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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79화 (279/412)

지크프리트는 제국에서 활동하며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사람들을 보고 자랐다.

애초에 태생부터가 제국의 중심지와는 거리가 먼, 모험가들이 일반 시민보다 많은 경계 도시 출신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빙의와 같은 형태로 이세계에 왔다고는 하나 자신을 이세계에 초대한 신은 원래 몸의 주인이 가지고 있던 기억을 고스란히 남겨 주었고, 지크프리트는 뒤늦게 천치가 되어 버린 불쌍한 아이로 보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아니, 스스로 빙의되었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뒤늦게 전생을 자각한 것에 불과하고 원래부터 이 몸으로 환생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의 경계가 너무나도 모호했기에 확신은 없었다. 그저 전생의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하고 강렬하니 빙의라고 여길 뿐이다.

어쨌든 그 덕에 지크프리트는 전생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다양한 인간군상을 볼 수 있었다. 주사위 사기를 치다가 손목이 날아간 마법사, 그 마법사의 손목을 자른 것까지는 좋았으나 주문을 막지 못해 타 죽은 전사, 멋모르고 소매치기를 시도했다가 명치에 주먹만 한 바람구멍이 나버린 도둑 등 밑바닥 인생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몬스터들에게 고통받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다른 지역보다 유독 몬스터에게 피해를 입은 난민들이 경계 도시로 몰리는 이유는 단순했다. 제국이 과도한 몬스터 분포로 인해 개발을 반쯤 포기하고 있던 경계 너머의 땅으로 영토 확장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서부 개척 시대와도 같은 양상이었으나 원주민이 평범한 인간보다 강한 괴물들이라는 게 큰 차이점이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정착지가 생겨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안전한 인류의 영토는 지크프리트가 살던 경계 도시였다. 그랬기에 지크프리트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 버린 사람들을 매우 다양하게 볼 기회가 많았다.

그런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상처를 극복했으나, 복수를 원동력으로 삼은 자는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가지지 못했고 새로운 삶을 꾸려 나가기로 한 이들은 고통스러운 기억만 남은 미개척지에서 멀어지는 길을 택했다. 그나마 가장 멀쩡히 극복한 부류조차 복수와는 거리가 먼, 일종의 해탈과 비슷한 마음가짐을 지니고 살아갈 뿐이었다. 그랬기에 지크프리트는 마치 공과 사를 나누듯 복수와 일상을 구분지을 줄 아는 엘드미아가 굉장히 기이하게만 느껴졌다.

동시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집이... 굉장히 세련됐다?"

"모처럼의 집이니 열심히 꾸몄습니다. 그럴싸 하죠?"

우연한 계기라고는 해도 굳이 집까지 들어오고자 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엘드미아는 지금까지 그가 보아온 그 누구보다 강력한 조력자가 될 수 있었고, 최소한 인류를 구하는 일 만큼은 어느 정도 진심인 지크프리트로서는 반드시 영입하고 싶은 인재였다. 하지만 알고 봤더니 남들에게 보여 주지 않는 부분에서 정신이 이상해 시한 폭탄이 되어 버렸다는 결말은 원하지 않았기에 가볍게 접근하면서도 최대한 의중을 떠보고자 했다.

비록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해 쉽진 않았지만 말이다. 오늘에야말로 자신의 엘드미아 평가서에 마침표를 찍겠다고 다짐한 지크프리트는 신나게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웰시 코기를 볼 틈도 없이 집안을 둘러보았다.

지극히 평범한... 아니, 오히려 이세계 평균을 생각하면 훨씬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집이었다. 목숨을 담보로 큰돈을 만지는 모험가들은 대부분의 벌이를 장비에 투자하거나 유흥으로 탕진하고 일반 시민들은 무언가 안정적으로 쌓아 둘 정도로 많은 재산을 지니지 못 하는데 편인데, 엘드미아는 큰돈을 안정적으로 쓰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표본과도 같이 집을 꾸며 놓았다. 덕분에 잠깐 저도 모르게 진심으로 집구경을 하던 지크프리트는 떨떠름한 어조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이거 혹시 혼자 꾸린 거냐? 아실리에 씨의 도움 없이?"

"아, 예. 누나는 이런 점에서는 좀 감이 떨어진다고 해서 혼자 열심히 머리 좀 썼죠. 엘프들 고질병이라던가?"

하긴, 엔티레도 그랬지. 엔티레가 사용하는 기숙사 방은 돼지 우리까지는 아니어도 대체 왜 이런 배치를 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졸지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공감대에 절로 고개를 끄덕인 지크프리트는 다시금 정신을 다잡으며 자연스럽게 난로가로 향했다. 그리고 깔끔하게 꾸며진 집안에서 유일하게 난잡하기 그지없는 문서 더미를 보며 물었다.

"이건 뭔데 이렇게 쌓아 뒀어? 장작이야?"

"누... 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거 성광십자회에서 받은 문서들입니다. 심심하면 잠깐 보고 계시죠. 도움이 될 겁니다. 누나? 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며 아실리에를 찾아 2층으로 올라가는 엘드미아를 바라보는 것도 잠시, 지크프리트는 집주인의 배려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문서를 훑어보았다.

"...이런 문서를 줬다고?"

그리고 놀랐다. 시작부터 제국 신성회에서도 내부 기밀로 취급될 내용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혹시나 싶어 살펴본 다른 문서들도 상황이 비슷하다는 걸 알아차린 지크프리트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냥 줬을리는 없고... 성광십자회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면 이번 일에 관여했을 테니, 그때 그 악마를 잡는 대가로 받은 건가...?"

혹시나 싶어 살펴본 난로 안에는 타다가 흘러내린 종이 조각들이 남아 있었다. 다행히 그게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 읽고 태운다라, 첩보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로군.

[뭘 그리 의심하고 있는건가.]

[엘드미아의 정신 상태.]

잠깐 집나갔던 정령이 소리소문 없이 돌아와 말을 걸었지만 지크프리트는 놀라지 않으며 다시 한번 문서 더미와 집을 살펴보았다.

다시봐도 너저분했다. 깔끔한 집에서 저 성광십자회의 기밀문서 더미만 유독.

[나에게 심리학에 대한 재능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너 혹시 그런 거 없냐?]

[네가 뭔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다만.]

싸울 때 말고는 도움이 안 되는 정령놈의 시큰둥한 반응에 혀를 차면서도 지크프리트는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에서 가설을 세웠다. 저 문서들을 굳이 정리도 안한 채 방치하다가 태우는 건 그냥 어차피 태울 물건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복수심에서 비롯된 일종의 난폭함인 것일까.

만약 후자라면, 엘드미아는 물건 하나하나마저 구분 지어 대할만큼 확고한 분노와 공격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걸 확실하게 컨트롤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걸까?

그게... 일반적으로도 가능한 일인가? 아니면 오히려 정신적으로 무언가 이상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 된 것인가.

[적어도 난 할 수 없을 게 확실하군.]

화풀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이건 선택적 분노조절 장애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다른 종족들이 이성으로 억누르는 경우는 나도 봐 왔다만, 인간들 사이에서는 드문 모습이긴 하다.]

사색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거라 여겼던 정령의 예상치 못한 지원사격에 스스로의 생각을 조금 정리한 지크프리트는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에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비몽사몽 한 상태로 엘드미아에게 업혀 내려오고 있던 아실리에와 정확하게 눈이 마주쳤다.

"얘, 얘! 손님이 왔으면 왔다고 말을 했어야지! 부끄럽게 이게 뭐니!"

"아, 아야! 뭔 소리야 누나! 말했잖아! 또 잠결에 대답했구만!"

"빠, 빨리 내려줘!"

"어차피 본 거 그냥 아래까지 내려가. 위험하게 뭔..."

별로 아플 거 같지 않은 아실리에의 주먹을 등으로 받으면서도 시큰둥하게 내려오는 엘드미아를 보며 지크프리트는 피식 웃었다.

잘 생각해 보면 지구의 현대인들조차 정신병 하나 정도는 품고 살아간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워낙 이세계 기준에 익숙해져버린 탓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큰 문제가 터질 거라는 불안감이 있었는데, 저런 모습을 보니 쓸데없는 기우였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세계 사람들과는 다른 맛이 있는 녀석이다. 종교에도, 신분에도 딱히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부터 범상치 않은 녀석이니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남들과는 다른 특출난 점이 있을지 모를 노릇이었다. 어쩌면 진짜 영웅의 재목일지도 모르지.

"동생. 진짜 우리 파티에 들어오지 않을래?"

그렇다면 정말 파티에 합류시켜야만 했다. 자신이 죽어서 이곳에 오게 된 게 장난이 아닌 것처럼, 인류를 향한 위협도 장난이 아닐 테니까. 얼굴이 빨개진 채 식사를 준비하겠다며 주방으로 들어가는 아실리에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엘드미아가 지크프리트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반응했다.

"아직도 미련이 남은 겁니까? 오면서 이야기 다 정리한 줄 알았더니."

"형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동생만큼 특출난 인재가 드물단 말이지."

"안 합니다. 그래도 뭐 감당하기 힘든 문제가 있으면 도와는 드릴테니 좀 포기하십쇼."

"엥? 진짜?"

그게 파티에 들어오는 것보다 더 귀찮은 일 아닌가? 라는 의문을 표할 틈도 없이 웰시코기를 안아 든 엘드미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곧 죽어도 용사인데. 물론 제 일이 최우선이지만 아예 안 도울 생각은 없습니다."

"...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지크프리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용사조차 감당하기 힘든 문제가 당면했을 때 별 고민도 없이 덤덤히 도와주겠다는데, 어찌 뭐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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