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몇 차례 더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지크프리트의 검술은 눈에 띄게 안정되어갔다.
대체 무슨 감각인지 궁금해서 물어봐도 본인도 딱히 뭐라 설명하기 힘든 모양이다. 그냥 처음에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하다 보면 점차 이게 맞는 거 같다는 느낌이 든다나?
"참 신기하네요. 그래도 아직 용사님한테 질 거 같진 않아서 다행입니다."
"뭐 임마? 안 되겠다. 칼 꺼내! 다시 해!"
"전 약... 흠, 아니군요. 한번 해 보는 게 좋겠네요."
이번에도 너 게임 존나 못하잖아를 시전하려 했는데, 지리멸렬하던 검술이 이 정도면 정령술과 마법은 더 나아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수락하기로 했다. 사실 강해진 지크프리트와의 대련은 나에게도 이득이니까.
"근데 이렇게 막 아무 데서나 전투력을 내비쳐도 괜찮습니까? 제국에서 뭐라고 안 해요?"
"당연히 하겠지?"
너무나도 뻔뻔한 표정으로 즉답하는 지크프리트의 반응에, 나는 굳이 반문하는 대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지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뭐. 서로 목검을 내려 두고 자연스럽게 진검을 뽑아 들며 준비에 들어가니 구경하던 학생들이 한층 더 술렁이기 시작한다.
"아, 나중에 핑계댈 수 있으니 미리 말씀드리는데 저도 이젠 검술말고 다른 것도 씁니다?"
"오? 뭔가 신기술이라도 익히셨나? 마법?"
"정확히는 마도구죠."
케이프를 벗어 내려놓으려고 하자 자연스럽게 다가와서 들어 주는 셰릴에게 고맙다고 한 뒤, 나는 심호흡을 하고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어서 바늘 하나를 뽑아 보였다.
"이런 씨발 세상에나?"
아니나 다를까 지크프리트가 두 눈을 부릅 뜨며 내 옆에 떠 다니는 바늘을 보고 경악했다. 그래, 너도 트루 파더의 무기를 알고 있구나.
"동생... 메리 포핀스가 되어 버린거야...?"
이 씨발 표정 관리! 표정 관리!
"...그건 또 뭡니까?"
예상치 못한 공격에 빵 터지려는 걸 표정을 구기는 걸로 무마하며 겨우겨우 숨겼다. 옘병. 엘두 우돈타라던가 엘두미아같은 드립까지는 예상했지만 두 단계나 건너뛰고 저딴 소리를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 내 질문에 지크프리트가 여전히 떠다니는 바늘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아, 있어. 존나 멋진 진정한 남자를 가리키는 명칭이지."
이 새끼가?
"그런 것치고 여자 이름 같은데요? 저 속여먹으려는 거 아닙니까?"
"아, 아니야! 무슨 소리야! 내가 동생을 왜 속여? 섭섭하게 왜 그래?"
저, 저 진정한 마법사는 못 될 놈 같으니. 거짓말을 하다니. 정곡을 찔리자마자 당황하는 지크프리트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잊지 않으며 난 대련장으로 올라오려는 라이카를 막았다. 라이카는 어디까지나 아무 부담 없이 나보다 약한 애들을 상대할 때나 싸우게 하는 거지, 비등하거나 강한 상대하고 싸울 땐 다칠까 봐 걱정돼서 안 된다.
"햐, 보면 볼수록 신기하네. 그 마도구 이름이 뭐야?"
"그냥 바늘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러지 말고 야카 화살이라고 짓는 게 어때?"
"뭣 하러 그리 쓸데없이 부르기 힘들게 만듭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준비나 하십쇼."
낄낄 거리면서도 '인생 진짜 존나 신기하네.' 라고 중얼거리는 지크프리트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게 만드는군.
"에, 에가 조교님? 적당히 하고 끝내려고 목검을 쓴 거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준비를 마치고 마주하는 사이 뒤늦게 그리윌스가 다가와서 매우 당혹스럽다는 듯이 이야기를 꺼내자 지크프리트가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목검은 배우는 거지만 진검은 싸우는 거잖아."
"예? 그게 대체 무슨..."
"아, 검술만으로는 아직 못 이긴다고. 근데 쪽팔리게 진검 써가며 배울 수 없잖아."
이번만큼은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린 거라 할 말이 없었는데 의도치 않게 지크프리트가 커버를 쳐주는 꼴이 되어 버렸군. 난 감사한 마음을 담아 지크프리트에게 화답했다.
"저번에 쓸 수 있는 거 다 쓰고도 검술 하나에 졌잖습니까."
"내 오늘은 꼭 이긴다 씨발!"
그리고 내 정겨운 화답을 신호 삼아 지크프리트가 주저 없이 파고들어왔다. 마냥 단순한 육탄 돌격으로 그치지 않고 네 걸음을 떼자마자 정령이 바람을 일으키며 전투에서 정령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 서럽게 만드는 광경을 연출한다. 하지만 가속을 위한 것은 아닌지 몸에 바람을 두른 뒤에도 나에게 달려드는 지크프리트의 속도는 딱히 빨라지지 않았다.
지난번에 겪었던 바람 칼날과는 다른 느낌. 투사체인 바늘을 막기 위한 보호막 같은 것일까? 어쩌면 석궁 정도의 위력이라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너무 만만하게 보셨구만."
-피익!
바늘이 회전한다.
지크프리트의 주의는 이미 충분히 바늘로 향해 있었지만 짧은 순간에 충분히 위협을 느낄 수 있도록 평소보다 더 많이, 더 빠르게 회전시켰다. 그렇게 귓가에서 바늘이 대기를 할퀴며 내는 소리가 커지고 지크프리트의 미간이 이변을 눈치채고 찡그려지는 순간에 맞춰 낼 수 있는 최대 출력으로 바늘을 사출했다.
목표는 지크프리트의 왼쪽 귓가에서 반 뼘 옆. 녀석은 반사적으로 피할 때 오른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으니 설령 반응이 늦더라도 다칠 위험이 적은 가장 안정적인 위협 포인트였다.
-파앙!
바로 귓가에서 터졌으면 나도 피해를 입었을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쏘아진 바늘에 반응한 지크프리트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검으로 머리를 보호함과 동시에 오른쪽으로 아주 살짝 몸을 기울였다. 바늘의 경로가 완전히 보였다면 대검으로 막았을리 없으니 확실히 속도만큼은 그의 예상과 동체시력을 상회한 듯 싶었다.
판단은 좋았지만 악수였다. 차라리 몸만 피했어야지. 그대로 뒀다면 허공을 갈랐을 바늘이 지크프리트의 대검과 충동하며 망치로 쇳덩이를 후려친 것 같은 굉음을 자아냈다.
"미친 씨발?!"
바람 장벽으로도 늦추지 못한 바늘의 위력은 실로 굉장했다. 작정하고 대검의 면을 팔뚝으로 바치고 있던 지크프리트의 상체가 왼쪽으로 틀어지며 명백한 빈틈이 만들어진다.
당연히 바늘을 쏨과 동시에 이미 몸을 움직인 나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지크프리트의 오른쪽 겨드랑이를 향해 올려 베기를 시도했다. 몸이 틀어진 와중에도 시선은 똑바로 내게 향한 지크프리트가 미간을 찡그리며 외쳤다.
"역행하는 번개여!"
고민할 필요도 없이 마법을 위한 주문이었으나 반응할 수 없었다. 내가 반응하는 것보다 빠르게 바닥에서부터 치솟은 번개가 내 검과 지크프리트의 대검을 타고 흐르며 짜릿한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짜릿하지 동생?"
"영 좋지 않은데요. 아무런 조짐도 없었는데 어떻게?"
귓구멍에서부터 우우웅! 거리는 듯한 충격에 놀라 뒤로 물러났지만 전격에 피해를 입은 지크프리트도 피차 마찬가지였다. 저릿거리는 두 손을 쥐었다 피며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 지크프리트가 자세를 고쳐잡으며 말했다.
"사전에 미리 간단한 공격 주문을 충전해 놓는 기술이지. 이래 봬도 내가 만들었다고. 배터리라고 이름 지었지."
"더럽게 효과 좋군요."
농담이 아니라 마력시로 보고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허공에 갑자기 마법이 소환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제국에서 겪어 봤던 세이렌인가 뭔가한 정신 나간 창쟁이보다도 빠른 속도로 구현되는 마법이라니. 심지어 그걸 지크프리트가 만들었다고? 전장의 침식마법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에 일조할지도 모르는 수준이라고 생각되는데?
"아직 개선이 필요해서 제약이 꽤 많은 편이지만 이렇게 써먹을 수준은 돼. 어때, 형님의 발전이 느껴져?"
"발전이 느껴짐과 동시에 여전한 것도 보이는군요. 다른 주문도 있었지만 가장 빨리 발동할 수 있는 게 방금의 전격 마법이었고, 나머지는 그렇지 못하다는 걸 알려 줘서 고맙습니다."
"...젠장. 이래서 눈치 빠른 녀석은 싫다니까."
정령술은 큰 변화가 없는 거 같고, 마법은 주문 영창의 페널티를 극단적으로 줄이는 형태로 훈련했으며 검술은 아직 그리윌스 미만이지만 신체 능력은 예카트리나 급이라. 누가 용사 아니랄까봐 아주 가지가지 한다.
"항상 느끼지만 용사님은 장기전으로 가면 참 귀찮은 상대입니다."
"...칭찬이지?"
"글쎄요. 아무튼 그래서 단기결전으로 가렵니다."
투사체로부터의 가호마저 뚫어 버리고 갑옷 입은 사람을 관통하는 위력의 바늘을 막아 놓고도 조금 흠집이 생긴 게 고작인 대검은 가히 축성받은 성검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저렇게 튼튼하면 버티지 않을까? 저 괘씸한 재능충. 아니, 용사충을 보니 나도 쓸 수 있는 건 다 써 보고 싶어졌다.
"검 잘려도 뭐라 하지 마십쇼."
"뭐?"
아아, 손끝을 타고 흘러나아간 마력이 검에 코팅되는 이 서늘하고도 묵직한 감각.
광검光劍 엘드미아로 돌아갈 시간이다.
"허, 이걸 무슨 수로 자른다고..."
지크프리트가 성실하게도 내 말에 반응하는 사이 이중 가속으로 치고 들어가며 검을 휘둘렀다. 좌측 하단에서 시작된 대각선 베기를 막기 위해 지크프리트가 검을 앞으로 뻗은 그 짧은 찰나의 순간 속에서 나는 검의 불규칙한 가속을 위해 응용한 마력이 아직 구축중인 마력 기관을 타고 빠르게 흘러가는걸 느꼈다.
지금까지는 느껴보지 못했던, 혈관에 들어간 항생제가 혈류를 타고 흐르는 듯한 느낌에 한 번. 동시에 원래 근육에 느껴졌어야 하는 알싸한 부담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점에 또 한 번.
마지막으로 훨씬 적은 마력으로 더 빠르게 휘둘러지는 검에 놀라는 것과 동시에 내 검이 지크프리트의 대검을 올려 벴다.
-카가가각!
그리고 강렬한 절삭음과 함께 글라인더에 닿은 것처럼 순식간에 불티가 터진 끝에.
"...씨발?"
지크프리트의 대검은 대/검이 되어버렸다.
무기의 이점을 살려서 우선 검부터 찔러 넣어 공격을 막은 뒤 파고들 생각이었던 지크프리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세마저 푼 채 자신의 잘린 대검을 들어 보였다.
"미친 씨발!"
작정하고 하긴 했지만 솔직히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잘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난 그저 멋쩍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뭘 실실 쪼개는데! 씨발 성검이 부러진 룬검으로 변해 버렸다고!!"
"하하하하."
이거 참, 오늘 지크프리트 억장 무너지는 일이 많이 일어나는군.
즐거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