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만큼은 어김없이 북적거리는 무구점을 지나 공방에 들어서는 과정이 아무런 막힘없이 이루어졌다. 지크프리트의 말마따나 VIP고객 취급이라도 되는 것처럼 직원들은 정중하게 우리를 안내해 준 탓에 우리를 향한 손님들의 시선에 멋쩍음을 느껴야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들어선 공방 한 켠에는 자연스럽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크기의 거대한 대검이 세워져 있었다.
"완전... 마음에 들어."
디자인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전에는 없던 크로스 가드가 조금 생긴 게 가장 눈에 띄는 변화일 정도다. 하지만 평범한 재료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뽐내기라도 하듯 대검의 날은 묘한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이전의 거무튀튀하던 대검과는 달리 착 가라앉으면서도 세련된 광택을 띠고 있었다. 원근감을 파괴하는 크기만 제외하면 글라디우스 같다는 느낌도 드는 대검에게 다가간 지크프리트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대검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와우, 손에 착 감기는데? 무게 중심도 훨씬 좋고."
"왔구... 허어, 정말 저 무식한 크기의 대검을 가볍게 휘두를 줄이야."
자고 있던 발쿤 씨를 다른 대장장이들이 불러 준 것인지 공방 안쪽에서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나타난 그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솔직한 감상을 입에 담았다. 확실히 감탄할 만한 움직임이긴 했다. 예카트리나의 워해머는 자루가 길어서 안정감이 있어 보이는 반면, 결국 저건 검이다 보니 손잡이가 검신에 비해 훨씬 짧아 위태롭기 그지없어 보이니까.
물론 그런 제 3자의 감각과는 다르게 지크프리트는 매우 능수능란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검을 휘둘러보고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발쿤 씨에게 악수를 건넸다.
"정말 멋진 검입니다. 이거면 엘드미아도 이길 수 있을 거 같군요."
"용사가 쓰는 물건이니 평소보다도 더 심혈을 기울여 만...엉?"
순간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발쿤 씨였지만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이며 지크프리트에게 반박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원래 약한 놈들이 무기 탓을 하는 겁니다. 두 번이나 졌으면 인정할 때도 된 거 같은데."
"아 무기를 갈라버리는 건 반칙이지!"
"뭐라는 겁니까. 할 수 있으면 용사님도 했을 게 뻔하구만."
내 무자비한 팩트에 녀석이 부들거리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제 검에 대한 만족도가 남다른 건지 다시금 검으로 시선을 옮긴 지크프리트는 마치 큰 결심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검의 이름을 정했다."
"말 돌리는 방법마저 참으로 구차하군요."
"어허, 형님이 새로운 무기에 이름을 붙이는 신성한 자리에서 트집 잡는 거 아니야."
신성은 개뿔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생각해 보면 지크프리트는 신이 점지한 용사이니 딱히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대충 넘어가줬다.
"뭐 얼마나 거창한 이름을 지었길래 그러십니까?"
발뭉이라고 이름 지으려고 그러나? 라는 내 추측은 한끗 차이로 빗나갔다.
"노퉁."
허어, 이름값 제대로 하려고 하나보군.
듣고 보니 참으로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나무에 꽂히지는 않았지만 용사 정도 되는 능력이 아니면 함부로 들 수도 없는 검에, 부러진 검을 고친 건 아니지만 그걸 모티브로 제작했고, 필수품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용사에게 맞는 보조 기능이 들어가 있었으니까.
"무슨 뜻입니까?"
하지만 적어도 내가 여기서 살아오며 들어 본 언어는 아니었기에 흥미로움을 가장하며 질문하자, 지크프리트가 쓸데없이 멋들어진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필수품."
"흐으음... 굉장히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건 인정해야겠네요."
잠시 뜸을 들이는 연기 끝에 칭찬을 입에 담자 그래도 현대의 지식에서 차용했다는 자각은 있는 것인지 녀석은 헛기침만 하며 굉장히 절제된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그런 지크프리트에게 검을 관리하기 위한 이런 저런 도구들을 건네주며 연신 라이카를 쓰다듬어주던 발쿤 씨는 숫돌 외에도 뭔가 많은 도구들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는 지크프리트를 뒤로한 채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그림자 발이 와서는 이걸 자네에게 주라고 하더군. 받게나."
"그림자 발이요?"
바람처럼 왔다 바람처럼 사라진 것으로 적어도 한동안은 볼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이름이 언급될 줄은 몰랐기에 난 조금 당황했다. 그동안 센과 만나 이야기라도 들은 것일까? 여러모로 궁금증이 샘솟았지만 일단 발쿤 씨가 건네준 가죽 주머니를 받아 내용물부터 살펴봤다.
"포션?"
과학 실험용 테스트 튜브처럼 생긴 유리 용기에 쇠로 된 잠금장치가 달린,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물건은 영락 없는 포션병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적포도주처럼 붉은빛을 띠는 일반적인 포션과 달리 맑은 푸른빛을 띠고 있다는 점 정도다.
하지만 그 하나가 존나 큰 차이였다. 모험가 일을 하면서 주워들은 게 있었던 나는 순식간에 그 내용물이 뭔지 이해했고, 그랬기에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헛소리를 입에 담아버렸다.
"이거 염색용 도료같은 건 아니죠?"
일반적인 포션들과 달리 이 푸른 포션은 순수한 마법의 산물이자 더럽게 비싼 물건이었으니까. 이거 하나면 신전의 가장 질 좋은 포션 열 개는 살 수 있다.
"그놈이 장난기가 많긴 하지만 그런 거로는 장난 안치지."
그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인지 발쿤 씨도 내 무례를 이해한다는 듯 적당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친척을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더군. 뭔진 몰라도 이번엔 자기가 졌다던데?"
"...참 한결같은 분이군요."
일반적으로 쓰이는 포션은 두 종류다. 신전에서 신성력을 담아 제조하는 포션과 약사들이 마법적인 과정을 거쳐 만드는 포션. 하지만 후자는 거의 탕약에 가까울뿐더러 효과도 약사의 실력에 따라 중구난방이라 위험한 의뢰를 자주 받는 모험가들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유독 약발을 잘 받아서 신전의 포션보다 효과가 좋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자양강장제 정도의 효과밖에 없으니 좀 비싸더라도 효과는 확실한 신전표 포션을 애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두 포션에 공통점이 하나 있으니, 바로 유통기한이다.
전자는 점점 흩어지는 신성력으로 인해 별다른 조치없이 장기간 방치할 경우 점점 붉은빛을 잃어가며 맹물이 되어 버리고 후자는 썩는다. 신전의 포션은 등급에 따라 다르지만 중간 등급마저도 한 달 정도 방치해 두면 효과가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약사들의 포션은 효과는 유지될지언정 상온에서 3일조차 못 버텨서 모험가보다는 무조건 싸운 뒤 다칠 확률이 높은 용병들이 더 자주 써먹는다.
그걸 매우 고깝게 여긴 마법사들 몇몇이 뜻을 모아 새로운 포션을 창조하는데 평생을 바쳤으니, 그 결과가 바로 이 파란 포션되시겠다. 생긴 거만 놓고 보면 마나를 채워줘야 할 것 같지만 그런 건 이 세상에 없다. 그냥 힐링 포션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놈은 유통기한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진 물건이다. 이 포션병 자체가 하나의 마도구라서 내용물에 주기적으로 마나를 공급하며 신선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1년을 묵혀둔 포션을 썼는데도 반쯤 잘린 허벅지가 붙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니 회복 능력마저도 확실하다고 할 수 있겠다. 심지어 생긴 거랑 다르게 더럽게 튼튼해서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깨지지도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장점 밖에 없어 보이는 물건이지만, 당연히 큰 단점이 있다.
더럽게 비싸다는 거.
앞서 말한 회복 성능은 일반적인 포션으로도 충분히 낼 수 있고 유통기한이라는 건 의뢰 일정에 맞춰 감안할 수 있는 문제에 가깝다보니 약사들의 탕약 포션만 아니라면 조금 귀찮을 뿐, 큰 문제가 되지 않는 편에 속한다. 덕분에 이 포션이 은급에 준하는 모험가들이나 고위층들의 상비약으로 취급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나도 지금까지 그렇게만 여겨 왔었고 말이지.
졸지에 숨만 붙어 있다면 위급한 상황에서 목숨을 4번까지도 살려줄 수 있는 물건을 받게 된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바쁜 일이 있어서 직접 주지 못하는 걸 많이 아쉬워하더군. 나중에 술이나 같이 하자던데."
"저야 좋죠. 그림자 발은 항상 행운을 가져다주는 거 같거든요."
그 특유의 호의를 통해 사람을 유쾌하게 만드니 얼마든지 만나고 싶은 사람 중 하나다. 어쨌든 이번엔 지크프리트에게도 감사해야겠다. 쟤가 같이 오자고 안 했으면 한동안은 여기 올 예정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후 무기 수선을 위한 도구 주머니 파악을 끝마친 지크프리트와 나는 기쁜 마음으로 공방을 벗어나 우리 집으로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이길 테니 다시 대련하자는 녀석에게 너 대련 개 못하잖아를 시전하다 보니 말을 타지 않으면 꽤 멀게만 느껴지던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었고, 졸지에 우리집을 방문한 몇 안되는 손님이 된 지크프리트가 흥미 가득한 시선으로 외관을 살펴보며 말했다.
"오. 여기가 동생 집이야?"
"예, 엔벨데 목숨값의 일부죠."
"크으, 그래. 집은 이래야지. 동물 축사랑 사람 사는 공간을 합쳐 놓은 돼지우리 같은 게 아니라."
판타지 라이프에 환상을 지니고 있던 현대인만이 공유할 수 있는 소감과 함께 음식 봉투를 꺼내 준 지크프리트는 그대로 돌아가지 않고 은근한 기대감을 내비치며 말했다.
"집구경도 시켜 줄 거지?"
녀석, 호들갑 떨기는. 하우징 시스템이 있던 수많은 게임들로 단련된 내 감각이 일궈낸 내부 인테리어를 보면 감격해서 눈물이라도 흘리겠군.
어차피 해가 중천이라 지금 돌아가 봤자 식사도 못할 게 뻔했기에 난 고개를 끄덕여 지크프리트의 제안을 수락했다.
"점심시간이잖습니까. 온 김에 식사나 하고 가시죠."
"집안은 어떻게 꾸며져 있을지 굉장히 기대되는구만!"
자기는 훨씬 더 화려한 곳에서 지내면서도 이런 작은 집 인테리어에 호기심이 동하는 지크프리트의 반응이 퍽 순진하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