬던 성물폭탄인지 뭔지도 안 쓰고 잡았다며?"

"그랬죠. 정확히는 못 쓴 거지만."

"무슨 수로?"

그저 덤덤히 사실만을 말한다는 태도로 대답했던 엘드미아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식사를 이어 나갈 뿐,  지크프리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1분, 2분이 지나도 그는 대답할 의사가 전혀 없는 사람처럼 식사만 하며 멀뚱히 지크프리트를 바라봤고, 식당을 가득 채운 어중간한 분위기를 깨고 만찬을 즐기며 조용히 둘의 이야기를 경청하려던 이들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제국의 용사 지크프리트는 개차반같은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용사다운 업적을 만들어나가는 것과 별개로 극단적인 독불장군이라는 게 주변의 일반적인 평가였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기준으로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 같은 저 남자의 기행은, 전부는 아닐지언정 어느 정도 퍼진 상태다.

그런데 하필 지금 그 맞은편에서 대답을 거부하며 멀뚱히 식사를 이어 나가고 있는 사람이 엘드미아다. 최근 이티스엘의 수도를 뒤흔든, 살아 숨 쉬는 태풍이자 단두대인 인물. 제 기준과 선이 너무나도 명백할 뿐만 아니라 그 확고한 기준을 굽히지 않아도 될 실력까지 겸비한 남자는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지크프리트와 상성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이미 제국에서 용사가 한 번 졌다고 하지 않았는가? 서로 고까워 하며 당장 이 자리에서 재대결을 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식사나 하십쇼."

문제는, 그럴 경우 이를 멈출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거였다.

"에이 씨. 진짜 이럴래?"

그렇기에 지크프리트가 투덜거렸을 때, 식당에 다시금 무거운 정막이 내려앉았다.

하다못해 엘드미아가 제국에 있었을 때처럼 기사 흉내를 내며 살가운 척이라도 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오해였으나 엘드미아는 주변을 위한 배려를 할 생각도, 유지하고 있는 컨셉을 깰 생각도 없었다.

"도움될 거였으면 진즉에 말했을 거라는 거 알잖습니까."

"대체 뭐길래 그렇게 꽁꽁 숨기고 있냐고. 되게 궁금하네."

"비장의 수는 원래 아무한테나 안 알려주는 겁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지크프리트는 궁금해 죽겠다는 듯 오만상을 썼지만 결국 더 물어보지 않았다.

엘드미아의 대답에 셰릴의 입꼬리가 꿈틀거리며 위로 올라가려는 것을 기묘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그리윌스는 두 사람의 대화가 적당히 마무리된 틈을 타 자연스럽게 말을 섞으며 들어왔다.

"에가 조교님의 딱딱한 태도는 학생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았나 보네요. 모처럼 같이 앉았는데 그래도 구면인 분께서 통성명 좀 시켜 주시는 게 어떨까요?"

주변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던 학생들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그리윌스의 용기에 감탄했다. 저 정도면 뻔뻔한 걸 넘어서서 용기있는 게 맞았다. 자신들이었으면 조심스럽게 식판을 들고 자리를 비켰을 텐데 오히려 한 발 내딛다니! 그리윌스의 웃는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던 지크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초면에 이런 말 하기 참 미안한데 너 참 흑막처럼 생겼구나. 누구니?"

"예? 어, 그, 그리윌스라고 합니다 용사님. 작은 상단의 후계로서 왕립 아카데미에서 배움을 얻는 중이죠."

"혹시 어느 상단인지는 비밀이니?"

"예?"

생전 처음 겪어보는 희한한 물음과 대화에 항상 웃는 낯이던 그리윌스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드는 것을 본 엘드미아가 먹던 빵을 찢어 지크프리트에게 던졌다.

그 무례하기 그지없는 행동에 조금은 풀리는 듯했던 분위기가 다시 얼어붙는 것 같아 구경하고 있던 이들이 숨소리조차 못낸 것과 달리 지크프리트는 자신에게 날아온 빵 조각을 가볍게 받아 내며 낄낄 거렸다.

"또 뭔 헛소립니까?"

"아, 그런 게 있어. 관상학적으로 볼 때 이런 친구가 사건의 흑막이라니까?"

"용사님보다 배는 성실한 친구에게 실없는 소리 그만하시고 그놈의 밥이나 쳐드십시오."

"오! 밥을 기억하네? 그나저나 성실하다고? 어떻게 알아?"

"수업 때문에 잠깐 대련했습니다. 검술만큼은 용사님도 보고 배워야 할 정도로 정석적이더군요. 다시 말하지만 용사님도 보고 배워야 할 정도로 말이죠."

"아, 진짜. 그 뒤로 나 검술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그제서야 학생들은 깨달았다. 자신들이 느끼고 있었던 압박감이 착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너무나도 먼 경지와 유명세를 지닌 두 인물에게서 인간적인 친분을 발견한 학생들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이제 적어도 불안감에 소화 불량에 걸릴 일은 없어진 듯 했다.

"자신감넘치는 모습이 보기 좋군요. 안 그래도 요즘 잘 안 움직여서 산책이나 할까 했는데, 식후 운동 겸 검술 대련이나 해볼까요."

"...아니, 그, 아직 막 그렇게 자랑스레 보여 줄 정도는 아니고..."

"용사님은 원래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웠으니 빼지 마십시오. 새삼 징그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대화를 당당하게 나누는 엘드미아의 태도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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