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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77화 (277/412)

발쿤 씨에게 지크프리트의 검을 의뢰한지 3일이 지났다.

원래대로였다면 일상으로 돌아와 평범한 나날을 향유했어야 했지만 망할 악마 숭배자들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아카데미에 돌아온 셰릴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에 앞서 믿을 만한 학생들을 포섭하여 팀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중 대다수는 실기 성적 상위권의 학생들이었으나, 어째서인지 그리윌스는 포함되지 않아 의아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질문을 던진 나는 골 때리는 대답에 뒷목을 잡을 뻔 했다.

"녀석은 믿을 수 없어."

"대체 왜...?"

"항상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생겼어."

정말 놀랍도록 합리적인 이유라고 여기는 본능을 억누르며 마빡에 딱밤을 먹인 나는 한동안 셰릴에게 사람을 외형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내용으로 일장 연설을 펼친 뒤에야 그리윌스도 포섭하겠다는 다짐을 받을 수 있었다. 어떤 새끼들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와중에 그런 실력자를 개인적인 감정때문에 뺀다니, 그런 근시안적 발상은 삶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셰릴을 옆에서 도와줄 수는 없었다. 나는 나대로 마력 기관을 손보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지크프리트의 검을 반으로 쪼개버린 경험은 그간 마력 기관에 회의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았던 내 마음가짐에 극적인 변화를 주기 충분했다. 그저 길의 일부를 뚫는 것만으로도 효율이 달라지며 전투의 지속능력이 극적으로 상향되었으니까.

출퇴근 시간과 수면 시간마저 아끼기 위해 집에도 안 가고 교수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나를 멈춰 세운 것은 세네란이었다.

"엘드미아야. 비록 네가 마나는 사용하지 않아도 마법사의 길을 걷고 있으니 하는 조언인데, 마법사는 특별한 조치를 해 놓은 게 아니라면 잠만큼은 확실하게 챙겨야 해."

"엥? 왜요?"

"수면 부족으로 마법 시전했다가 머리가 날아가면 늦거든."

집중력이라는 건 언제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것이라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조바심에 몸을 축내며 연구하던 수습 마법사들의 사인 1위가 과로사가 아니라 폭사라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일말의 주저 없이 책을 정리하고 퇴근을 준비했다.

"아니 그런 중요한 건 일찍 좀 알려주셔야죠."

"한 일주일 안 자는 게 아니면 사실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이긴 한데, 지금 우리는 공동 연구를 하고 있잖아? 네 몸을 챙기는 것도 연구의 일환이라서 한 말이야."

지극히 타당한 주장을 하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세네란도 여유로운 건 아니었다. 그녀는 수많은 마족 서적들 펼쳐둔 채 일종의 핵심 요약을 위한 문서작업 중이다. 내 부족한 마법적 지식을 보충하기 위한 주석과 해설이 추가되어 오직 나만을 위한 학습서를 만드느라 바쁜 그녀 역시 나처럼 교수실에서 박혀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수업과 업무로 인해 세네란보다 양이 적을 뿐이지 그건 스승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푹 쉬고 내일 보자고. 계속 봤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깨달음은 항상 맑은 정신과 함께 다가오는 법이니까."

"그것도 마법사의 격언같은 겁니까?"

"아니. 내 조언이야."

황금의 마법사가 하는 조언이면 새겨 들을 만 하지. 나는 가볍게 작별 인사를 하며 짐을 챙겨든 뒤 숙면을 취하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라이카를 깨워 교수실을 나왔다.

며칠 전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적지 않았으나, 에셀루아 황녀의 추측이 맞아떨어진 것인지 아카데미에서 직접 나서서 무마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공식적으로 얼굴을 내비친 학장은 성광십자회의 열렬한 신도라는 이유로 사람들을 초대하고자 한 사람치고 굉장히 침착한 태도로 논리 정연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사실 그 모든 것이 악마 숭배자들과 반역자들을 처리하기 위한 일련의 계획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삼 일 만에 아카데미 정문을 벗어나려던 찰나, 나를 붙잡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동생! 어디가!"

고개를 돌려보니 종이 봉투 안에 들어 있는 작은 빵같은걸 열심히 주워 먹으며 지크프리트가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엔 대체 무슨 수로 장기 투숙을 할까 싶었는데 처음 초대할 때부터 귀족의 예법에 맞춰 초대한 탓인지 그들의 성과를 기리며 환영하는 파티는 일주일에 걸쳐 진행될 계획이다. 이 역시 내가 품게 된 음모론의 근거 중 하나였으나, 일주일 내내 삼시세끼의 진수성찬이 이어진다는 확답 덕에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화려한 음식들은 아카데미 뿐만 아니라 왕실과 성광십자회의 후원으로 빚어진 거라고 하더라.

"집에 갑니다."

"아, 그래? 근데 뭔 짐이 그리 많아?"

"남는 요리 좀 싸 갑니다."

"...동생, 그럴 거 같진 않은데... 혹시 돈이 궁해?"

돈이 궁하긴, 수상할 정도로 돈이 많은 상태이거늘. 물론 얘 앞에서 자랑할 수준은 못되겠지만 15살짜리가 모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과는 별개로 지크프리트의 반응이 묘하게 걱정하는 모양새라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럴 리가요. 하지만 이런 요리들은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아실리에를 데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니 주방에 부탁해서 가져가는 거 뿐입니다."

어차피 넘치도록 만든 탓에 남는 음식을 어떤 형태로든 소비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주방에 양해를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당초 식비를 아끼기 위해 이미 많은 학생들이 나와 같은 시도를 했고, 그들 역시 만족스러운 성과를 양손 가득 챙겨 돌아간 뒤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학생들과 나의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음식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한 마도구가 교수실에 상비되어 있기에 이렇게 챙겨서 돌아갈 수 있고, 그들은 그런 거 없이 기숙사로 돌아가 야식으로 해치워야 한다는 점 정도다.

장비병에 걸린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마도구에 진심인 세네란에게 마음속 깊이 감사할 일이었다.

"용사님은 어디 가십니까? 또 공식 행사에서 도망친 겁니까?"

"아니, 동생은 형을 대체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해?"

"공식 행사에서 도망치는 용사님으로 보는데요."

킁. 하며 코를 찡그리는 지크프리트였지만 그간 뿌린 씨앗이 하도 많아 딱히 반박하지는 못 하는 듯했다.

"이번엔 아니야. 검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받으러 가는 길이지. 같이 갈래?"

"저 짐 많은 거 안 보이십니까?"

"에이, 그게 뭐 대수라고. 이리 줘 봐."

정말 별거 아니라는 반응을 보이며 내 손에 들린 봉투를 뺏어든 지크프리트는 공간 마법을 펼쳐 음식 봉투를 넣어 버렸다. 순간 저렇게 막 넣어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스쳐 지나갔지만 쟤도 생각이 있을 텐데 막 쏟아질 게 뻔한 짓을 하진 않았을 거라는 믿음을 앞세우며 최대한 덤덤히 반응했다.

"보면 볼수록 너무 편리해 보여서 괘씸할 지경이네요."

"실제로도 더럽게 편하지. 엎어질 걱정도 없고, 썩을 걱정도 없고, 섞일 걱정도 없는 완벽한 수납공간이거든. 어차피 검 찾고 나면 할 것도 없으니까 산책이나 할 겸 같이 가 줄게."

용사가 아니라 정의의 쿠팡맨이었군. 완성된 검이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했기에 순순히 지크프리트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몇 년이나 전쟁 중인 나라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깔끔하고 평화로운 곳이야. 동생은 이런 곳에서 지내면서 잘도 목표를 유지하며 사는구나."

연신 봉투에서 빵을 꺼내 오물거리던 지크프리트가 내게도 권하는 것을 가볍게 거절하며 뜬금없는 대화 주제에 대한 대답을 생각해 보았다. 글쎄, 내 행보를 제외하면 딱히 특별할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잘 살던 마을이 하룻밤 사이에 초토화 되어 버리면 누구라도 그럴 거라 생각하는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보통 어딘가 맛이 가잖아. 복수귀가 된다던가, 폐인이 된다던가, 일상생활에 하자가 생긴다던가."

"그런 사람을 만나 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아, 그렇구만. 대부분 그래. 적어도 내가 내륙에서 보아온, 몬스터나 인근 국가와의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사람들은 그랬어."

전생에서 영화로 습득한 지식을 말하려는 줄 알았더니 의외의 경험담이 튀어나왔다.

"다 큰 어른들도 쉽게 마음이 무너져 버리거든. 그냥 인간의 군대, 평범한 몬스터를 상대로도 말이야. 고블린들의 습격에 가족이 다 죽고 난 뒤에는 멀쩡한 애들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까지 있어. 그에 비해 동생은 굉장히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참 대단해."

"암살 시도했다고 수도 한복판에 있는 저택에서 백작의 목을 따버리는 게 정상이라고 하긴 힘들 거 같은데요."

"낄낄낄. 엔벨데 이야기구만? 물론 그런 미친놈 같은 구석이 있긴 하지. 하지만 내 말은 그런 걸 포함해서 굉장히 정상적이라는 거야."

빵을 다 먹은 것인지 몇 번 손을 휘적이던 지크프리트가 빈 봉투를 곱게 접어 공간 마법에 수납했다. 그러고는 검지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맛이 가면 그런 행동을 지을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을 구분 못해. 주변 사람들까지 피폐하게 만들지. 그런 걸 극복한 사람들이 영웅이 되는 거 같더라."

새삼스러운 이야기였고 낯간지러운 이야기였다.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나 싶어 고민하던 나는 뒤늦게 도끼눈을 뜨며 지크프리트를 노려보았다. 영웅?

"척후 안 합니다."

반쯤은 넘겨짚은 것에 불과한 대답이었지만 지크프리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아잇 씻팔. 진짜 눈치 더럽게 빠르네. 어떻게 알았지?"

어림도 없지. 어디서 쓸데없이 분위기를 잡으며 뽕을 주입하려고 그래?

"전 제 숙원 달성으로도 삶이 고단합니다. 엔티레인가 뭔가 하는 엘프 친구보고 열심히 좀 배워 보라고 하십쇼."

명색에 용사파티이면서 칼질에 특화되었을 뿐인 엘프라니, 클리셰 파괴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엘프에게 추적술을 익히게 하는 것보다 나를 설득하는 게 더 가능성 높은 길이라고 여긴 것인지 지크프리트는 드워프 지구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감언이설을 섞은 설득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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