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크프리트와 그의 일행들과는 아카데미 정문에서 다시 합류하기로 하고 교수실로 돌아온 나는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한기에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했다.
“스승님?”
[아무도 없어!]
혹시나 싶어서 불러봤지만 라이카의 확인 사살처럼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켜두고 간 기억은 확실했기에 의아함을 느끼며 난로를 확인하자 여전히 낮은 온도로 잡혀 있는 레버가 눈에 들어온다. 덕분에 어이없는 기분 속에서 난로 내부를 살펴본 나는 미간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오자마자 채워 넣은 마석이 다 떨어졌다고?”
분명 마나를 머금고 은은하게 빛나고 있어야 할 마석들이 하나같이 평범한 돌덩이처럼 아무런 빛도 내지 못 하는 광경은 어이없음을 넘어 분노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이 씨발 이게 얼마 짜린데 이딴 불량품을 섞어 팔...
“아니,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불량품 한두 개면 모를까 뭉텅이로 이 지랄을 치는 게 말이 되나?”
만약 그렇다면 왕립 아카데미 납품 비리로 대서특필되고도 남을 사건이 될 것이다.
사실 난로가 고장 나서 어딘가 새는 게 아닐까 싶어서 남아 있는 마석을 집어넣었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멀쩡하게 돌아가기 시작하는 난로였다. 마력시로 보아도 딱히 어디 하자가 있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난로 탓은 아닌 듯했다.
"나중에 검사 좀 받아봐야겠군."
혹시나 스승님이나 세네란이 돌아왔을 때를 대비해서 유의 사항을 적어 메모 게시판에 붙여놓고 밖으로 나와 문단속을 한 뒤 정문으로 향하는데, 건물 전체가 평소보다 유독 소란스럽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 씨발! 내가 마도 분리기 끄지 말랬잖아!"
"뭔 소리야 그거 아무도 안 건드렸는데?"
"어라? 등이 나갔나? 조교야. 마석 좀 가져와라."
"누가 또 실험하다가 뭐 실수라도 한 거 아니야? 켜 놓았던 마도구가 싹 다 맛이 갔는데?"
"아아아악! 실험 결과 아직 다 못 적었는데!!"
대부분 조교나 연구원이라면 꿈에라도 나올까 두려워할 만한 내용들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건물 전체의 마나에 이상이 생긴 모양이었다. 졸지에 마석 중독자들의 폭력성 실험장이 되어 버린 건물을 벗어날 때쯤에는 난로 하나로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태는 심각해 보였다.
"진짜 누가 실험하다가 실수한 거면 난리나겠구만."
물론 내 일이 아니었기에 절망과 절규가 울려 퍼지는 건물을 뒤로하는 내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다. 그렇게 서둘러 정문에 도착하니 이미 지크프리드 일행과 셰릴이 채비를 마치고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드미아. 교수동은 괜찮나? 다른 곳은 갑자기 마나 공급에 문제가 생겼는지 소란스럽던데."
미쳤다 미쳤어. 학생동이나 다른 곳도 상황은 교수동과 다를 바 없는건가? 대형 사고구만 아주.
"아니. 안 그래도 다들 비명 지르고 난리었어. 다른 곳도 그래?"
"그렇더군. 덕분에 외출증 받는데 차질이 생길 뻔 했다."
성광십자회에 제국 용사까지 왔는데 아주 제대로 개쪽을 당하겠군. 심각한 상황임에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기껏 손님까지 초대한 날에 이런 대형 사고가 터지다니, 학장이 아주 난처하겠군."
"뭐,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는 거지. 그보다 검이야 검!"
길도 모르는 주제에 기대감에 가득 차 선두에 서려는 지크프리트는 세상 신나 보인다. 얘가 정말 아까 에셀루아한테 끌려가서 한 소리 들은 놈이 맞나 싶어 슬쩍 눈치를 봤는데, 어째서인지 에셀루아도 그런 지크프리트의 모습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뭐지? 그냥 진짜 다른 이야기할 게 있어서 부른 건가?
"동생! 길 알려 줘야지!"
"예. 갑니다."
뭐, 분위기가 이상하지만 않다면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
제국과 비교하면 정말 볼 거 없는 수도였음에도 드워프 지구로 향하는 동안 지크프리트는 참으로 징하게 이곳저곳 쏘다니며 구경했다. 오히려 이런 게 더 보는 맛이 있다나? 어쨌든 그렇게 지크프리트가 구경에 심취해 있는 동안 나도 발쿤 씨에게 선물로 줄 술을 살 수 있었으니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꽤 빙 돌아서 도착한 발쿤 씨가 일하는 무구점은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장비를 구하기 위해 북적이고 있었다. 그 광경에 난 좀 질려 했고, 지크프리트는 감탄했다.
"햐, 대단하구만. 이게 장인의 힘인가?"
"글쎄요. 어째 지난번보다 더 많아진 거 같은데...?"
날이 갈수록 사업이 번창하는 건가. 내 입장에서야 지크프리트에게 호언장담을 한 게 있으니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많아도 너무 많다. 이래서는 발쿤 씨를 만날 수나 있을까 걱정이 앞서던 순간 익숙한 얼굴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손님! 안 그래도 언제 오실까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아, 또 뵙네요. 그런데 절 기다렸다구요?"
내가 올 때마다 우연히 접객을 해왔던 여종업원은 해맑은 미소와 함께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들어가시죠!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서 들을 수 있을 거랍니다!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눴다간 상황이 복잡해질 테니까요!"
상황이 복잡해질거라면서 왜 저렇게 신나하는 것인지는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아무튼 내 걱정과는 다르게 만남이 성사되었으니 그냥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가기로 했다.
"이열, 아주 VVIP고객이신데?"
"또 무슨 알 수 없는 용어를..."
지크프리트의 발언에 평소처럼 딴지를 걸었지만 속으로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사간 물건이라고는 발쿤 씨의 취미생활로 인해 헐값과 다를 바 없는 가격에 구입한 개쩌는 검과 개쩌는 수제 투척 무기 뿐인데 어째서?
"아! 엘드미아! 오랜만에 왔구만!"
이제는 익숙한 통로를 지나 대장간에 들어서자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발쿤 씨가 반갑게 맞이해줬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간 일이 바빠 얼굴도 비출 틈이 없었네요. 지난번에 만들어 주신 마도구는 아주 유용하게 잘 쓰고 있습니다. 약소하게나마 선물을 가져 왔으니 나중에 도제분들과 나눠드시죠."
"허어, 올 때마다 이런걸 가져오다니. 우리 애들 버릇 나빠져! 하지만 잘 받겠네!"
껄껄 웃으며 굵직한 손으로 우선 악수부터 건넨 발쿤 씨가 선물로 사 온 술병들을 받아들면서 더욱 밝게 웃어 보였다. 지난번보다 값이 더 나가는 술들이었지만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자네 덕에 요즘 엄청 호황이라서 오히려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했는데 이렇게 받기만 하는구만!"
"...저요?"
"그래! 자네가 여기 들려서 무기를 사 갔다는 소문이 퍼지더니 손님이 엄청 늘었다네! 예전엔 내 이름에 지레 겁먹고 얼씬조차 못하던 일부 모험가들도 억지로 돈을 모아 하나 장만할 정도야!"
아무리 발쿤 씨가 메인이라고는 하지만 대장장이가 그만 있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다양하게 구비가 되어 있는데, 그놈의 이름값 때문에 심리적인 거리감이 있어서 가성비가 좋은 장비들이 많은데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발쿤 씨의 설명이었다.
"옛날 생각이 나더군! 코흘리개 꼬맹이가 푼돈으로 검을 구하려 작업장에 온 적이 있었는데,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서 좋은 검 하나 적선하듯이 준 적이 있었지. 근데 녀석이 몇 년 사이 엄청 유명해져서는 내 검의 명성까지 같이 올라갔지 뭔가! 내 인생에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들 중 하나지. 최근엔 그런 맛이 없었는데 덕분에 아주 즐거워! 애들도 자기가 만든 물건이 팔리니 자신감이 붙기 시작해서 보기도 좋고!"
세상에, 발쿤의 은밀한 취미 생활에 저런 뒷배경이 있었을 줄이야. 돈이 많이 벌려서라기보다 자신과 도제들의 물건을 많은 사람들이 쓴다는 점에 더 기뻐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이번에도 한 번 더 경험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오늘은 다른 사람의 검을 부탁드리려고 왔거든요."
"음? 그러고 보니 일행들이 많았군! 내 정신이 없었... 으음?"
호탕하게 웃으며 내 뒤에 멀뚱히 서 있던 이들을 보던 발쿤 씨가 지크프리트와 셰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게 물었다.
"다른 사람? '들'이 아니라?"
"원래는 한 명이 맞았는데 말이죠."
"허, 저런 친구들을 둘이나 데려와놓고 뻔뻔하구만 그래!"
내 허리를 팡팡 두드린 발쿤 씨는 이미 술 한 잔 걸친 게 아닐 정도로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렇다는데, 셰릴 너도 검 하나 장만 할래? 곧 있으면 네 생일이니 선물 겸 사줄게."
"...그, 그럴까나."
애써 무뚝뚝한 척 하면서도 입꼬리가 씰룩이는 게 누가 기사 가문 아니랄까 봐 검에 아주 좋아 죽으려고 한다. 그래도 일단은 지크프리트가 메인이었기에 난 지크프리트에게 손짓해 발쿤 씨와 대면하도록 했다.
"원래는 이 분의 무기를 부탁드리려고 했습니다."
"흠? 친구가 아닌가?"
"형동생 하는 사이죠. 반갑습니다. 지크프리트라고 합니다."
넉살좋게 웃으며 악수를 건네는 지크프리트의 손을 맞잡은 발쿤 씨가 흥미로 가득 찬 시선을 그에게 보내며 입을 열었다.
"신기하구만. 지크프리트라는 이름에 힘이 있는 건가? 제국의 용사 이름도 지크프리트라고 하더니, 이 친구도 아직 덜 다듬어졌을 뿐 재능이 있군."
"이 분이 용사 지크프리트입니다."
"...엉?"
"제가 그 지크프리트입니다!"
호탕한 외침에 발쿤 씨의 뒤에서 한창 열심히 작업 중이던 모든 손들이 멈추고 갑작스러운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지크프리트는 공간 마법을 이용해 자신의 대/검을 꺼내 내려놓으며 발쿤 씨에게 말했다.
"이만한 거로 하나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허허허?"
검과 지크프리트 그리고 나를 몇 번에 걸쳐 바라보던 발쿤씨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