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곱게 식당으로 가겠다고 하고선 대체 또 어디로 간 거람."
이티스엘 왕립 아카데미 학장과의 공식적인 만남을 끝마치고 나오자마자 지크프리트부터 찾아나선 제국의 제 4황녀 에셀루아 비스팀 텔 누아는 지크프리트와 엘드미아가 자리를 떠난 뒤 엄청나게 소란스러워진 식당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간단하게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지크프리트가 없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광란의 도가니 속에서 그가 어디로 향했는지 알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루아. 알아냈어. 엘드미아 님이랑 같이 대련장으로 갔대."
가장 빨리 정보를 주워 온 것은 엔티레 하얄로이였다. 어지간하면 사람에게 존칭을 붙이는 일이 없는 이 자존심 강한 엘프가 꼬박꼬박 엘드미아에게만큼은 존칭을 붙이는 모습이 여전히 신기했으나, 당장은 지크프리트가 향한 장소에 더 신경이 쓰였다.
"대련장? 그렇게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실력 보이는 건 자제하라고 들었으면서 또..."
"에스뮈에 황녀가 하는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잖아."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엔티레의 말을 마냥 부정할 수도 없었다. 묘하게 에스뮈에가 화내는 걸 즐긴다고 해야 할까, 에셀루아로서는 안 그래도 업무 과다인 언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으나 대외적인 관계만 알고 있는 지크프리트는 에스뮈에가 힘들든 화를 내든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경향이 강했다.
빨리 기정사실이라도 만들어서 황실의 비밀을 공유해야 에스뮈에의 한숨이 줄어들지 않을까 고민하면서도 일단 학생들 사이에서 어버버 거리고 있던 테네아시를 데려온 에셀루아는 일행들과 함께 대련장을 찾아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자유분방한 지크프리트의 태도에 딱히 화가 나지는 않았다. 이번 전투가 결코 쉬운 게 아니었음에도 그는 용사답게 최선을 다해 결과를 내놓았다. 못해도 쉴 때는 확실히 쉬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종종 보여주는, 마치 딴 세상에서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자유분방함 때문에 눈에 두지 않으면 영 불안했다.
사고를 치더라도 보이는 곳에서 쳐야 수습이 가능한 법. 수습할 시기를 놓쳐서 괜히 지크프리트에게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어야 했다. 물론 스스로 자처한 일이긴 하겠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연심이 죄지.
그렇게 중간중간 길을 물어 도착한 대련장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들이 마주한 것은 지크프리트의 외침이었다.
"뭘 실실 쪼개는데! 씨발 성검이 부러진 룬검으로 변해 버렸다고!!"
굳이 술렁이는 대련장을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지크프리트가 드래곤 슬레이어라 이름 붙인 대검이 반 토막이 나 있는 걸 발견한 에셀루아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
이번만큼은 이유있는 지크프리트의 지랄은,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지크프리트의 연인들 중 선두에 서 있는 에셀루아 황녀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면서 사그라들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엘드미아. 마지막으로 뵌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명성이 더욱 높아지셨더군요."
여전히 나만 보면 경직되어 버리는 엘프 엔티레와 지크프리트의 성검을 보며 하와와 거리고 있는 성녀와 달리 에셀루아는 귀족다운 침착함을 보여줬다. 나는 그녀의 인사에 화답하고자 검을 집어넣으며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에셀루아 비스팀..."
"뭐야? 칼 왜 넣어? 동생? 아직 안 끝났어. 동생?"
"...텔 누아 제 4황녀님. 괜찮으시다면 잠시 용사 지크프리트님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어도?"
"후우, 그래주세요."
"감사합니다."
애초에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대련을 하는 걸 원치 않아한 탓일까. 에셀루아의 얼굴에 묘한 체념이 일렁이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부러진 날붙이와 검을 들고 좌절하는 지크프리트에게 말했다.
"거 애처럼 떼쓰지 말고 좀 받아들이십쇼. 처음 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최대한 뻔뻔하고 당당하게 말이다. 당연하게도 지크프리트는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마치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는 듯 양손에 들린 대검이었던 것들을 내밀어보였지만 내 태도가 변할 일은 없었다.
"보는 눈이 많은데 궁상 그만 떠시고 일어나시지요. 황녀님이 오신 걸 보아하니 공적인 만남도 마무리 지어진 거 같은데, 같이 가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씨이바아알. 내가 미쳤지. 저 속이 시커먼 놈하고 왜 또 맞붙어가지고오오."
그러면서도 밍기적거리며 일어나 에셀루아에게 가는 꼴이 우습다. 여전히 주변의 시선은 개뿔도 신경 쓰지 않는 채 온갖 진상은 다 부리는 모습에 학생들이 적잖이 벙쪄있는 사이 셰릴에게 케이프를 받아 걸친 나는 지크프리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싸구려 검에 축성을 발라봤자 싸구려 성검밖에 더 됩니까? 애당초 제국 신성회의 용사가 성광십자회의 축성을 들고 다니는 것도 모양 빠지잖습니까. 검 바꿀 때가 됐다고 생각하십쇼."
"와, 내용만 놓고 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그럴싸한데 검을 반갈죽 시켜 놓은 당사자가 그 말을 하니 어이가 없네?"
내용은 또 맞다는 걸 보면 그 대검은 그다지 좋은 검이 아니었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제국에서 지크프리트의 장비에 소홀히 할 리는 없고, 저건 용사로 점지되기 전에 지가 따로 주문 제작한 건가? 퍽 궁금한 내용이었지만 당장은 중요하지 않으니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물어보기로 하고 일단은 지크프리트의 기분을 풀어 줄 만한 감언이설을 떠들기로 했다.
"반갈죽이 뭔진 모르겠지만 뉘앙스만 봐도 무슨 소리인지 알겠군요. 어차피 초대받은 이상 어느 정도는 체류했다가 돌아가실 거 아닙니까. 제가 아는 드워프 장인이 있으니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드워프 장인?"
"네. 장인 발쿤이라고, 이티스엘에서는 저 먼 시골 동네의 대장장이마저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오그웬은 원래 시골 동네였고, 거기의 대장장이는 얀스니까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실제로 목격한 팩트지. 내 말에 울상을 짓고 있던 지크프리트의 얼굴이 펴지더니 금세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질문을 던져 왔다.
"그, 혹시 마법검도 만들 줄 아시나?"
"관심이 없어서 못 여쭤봤습니다. 근데 협업하는 마법사도 있으니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 마법사도 유명해?"
"유명하죠. 황금의 마법사라고. 제 검도, 바늘도 그분을 통해 얻은 겁니다."
받은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발쿤 씨! 손님 하나 물고 뵈러 가겠습니다!
내 설명에 지크프리트는 일말의 아쉬움도 남지 않았다는 듯 대검이었던 것을 공간 마법에 수납하며 내게 어깨동무를 시도했고, 구경하던 학생들은 마치 전설의 무구를 만들 줄 아는 이의 이름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발쿤의 이름을 되내이며 감탄했다. 아예 새로운 이름을 들어 봤다는 반응이 아니라 대부분 '과연 발쿤이다.' 라는 반응인 것을 보면 내가 긴 씨 덕에 얻게 된 인연은 생각보다 엄청난 것이 맞았나 보다.
"으하하하! 역시 동생이야! 당장 갈까?"
"흐음, 저 해야 하는 연구가 있는데..."
"동생이 내 칼 짤라먹지만 않았어도 이럴 일 없잖아. 당장 가자."
흠. 맞는 말이긴 하지. 아무래도 오늘은 지크프리트에게 좀 더 시간을 할애해야만 할 거 같다.
"별수 없군요. 그럼 잠깐 교수실만 들렸다가 가죠. 난방을 켜두고 왔거든요. 셰릴? 수업 남은 거 없으면 너도 같이 갈래?"
"정문에서 기다려라. 외출증을 받아 오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후다닥 움직이는 셰릴과 나를 번갈아 가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인 그리윌스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자연스럽게 학생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흠, 상인의 자식이라고 했으니 나름 인맥 욕심이 날 텐데도 낄끼빠빠를 제대로 할 줄 알다니. 대성할 친구로군.
"...동생? 저 셰릴이라는 친구하고 친하게 지냈나봐?"
그렇게 그리윌스에 대한 평가를 상승시키는 사이 갑자기 지크프리트가 진중한 태도로 물었다.
"일단은 전속 집사라는 형태로 일 했었으니까요. 이래저래 동생처럼 돌보긴 했죠."
"돌봤어?"
"태도만 딱딱하지 하는 행동은 완전 왈가닥입니다. 장소 구분을 잘해서 티가 안날 뿐이지 가문에서는 얼마나 극성이었는데요."
내 대답에 쓰읍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지크프리트의 반응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괜히 불안감을 조성한다. 뭐야, 왜 또 그래 형.
"쓰으읍. 아닌가?"
"...형님? 아니죠?"
"이번엔 잘 모르겠다. 반응이 동생처럼 딱딱하다 보니 쉽게 구분이 안 가네? 남매 아니지?"
"오가토르프 가문 소가주라니까 뭔 미친 소리를 하는 겁니까."
"묘하게 태도나 행동이 비슷해서 그래 임마. 몇 년 같이 지내서 그런 건가?"
아니 어째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는데 보는 사람들마다 평가가 저러지?
괘씸하네.
"지크? 우리는 엘드미아가 볼일을 마치고 오기 전까지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내가 지크프리트에게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웃는 얼굴로 다가온 에셀루아의 말에 세상 심각하게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던 지크프리트가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걸치고 있던 손을 내리며 꼬리내린 개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제국이 지랄하는 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제 여자 앞에서는 한없이 겸손해지는 모습에서 뭔가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끼며, 나는 교수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