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어 있던 소년을 깨운 것은 머리에 떨어진 물방울이었다.
겨우 딱 한 방울. 그 서늘하고 눅눅한 감각이 듦과 동시에 퍼뜩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소년은 아직 충혈된 눈을 움직여 자신의 검을 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극도로 예민해진 신경이 말라 있던 바닥에 물기가 스며드는 소리까지 잡아내는 기분 속에서 심장이 경종처럼 울렸다.
그런 소년의 반응과 달리 주변은 고요했다.
어두우면서도 푸르게 빛나는 공간에서 마치 거지처럼 지저분한 모포를 말고 잠들어 있는 동료들의 모습과 아직 온기를 뿜어내고 있는 마석 난로. 그리고 저 멀리서 아무런 가림막도 없이 경계를 서고 있는 동료의 모습까지 살펴보고 나서야 긴장의 끈을 놓은 소년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고개를 들어 보니 분명 어제까지 멀쩡했던 천장에서 한 방울씩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바짝 긴장했던 신경이 급격히 이완되면서 현재 상황에 대한 고민과 앞으로의 운명같은 것들이 다시금 소년의 머릿속으로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소년은 그게 자신이 잠들기 직전까지 어떻게든 무시하려 했던 고민거리라는 걸 떠올리며 우울감에 젖은 얼굴로 빛나고 있는 마석 난로를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도 넉넉치 못한 식량 사정으로 인해 허기진 배가 꼬르륵 거리며 기숙사의 따뜻한 방과 맛있는 식사가 그리워지고,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건지에 대한 부질없는 회상이 시작되었다.
변화는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찾아왔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당시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엔벨데의 죽음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소년을 비롯해 반역에 가담한 가문의 자식들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가능성은 딱 하나였다.
이미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던 왕실이 직접 칼을 뽑아 들었다는 것.
단번에 주모자인 엔벨데의 머리를 쳤다는 것부터 이미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여긴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알아서 모였고, 최대한 챙길 수 있는 모든 것을 챙겨 미리 파악해 둔 지하 수로 입구로 몸을 숨겼다.
그들이 도시 밖으로 도망치지 않고 지하 수로로 숨어든 것은 합리적인 판단과 추측을 기반으로 한 결과였다.
무엇보다도 왕실이 역모에 가담한 이들을 물색하는 과정 없이 순식간에 엔벨데의 목을 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들은 그걸 이미 반역자 색출과 관련된 모든 준비가 끝났으며 그들을 살려 둘 생각이 없다는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
그런 상황에서 수도 밖으로 멀쩡히 도망칠 가능성은 한없이 적었다. 어쩌면 이미 자신들의 가문도 숙청당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역모에 가담한 이들을 파악하지도 않고 주모자를 죽였을 리는 없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추측을 한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하긴 힘들었다.
물론 전부 부질없는 추측이었다. 차라리 생각이 짧아서 그때 도시 밖으로 도망쳤으면 그들은 가문의 재산을 들고 국외로 도망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엔벨데의 죽음은 왕실에 있어서도 너무나 급작스러운 '사고'였기에.
하지만 소년과 다른 이들이 그 사실을 알 방법은 없었고, 지하 수로로 숨어든 그들은 틈틈이 지상을 살피며 도망칠 기회를 물색했다. 평소와 같은 나날이 이어지고 있는 수도의 평화로움에 순간 혹할 뻔하기도 했으나 이미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 그들은 그러한 광경조차 자신들을 잡아내기 위한 왕실의 술수로 보였다.
그게 진짜 평화였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왕실은 '진짜' 검문을 시작했고, 가문들은 숙청되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걸 알 틈도 없이 그들은 지하에 고립되어 버렸다. 아니, 지상으로 나갈 수는 있었다. 그저 거지와 부랑아들처럼 몸을 숨기고 다녀야할 뿐.
이젠 그마저도 쉽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지만 말이다.
"일찍 일어났군."
"...어쩌다 보니."
근무 교대를 마치고 돌아온 이는 짧은 대화를 끝으로 제 침낭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게 정말 졸려서인지, 아니면 이 믿기지 않는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잠을 선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같이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이 드높았던 이들이다. 이 상황을 덤덤히 받아들인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몇 주나 이어진 도망자의 삶은 그들의 감정과 기력을 모두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그랬기에 도망쳐 온 악마 숭배자들과 아무런 반발없이 손을 잡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은 일어났을 때 먹으려고 남겨둔 눅눅한 빵을 씹으며 움직였다.
"악마 숭배자들에게 간다."
경계 근무를 서고 있던 이들은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소년은 그들이 며칠 전에 악마 숭배자들이 일으켰던 대규모 마나 소실 사건으로 크게 불안해 하고 짜증 냈던 것을 기억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서 한 번 정도 흘러가듯 내뱉을 수 있는 불평불만조차 입에 담지 않는 것은 그들이 귀족으로서의 위신을 생각하고 뒷담을 까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어차피 욕하고 의심해봤자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낀 소년은 마주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들을 지나 수로를 걸었다.
자포자기한 채 그저 숨만 쉬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삶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심지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감정이 복받쳐오르거나 하진 않았다. 어쩌면 그들이 위치한 곳이 지하인 탓에 심하게 우울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잠깐 들었을 뿐이다.
신비한 마법으로 유지 및 보수가 이루어지며 주기적으로 인간의 발길이 닿는다고 한들 지하 수로는 결국 말 그대로 지하에 위치한 수로에 불과했다. 급하게 도망친 이들이 장기간 지내기엔 결코 쾌적한 환경이 아닐뿐더러 막혀 있는 천장은 자신들이 고립되었음을 끊임없이 자각하게 만들었다.
"하늘을 본 지도 오래됐네."
마지막 외출이 일주일 전이었던가. 어쩌면 그때가 하늘을 볼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저 숨어있었을 뿐인 자신들과 달리 악마 숭배자들은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추적을 막기 위해 자신들이 왔던 지하 수로의 통로를 무너뜨리면서까지 수도로 들어온 그들이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할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점점 다가오는 죽음에 깊은 우울감을 느끼며 소년은 꾸준히 걸음을 옮겼다.
최소한, 곱게 죽을 수 있기를.
◈
"지크. 녀석들이 게이트를 만들고 있는 거 같아요."
셰릴의 계획서를 들고 지크프리트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더니 에셀루아가 갑자기 들어오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나와 지크프리트는 서로를 바라보며 잠깐 의아함을 공유했으나, 그건 에셀루아의 이야기가 뜬금없어서가 아니라 이야기의 주체일 게 분명한 악마 숭배자 새끼들이 대체 뭔 생각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족 숭배자들이면 모를까, 악마 숭배자들이 게이트를? 굳이 제 탈출구까지 박살 내며 수도로 들어온 이유가 그거라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동생은 이해가 되나?"
"뭐 어디 악마 놈들이 사는 곳과 연결되는 게이트라도 여는 게 아닌 이상에야..."
열심히 머리를 써봐도 생각나는 건 순 허무맹랑한 거 뿐이길래 가장 허무맹랑한 걸 입에 담았는데 어째 에셀루아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그게 맞는 거 같아요."
"...예?"
"며칠 전에 있었던 마나 소실 현상이 아카데미 뿐만 아니라 수도 곳곳에서 일어났다고 해요. 그걸 기반으로 성광십자회의 성기사들은 놈들이 수도 한가운데에 악마들의 세계와 연결되는 게이트를 세울 계획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순간 지크프리트도, 나도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리고 나는 지크프리트가 심각해진 이유가 단순히 악마들이 넘어온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다른 차원으로 이어지는 게이트라는 게... 그렇게 쉽게 만들어져?"
같은 지구인이기에. 지크프리트의 얼굴에서 묘한 감정이 일렁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에셀루아는 그런 지크프리트의 변화를 단순한 의문 정도로 받아들였는지 그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일반적인 마법 게이트는 아니고, 고위 악마와 계약해 놈의 능력을 빌리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어요."
악마라는 새끼들이 지니고 있는 능력이라는 게 천차만별인데 개중에는 이딴 개짓거리가 가능한 놈도 있다는 게 에셀루아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채 급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인 탓에 시간도 오래 걸리고 악마를 현신시켜 능력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육체를 통해 사용하는 거라서 대규모의 마력을 요구하는데, 그 과정에서 며칠 전의 사건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크프리트는 미간을 찡그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장 움직이자."
"지크, 우리는 제국인이에요. 이미 성광십자회가 움직이기도 했고..."
"난 용사야. 용사는 제국을 지키는 게 아니라 인류를 지켜야 하잖아."
솔직히 좀 멋있었지만, 그럴 거면 아카데미 생활 좀 열심히 하지 라는 생각도 같이 들어서 박수를 치는 대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주워 먹고 있던 쿠키를 씹으며 둘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마음가짐은 좋지만 우리는 내일 움직일 거니 그냥 앉아 계십쇼."
"동생? 너무 태연하다?"
"태연할 만 하니까 태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악마들이 존나 쏟아져 나올지도 모르는데?"
그딴 놈들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도 다 죽일 자신이 있는 건 별개로 치더라도 내 여유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럴 일 없습니다. 악마 새끼들 현신하는데 필요한 제물은 겨우 그 정도가 아니니까요."
제단성애자 잉글라디우는 백명이 넘는 피를 흡수하고도 제대로 현신조차 못했다. 기본적으로 혈마법은 부작용이 있는 만큼 마나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니, 결국 놈의 육체를 구성하는데 백명 분의 피가 혈마법의 재료로 소진된 거라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그 꼴이었다. 겨우 마나 조금 마신걸로 악마가 쏟아질 수 있다면 세상은 진즉에 그 씹새들의 놀이터가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런 편리한 능력이 있는데 왜 그 새끼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려면 많은 제물을 요구하겠습니까? 무시할 수 없는 제약이 있을 게 분명합니다. 설령 이곳에 넘어 온다 하더라도 치명적일 정도로 제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던가, 일종의 가불같은 형태로 일단 넘어온 뒤에는 제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제물들을 빠르게 수급해야 한다던가 말이죠. 전자라면 알아서 사릴 것이고, 후자라고 해도 눈치를 볼 겁니다. 더 많은 제물을 더 빠르게 바칠 수 있는 최적의 순간을 위해 말이죠."
결국 우리에겐 하루의 유예 정도는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쿠키나 가져와라 용사.
어깨를 으쓱이며 느긋하게 쿠키를 먹는 나를 벙찐 표정으로 바라보던 지크프리트는 뭔가를 더 말하려고 하다가 이내 포기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지크프리트가 굳은 결심을 마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동생. 역시 우리 파티에..."
"아, 안 한다니까 그러네."
독한 놈같으니. 포기할 줄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