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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72화 (272/412)

지크프리트의 등장으로 안 그래도 정신없던 식사 시간이 한층 더 부산해진 끝에 겨우겨우 식사를 마친 나는 녀석을 데리고 대련장에 가기로 했다.

처음 보여줬던 기운 찬 등장이 무색하게 힘들다는 변명을 늘여놓는 지크프리트였으나, 식탁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라이카를 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두 눈을 빛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허미...쉽...펄...! 웰시 코기잖아!"

이세계에서는 뭐라고 부르는지 알 수 없어서 그냥 목동견이라고만 불렀는데 그딴 거 신경 안 쓰는 지크프리트는 전생의 용어를 말하며 연신 라이카를 쓰다듬기 바빴다.

[주, 주인. 부담스러워.]

셰릴이나 라그니스가 쓰다듬을 땐 세상 행복한 듯 받아들이던 녀석이 지크프리트의 손길은 부담스럽다니, 참으로 취향이 확고한 마견이다. 라이카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지크프리트를 적당히 제지하며 이동하는 사이 셰릴과 그리윌스도 은근슬쩍 따라오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아마도 우리의 대련에서 뭔가 얻을 요량인 거 같은데... 용사의 검술보다는 월등히 수준 높은 두 사람이 저러고 있으니 괜시리 부담된다.

"이런 귀여운 개를 키웠으면 제국에도 데려왔었어야지!"

"그땐 없었고, 이젠 마견이 되어 버렸지만 걔 엄연히 마검이었던 녀석입니다."

"...엉?"

그도 나처럼 마검 제작에 대한 지식은 없었던 모양인지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영 이해를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차피 대련장까지 가는 길에 딱히 할 것도 없어서 대충 초기의 마검이 어떤 형태로 제작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자 셰릴과 그리윌스는 대련에서 보여 준 라이카의 활약을 떠올리며 감탄했고, 지크프리트는 마검 제작자들의 터져버린 인성에 개탄했다. 그러고는 뭐가 그리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기가 막히게 본다니까. 남들이었으면 성능에 눈이 멀어 마검으로 뒀을 텐데, 동생은 그딴 건 거들떠보지도 않는구만?"

"피를 마셔야하는 흉흉한 물건보다는 귀여운 개가 낫죠."

"그렇지. 그딴 게 인신 공양이랑 다를 게 뭐야. 그럼 얜 이제 뭘 먹어? 일반적인 식사로 힘을 보충할 수 있나?"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서 다른 방법으로 대체 가능하게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제 피를 마실 일은 없죠."

지크프리트가 라이카에 눈이 멀어 자기도 마검 하나 가지겠다고 난리를 치는 일이 일어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는 그 정도로 납득하고 더 이상 라이카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동생도 참 다사다난하게 지내는구만? 악마에, 마검에 반역자 목까지 치고 이제는 전 궁정 마법사의 제자로 들어가서 아카데미 조교라? 진짜 바람 잘 날 없이 사네."

"단순한 목표 덕에 할 일이 명확하다 보니."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또 아니지. 좋은 여건 속에서도 갈피 못 잡는 사람들 많잖아?"

"용사님처럼요?"

"에이 씨. 나 정도면 그래도 양반이지."

"양반이 뭡니까?"

"그, 뭐시기냐. 나 정도면 잘하고 있다는 소리야."

하여간 이 인간이랑 대화하면 모르는 척하기도 빡세다. 별거 아닌 대화에서도 일일이 태클을 걸기 위해 신경이 바짝 서는 기분이지만...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런 행동들이 딱히 싫진 않다. 언젠가는 동향 사람이라는 걸 밝히고 이야기를 나눌 날이 올까? 예전에는 단순히 상황을 두고 보기 위해 숨겼지만, 이제는 내 뒷배가 마신 에파가 님이라서 말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허튼소리 말고 검술 보일 준비나 하십시오. 용사 씩이나 되는 분이 겨우 그 정도로 잘하고 있다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상황에 맞지 않은 잡생각이 몰려오는 것을 가볍게 밀어내며 난 다시 평소대로 지크프리트를 갈구며 대련장의 문을 열었다. 내가 쟤한테 가르칠 건 없을지라도 지크프리트의 습득 속도와 발전을 확인할 정도의 능력과 짬은 된다.

녀석의 성격상 안한 걸 했다고 거짓말하며 허세를 부릴 것 같지는 않지만, 확인해서 나쁠 게 없는 상황이라면 확인해 보는 게 맞겠지. 나는 대련장 한 켠에 마련되어 있는 목검을 들고 오려다가 지크프리트의 대검을 떠올리며 물었다.

"여긴 제국처럼 환영 마법의 보조를 받을 수 없는데, 혹시 그 공간 마법으로 목검도 들고 다닙니까?"

"쓰읍. 잠깐 기다려 봐."

아무래도 제국은 이미 완성된 환영 마법 시스템으로 인해 굳이 목검따위를 쓸 이유가 없는 모양이다. 잠깐 눈을 감은 채 뜬금없이 정신 승리 포즈를 취하며 집중하는 지크프리트를 내버려 둔 채 비어 있는 대련장을 적당히 정리하는 사이 옆으로 다가온 셰릴이 조용히 물었다.

"그, 엘드미아? 제국 용사도 나름대로의 일정이 있을 텐데 이렇게 막 데려와도 될까?"

"네가 아직 쟤를 몰라서 그래. 쟨 이미 홀로 식당에 온 것부터 일정을 걷어차고 온 게 분명하다."

"...?"

악마를 잡는 거까지는 그러려니 했겠지만 이런 공식적인 축하를 받으며 추켜세워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적당히 핑계 삼아 뛰쳐나왔겠지. 성광십자회 사람들과 지크프리트 옆에 찰떡처럼 붙어 다니던 삼총사가 보이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뭐, 저리 보여도 나름대로 선을 지키는 녀석이야.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공식적인 자리를 걷어차버리고 독단으로 움직이는 것부터 좀 신빙성이 떨어진다만..."

"공식적으로는 이티스엘이 아니라 왕립 아카데미 학장의 초대잖아. 그 정도는 걷어찰 수 있지."

"...그런 발상은 굉장히 너 같군."

셰릴의 지적은 정확했다.

언제나 사표 한 장을 품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당장 회사에 사표를 내고 뛰쳐나오지는 않는다. 그건 불법이라서가 아니라 사표를 낸 순간 삶과 직결된 온갖 문제들이 사방에서 찌르고 들어올 것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일 역시 마찬가지다. 왕국의 아카데미 학장 이름으로 온 초청을 씹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정말 대놓고 씹어 버리는 것은 왕도 하지 않는 일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권력을 지녔음에도 거절의 의사를 형식과 절차에 맞춰 전달하겠지. 이세계에서 아카데미 학장이란 위치는 그 정도 대우까지는 받을 자격이 있는 위치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다르다. 원치 않게 용사로 찍혀 끌려온 이세계 방문자는 '너희들이 선택한 용사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라는 뉘앙스를 풀풀 풍기며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권한을 행사한다. 두 번이나 부모님을 잃고 독기가 잔뜩 올라 일단 싹 다 조지기 위해 합법을 찾는 나와 근본적인 이유는 다를지언정, 그 행동으로 인해 일어날 온갖 불만들에 일말의 관심도 가지지 않는 태도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름 말이 통하는 거겠지.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괜찮은..."

그래도 사람이 나쁜 건 아니니 혹여 셰릴이 오해하기 전에 적당히 포장을 해주려고 했지만...

"찾았드아!"

해맑은 표정으로 소리치며 허공에 손짓하여 대검만한 목검을 꺼내 들고 쓸데없는 포즈를 잡는 지크프리트의 쪽팔린 존재감이 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괜찮은?"

"..지는 조금 두고 봐야 알 거 같다. 그래도 최소한 무해한 인간인 건 맞다."

내 싹 바뀐 반응에 작게 웃어 보인 셰릴이 대련장에서 내려가는 것과 동시에 지크프리트가 다가오며 외쳤다.

"보아라! 네게 영혼까지 털린 뒤 단련한 나의 검술을! 그리고 울부짖어라! 용사님의 끝없는 재능 앞에서!"

"하아... 좆같은 소리 그만하고 빨리 올라오십쇼."

재능이 없는 놈이 떠들면 우스갯소리로 여길텐데 진짜 있는 놈이 저러니 괜히 고깝다. 어째서인지 내 입에서 상소리가 나오면 텐션이 오르는 지크프리트와 함께 대련장에 올라 적당히 합을 나누며 검술을 살펴본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전까지는 적당히 눈치만 살피던 학생들이 하나둘씩 몰려오며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어때? 근본이 좀 생기지 않았냐?"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자신을 우러러보는 이들에겐 개뿔도 관심을 주지 않는 지크프리트가 자신 있게 말하며 상단 공격을 시도한다. 딱히 특별할 것 없이 대부분의 검술에서 기초로 통용되는 공격과 회수. 반격과 막기 동작이었으나, 롱소드 검술을 저 정신 나간 크기의 대검으로 거침없이 선보인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특별했다.

지크프리트의 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바람이 갈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쪼개진다 표현하고 싶은 소리가 난다. 눈으로 보이는 크기와 갈라진 바람을 통해 느껴지는 무게와는 상반되는 속도가 묘한 괴리감을 불러일으킨다.

"롱소드 검술은 직접 선택한 겁니까?"

"아니. 교수 하나가 추천하던데? 어차피 휘두르는데 문제 없지 않냐면서."

역시 제국 아카데미 교수직은 카드놀이로 따낸 게 아닌가 보다. 대검이기에 취할 수 없는 일부 동작들은 적절하게 다른 동작으로 바꿔가며 가르친 정체불명의 교수도 대단하지만 그걸 또 이렇게 배운 지크프리트도 확실히 범상치 않았다.

그렇게 5분 정도 대련을 이어 나가며 자세를 조금씩 교정하고 확인한 끝에 나는 상당히 유의미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용사님의 습득력은 일종의 축복인 거 같습니다."

"...엥? 그게 뭔 소리야?"

"말 그대로입니다. 천재라서 빨리 배우는 게 아니라 반복숙달이 굉장히 빠를 뿐입니다. 참 희한한 감각이네요."

남들이 스무 번은 연습해서 어중간하게 습득할 기술을 세 번 정도면 그럴싸하게 습득할 수 있는 수준의 학습력. 제국에서의 경험과 비교해 살펴본 결과 거의 분명했다.

"지난 대련과 비교해 보니 알 거 같습니다. 불필요한 동작과 습관이라는 건 이렇게 단기간에 싹 다 쳐낼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마저도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그게 천재인 거 아닐까?"

"아뇨. 천재 상대해 봐서 압니다. 용사님은 숙달이 부족한 동작과 연계되는 모든 행동들이 부족합니다. 하단 방어랑 중단 횡 베기. 연습 대충했잖습니까."

"씨벌...? 그게 보여?"

진심으로 감탄하는 지크프리트의 모습은 참으로 볼 만했으나, 다른 동작들과 너무 확연하게 차이가 나서 부각된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 대련에서 내가 교정한 점을 지크프리트가 반복하면서 더욱 확실해졌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마치 시행착오 과정 몇 단계를 훅훅 건너뛰는 느낌으로 점차 완성되어가는 동작은 보는 이의 기분을 참으로 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제가 잘나서 보이는 게 아니라, 그만큼 연습량이 많은 동작들과 그렇지 않은 동작의 완성도가 차이 나는 겁니다. 천재는 그딴 거 없습니다. 하나 알려주면 바로 고치고 개선점마저 찾아내려고 하죠."

"그거 혹시 동생 스스로 얼굴에 금칠하는 이야기야?"

"쟤 이야기하는 겁니다. 쟤."

적당히 목검으로 셰릴을 가르키자 구경꾼들과 지크프리트의 시선이 전부 쏠렸다. 이 정도면 당황할 법도 한데 저 스스로 천재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자신감의 소유자답게 셰릴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확실한 건, 단순히 천부적인 재능을 쥐어 준 것보다는 성능이 확실한 축복이라는 거였다. 지크프리트가 노력만 한다면 졸업전까지 아카데미의 모든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소리였으니까.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말이지. 확실히 용사는 용사인가 보다.

"어쩐지... 요상하게 공부가 쉽더라니..."

뒤늦은 깨달음에 얼이 빠져 버린 얼굴은 용사답지 않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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