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하면서도 호화로운 식사를 마친 뒤 지크프리트는 묘하게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식사보다도 자기가 벅찰 때 도와주겠다는 내 대답에 크게 만족한 거 같은데... 단순한 건지, 은근히 고생이 많았던 탓에 이런 경험이 적은 것인지 참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용사가 무너지면 다 끝 아닌가? 그걸 안 돕는 씹새들이 있다고? 그거야말로 마족의 첩자가 아닐까 싶은데 말이지. 그러자 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맛있는 식사에 크게 만족하며 앉아서 쉬고 있던 아실리에가 나근거리는 목소리로 내 의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을 내놓았다.
"관점을 다르게 봐야지. 용사조차 위기에 놓이거나 벅찬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우리가 나서서 용사를 도와야지.' 라는 생각보다 '용사마저 무너지다니 다 끝났어. 도망쳐.'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흠, 좆간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실로 합당한 의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누나는 그런 것보다 아카데미가 걱정이야. 정말 괜찮은 거니?"
아카데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에 개입하게 된 이상 당연히 아실리에도 알고 있어야 했기에, 우리가 식사를 이어 나가며 나눈 대화는 대부분 아카데미 지하에서 일어나고 있을지 모르는 위험 분자들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지크프리트가 있을 때 딱히 내색하지 않기도 했고, 저번에 가짜 마신교들을 상대할 때 악마와 조우한 적도 있어서 별걱정 안 할 줄 알았던 내 예상과는 달리 아실리에는 조금 불안한 눈치였다.
내가 야기한 불안은 내가 힘써서 해소해주는 게 맞지. 나는 경험에 입각한 상세한 설명을 통해 아실리에에게 내가 대악마 결전 병기와도 같은 완벽한 상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어필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허세가 아니라 명확한 사실만을 전달했음에도 참으로 거짓말 같다고 느껴지는 설명이었으나, 어쨌든 결과는 하나였다.
"장담컨데 악마 새끼들은 군단으로 오지 않는 이상 나 못 이김."
자신의 머리보다 제단을 소중하게 여기던 악마를 상대하며 참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디 모가지가 떨어지는 것 정도로는 아무런 문제없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악마조차 내 방법으로 목이 잘리면 그대로 아무것도 못 하는 윌슨 신세가 된다는 것부터 악마 새끼들은 지들끼리도 치고받고 싸운다는 것, 죄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서 안하무인에 방심은 기본 장착이라는 것까지.
말빨로 사람 속여 먹을 땐 누구보다도 진심을 다하는 새끼들이지만 현신함과 동시에 자신의 출중한 전투 능력을 믿고 빡대가리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건 근래에 들은 정보 중 가장 골 때리는 정보로 손 꼽힌다.
"으으음, 엘디는 허언을 하지 않는 편이니 믿긴 하겠는데... 정말 믿기 힘든 이야기이긴 하네."
아무리 아실리에라 하더라도 당연한 반응이다. 오히려 그래도 믿고 넘어가 준다는 점에서 박수 받아 마땅 했다. 한 번 현신하면 말 그대로 지옥도를 만들어 버릴 힘이 있는데 그런 놈들을 병뚜껑 달린 유리병 취급하는 모습을 어떻게 정상적으로 받아들이겠어? 나라도 미친놈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 악마 녀석이 말한 바에 따르면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이 세계에서 놈들이 활동하기 위한 육체는 마력으로 구성된다고 하니, 변수는 없을 거야. 인간의 몸을 잠식하는 녀석들도 있다고는 하는데, 그건 마력으로 육체를 만들 수 있는 수준이 못되는 찌끄래기와 다를 바 없는 녀석들이니 걱정할 이유가 더 없고."
다행히 내 진심어린 설득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 아실리에는 처음보다는 기분이 많이 풀린 듯 했다. 그 후로 간단한 의뢰를 알아볼 겸 외출하는 그녀를 배웅한 나는 간만에 따뜻한 물로 목욕을 마친 뒤 침대에 쓰러지듯이 드러누웠다.
그리고 3일 동안 쌓인 피로가 은근슬쩍 옆으로 기어올라와 같이 침대에 눕는 라이카와 함께 밀려오는 것을 느낄 틈도 없이 곯아떨어졌다.
◈
갑자기 몰려온 수마睡摩에 놀라 반사적으로 깼다고 느꼈을 땐 이미 아침이었다.
저녁마저 거르고 한나절을 꼬박 잤다는 사실에 놀란 나는 피곤한 상태로 사건에 휘말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역시 몸이 버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억지로 깨어있는 건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하루가 멀다하고 사건 사고에 휘말리는 입장이니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라도 잠 정도는 제때 자야겠다.
내가 꼼짝도 않고 종일 잤음에도 아실리에는 별로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그녀가 보인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지.' 정도의 반응은, 나로 하여금 아실리에가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지 않더라도 하루 정도는 경과를 두고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라이카를 보낼게. 너무 걱정은 말고 그냥 늦게 들어온다는 의미라고 생각해."
"그게 말처럼 쉽겠니."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아실리에였지만 말없이 외박해서 걱정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낫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개운한 몸을 이끌고 집을 나와 아카데미에 도착했을 땐 기숙사에서 지내지 못 하는 학생들의 등교가 한창이었다.
"야, 들었어? 반역자들이 지하 수로로 숨어들었을 수도 있다더라."
"갑자기 사라졌던 애들? 수로를 통해 도망이라도 치려고 한 건가?"
"그게... 이건 내가 어쩌다가 들은 건데..."
수상할 정도로 소문에 진심인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쑥덕대는 이야기는 대부분 내가 알고 있는 내용에서 파생된 것들이었다. 물론 입소문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얼토당토않은 방향의 이야기도 많았다. 사실 용사 암살이 목적이라더라, 엔벨데를 부활시키기 위해 지하 수로에 잠들어 있는 악마를 깨우고 학생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한다더라 등등 바리에이션도 다양하다.
이게 판타지 세상 입소문의 평균 수준인가 싶다가 전생이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았던 거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에 교수동에 들어서니, 여기도 학생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해는 됐다. 지난번에 있었던 마나 소멸 사태는 꽤 심각한 사건이었으니까.
반역자들이 자신들의 연구와 업무를 방해하기 위해 개수작을 부렸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분노하는 이들이 모여 언성을 높이는 걸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눈치가 없는 사람이거나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임이 분명하다.
"안녕 엘드미아야. 아침부터 떠들썩하지?"
그런 이들을 지나 교수실에 들어서자 애벌레 같은 침낭 속에 들어간 상태로 서서 커피를 내리고 있던 세네란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들어가서 쉬시지 여기서 주무신 겁니까?"
"솔직히 말하면, 여기가 더 쾌적해."
"그거 참 심각한 상태네요."
어쩐지 묘하게 생활력 높아 보이는 물건들도 마도구들과 같이 들어왔다 싶었거늘, 세네란은 여기를 언제든지 별장으로 쓸 생각이었나보다.
"얼굴만 봐도 푹 잤다는 걸 알 수 있겠네. 역시 집이 최고지?"
"집보다 남의 교수실이 더 쾌적하다는 분께 들으니 참 괴리감이 있지만, 확실히 그렇더군요."
케이프를 옷걸이에 걸고, 오늘의 공부를 위해 자리를 정돈하며 이제는 라이카의 고정석이 되어버린 책상 아래를 청소하는 사이 꿈틀 꿈틀 다가온 세네란이 커피 잔을 내밀었다.
"듣자 하니 오가토르프 가문의 영애께서 꽤나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던데."
향만 맡아도 진하게 내려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미 찬 바람을 맞으며 온 탓에 잠은 다 깼지만 그래도 카페인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잔을 받아 든 나는 세네란의 의중을 고민해 보며 대답했다.
"그러라고 했으니까요."
"위드라는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눈치던데, 용사가 알려 줬나보네?"
딱히 반문하거나 갑자기 스승님의 이름이 나오는 이유를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전직 궁정 마법사였던 분이니 이런 사태를 대비해 아카데미에서 자문을 구하든 도움을 요청하든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굳이 나에게 말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도 에셀루아에게 들었던 것처럼 나를 이용하려는 움직임들을 경계한 것이겠지. 그 능구렁이 같은 레스롬 영감님이 활개치는 정치판에 한참을 엮여 있던 분인데 내가 예상한 걸 그분이 몰랐을 거 같진 않다.
"그랬죠. 그래도 그치들 바라는대로만 움직이는 취미는 없어서 제 나름대로 손을 쓰려구요."
"도와줄까?"
그리고 그건 세네란이라고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연구에 미쳐있어서 그렇지 사람들의 니즈에 맞춰 장사로 돈 번 사람인데 멍청할리가 있나.
"괜찮습니다. 주역이 정해진 판이라서 명성 드높은 사람이 끼면 좀 꼬일 거 같거든요."
잠이 덜 깬 얼굴을 한 상태로도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인 그녀는 또다시 꿈틀거리며 움직이더니 적당한 의자 하나를 꺼내 앉으며 말을 이었다.
"네겐 좀 미안한 말이지만 굴러가는 상황만 놓고 보면 참 재밌단 말이지. 보통은 잘 드는 칼을 쓰고 싶어서 안달나다가 손가락이 베이는 법인데 오히려 칼잡이들이 이 악물고 안 쓰려고 하는 것도 재밌고, 결국 그 칼이 아니면 해결하기 어려운 지경에 왔음에도 눈치를 보며 쉬쉬하는 꼴이라는 게 흔한 광경은 아니거든."
"칼은 신분 여하에 관계없이 찔리면 죽으니까요. 신중한 게 정상 아니겠습니까."
그러라고 친 깽판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내 태연한 대답에 잠깐 웃어 보인 세네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근데 내가 정말 재밌어 하는 부분은 다른 거야. 그렇게 칼잡이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데, 왜 칼이 알아서 판을 짜며 움직이는 거야?"
웃음기 너머에 있는 진지한 호기심에 나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졌다. 바퀴벌레가 나왔는데 왜 바퀴약을 뿌리냐는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다. 그래도 악마라는 녀석들이 지닌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인식을 감안해서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옘병. 다른 거라면 모르겠는데 집 아래 바퀴벌레가 있다잖습니까. 전 소름 끼쳐서 그 꼴은 못 봅니다."
그냥 반역자들이면 모를까, 악마 새끼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데 당연히 찾아다가 씨를 말려놔야지.
이런 거 조기박멸 안하면 조의 아파트 꼴 나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