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크프리트와 이야기하고, 집에 돌아가 아실리에에게 악마 숭배자들로 인해 주변이 소란스러울 수 있으니 유의하라는 말도 전하는 둥 조금은 바쁘게 보낸 탓일까. 하루가 순식간에 흘러가고 어느덧 바퀴벌레 소탕 작전을 시작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렇다고 해서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지는 않았다. 나와 지크프리트와 달리 학생들은 수업을 들어야 했으니까. 아무리 거사를 치른다고 하더라도 수업 시간을 빼먹어서야 나중에 체면이 안 살기도 하고, 나 역시 남은 시간동안 마무리 지을 일이 있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약속 시간이 다가오는 지금, 아슬아슬하게 마무리 지어진 개인 교습을 마친 세네란이 끼고 있던 안경을 닦으며 내게 물었다.
"집중적으로 알려달라고 해서 그간 도와주기는 했지만... 이건 어떻게 쓰려고 하는 거야? 아직 마법도 안 배웠잖아."
최근 며칠간 집중적으로 배우던 이론은 여러 차례의 검증과 실험 끝에 아주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주었다. 에셀루아에게 악마들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날부터 스승님과 세네란 모두에게 부탁해 조금은 서두르다시피하며 배운 내용이었지만, 다행히 이미 지식과 마력 기관이 없던 상태에서도 가능하던 터라 배우는 데 있어서 딱히 막히는 구석은 없었다.
오히려 지난번 지크프리트와의 대련 덕인지 몰라도 훨씬 수월했다. 아무래도 난 몸으로 굴러가며 익히는 타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옆에 두고 있던 검을 들어 마력 연결을 해 보니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게 느껴졌다.
"악마들 상대하는 기술로 아주 제격이거든요."
이제 와서 딱히 감출 것도 없었기에 덤덤히 대답해주자, 내가 공부하며 정리한 내용을 한 차례 살펴보던 스승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마력 확산이? 이건 잘해봤자 색적용일텐데?"
"흠, 이건 직접 보는 편이... 저게 좋겠네요. 저거, 사과."
아무래도 직접 눈으로 보는 게 빠를 거 같아서 검을 든 채 간식으로 먹기 위해 사 놓은 사과를 가리키자, 세네란과 스승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그와중에 세네란은 내가 뭘 하려는지도 모르면서 두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정말 마력과 연관된 일이면 뭐든 열성적인 사람이다.
"예전에 제국에서 게이트 타고 날아갔을 때 만난 마족 목 딸 때 쓴 방법인데... 검집과 검에 마력을 따로 연결하고, 그리 연결된 마력을 교두보 삼아 마력을 사용하는 대상의 몸과 머리통에 개입하면 재밌는 결과가 나오더라구요."
엄지손가락으로 크로스 가드를 살짝 밀어올리는 것만으로도 별다른 저항 없이 검이 뽑혀 나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사과가 쩍! 하고 반으로 쪼개졌다.
"이게 사과라서 별 저항이 없이 쉽게 된 건데, 마족은 좀 더..."
"잠깐. 잠깐 기다려."
자연스럽게 설명을 이어 나가려고 했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제지한 세네란이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사과와 검을 번갈아 봤다. 그러다가 불현듯 탁자로 다가가 다른 사과들을 열심히 만져 보며 마치 마술의 트릭을 찾아내려는 관객과도 같은 반응을 보인 끝에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진짜야?"
"뜬금없이 이런 거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뭔가 이상한가? 혹시나 싶어 스승님을 바라보니 오히려 세네란보다 더 놀란 반응이다.
"이게... 대체..."
...이상한가 보네. 내가 그들의 반응에 적응할 틈도 없이 세네란이 외쳤다.
"이런 미친 세상에! 마장금도 아닌데 마력만으로 물리력을 행사한다고?!"
"어... 뭔 소린지 잘 모르겠지만 조금 다를 거 같긴 한 게, 이게 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쥐어뜯는 개념이 아니라 마력과 마력을 이어서 하는 거거든요?"
아무래도 오해가 있어 보여서 바로잡고자 이야기를 꺼냈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내 말을 들은 세네란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스승님을 바라보자 이번엔 스승님이 세상 무너진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읊조렸다.
"외부의 마력에... 주문 없이 자신의 마력으로 간섭한다고...?"
뭐가 됐든 간에 결코 가벼이 넘어갈 내용은 아니었나 보다.
◈
결국 한바탕 대소동이 있고 난 뒤에야 교수실을 벗어난 내가 약속 장소에 도착한 것은 정해진 시간에서 5분 정도 늦은 뒤였다. 잘 가꿔진 정원 한 켠에 모여있는 열 명 정도 되는 반가운 얼굴들을 향해 적당히 손을 흔들며 다가가니 뚱한 표정을 지으며 셰릴이 말했다.
"늦었잖아."
"일이 좀 생겨서."
연구에 혼을 판 사람들이 붙잡느라 늦었다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무럭무럭 솟아올랐지만 두 사람의 명예를 위해 내 과실로 남겨두기로 했다. 그래도 공짜로 얻는 게 있는데 이 정도는 넘어가줘야지.
그녀가 먼저 나서서 따진 덕인지는 몰라도 다른 이들은 딱히 나를 추궁하지 않았다. 어쩌면 알게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는 탓에 그럴 여유조차 없는 것일지도 몰랐지만, 난 일단 미리 맞춰 놓은 대로 말하며 분위기를 환기 시켰다.
"늦어서 미안하다. 이미 셰릴에게 사정은 전해 들었다. 본디 이런 건 군대나 성기사분들께 맡기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만...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사건에 엮여 있는 이상 모두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제국 아카데미와 달리 왕국 아카데미는 절대다수가 귀족이거나 그에 준하는 재력가들이다. 그들에게 명예란 매우 중요한 요소였고, 셰릴은 이를 기반으로 학생들을 움직이며 나와 지크프리트가 움직여도 이상하지 않을 수 있는 판을 열심히 깔아 놓았다.
"그래도 악마 숭배자들이 숨어든 뒤로 뭐가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지하 수로에 너희만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용사님의 도움을 받아 동행하기로 했다. 악마를 상대할 수도 있기에 내린 결정이니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한다."
정확히 실기 과목의 등수대로 모인 다섯 명은 내 말을 듣고 나서야 왜 용사파티가 여기 있는지 이해했다는 듯 '아'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그들과 묘한 선을 그은 채 어색함을 연기하고 있던 지크프리트가 적당히 손을 들어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나는 구체적인 계획 설명을 셰릴에게 맡긴 채 지크프리트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역시 제국에서 망나니 노릇하던 게 있어서 그런가 연기 잘하시네요."
"그럼, 내가 거기서 속여 먹은 놈들이 몇인데. 이 정도는 일도 아니지."
태연하게 너스레를 떨면서도 표정은 여전히 뚱하게 짓고 있는 지크프리트 녀석은 자신의 대검을 꺼내 어깨에 걸쳐 얼굴을 가린 다음에야 넉살 좋게 웃는 치밀함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괜찮겠어? 어떤 악마를 만날지도 모르는데."
"계획한 대로 나눠져 움직이면 못해도 도망쳐서 연락을 취할 정도의 여유는 있습니다. 저도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움직일 생각이구요."
애당초 그럴 목적으로 용사파티와 학생 여섯을 반으로 쪼개 팀을 구성했다. 솔직히 지크프리트에게 성녀만 붙여서 팀을 하나 더 만들까 싶기도 했지만 혹여라도 혈기 왕성한 학생들이 주제 파악 못 하고 애먼 곳에 돌격할지도 몰라 참기로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용사파티의 명성이 있으니 그들을 무시하고 돌격을 시도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용사가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거 말고. 동생 말이야. 혼자서 괜찮겠냐고."
내 옆에서 거의 한시도 떨어지지 않아 이젠 없는 게 더 어색한 라이카였지만, 아실리에에게 연락하기 위해 이번엔 집에 돌려보낸 상태였다. 그러니 지크프리트의 말대로 난 정말 간만에 혼자 움직이게 된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어중간하게 같이 움직이면 속도가 느려져서 학생들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적적하겠다는 생각만 들 뿐 불안하진 않았다. 어쩌다 보니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과 돌아다녔던 것일 뿐, 난 원래 혼자 움직이는 훈련을 더 많이 한 편이다.
마왕군에게 가는 여정을 누구와 같이 할 계획은 없었으니까. 쉬는 게 여의치 않을 뿐이지 아무런 지장도 없다. 오히려 누구랑 같이 다니면 마력 쓴다는 거 들킬 가능성이 있으니 더 번거로워진다.
"그러니 제 걱정은 마시고 학생들이나 잘 좀 부탁드립니다."
"...그래, 걱정 마라."
그런 속사정을 알 길이 없는 지크프리트였지만 그래도 내 실력을 믿는 것인지 별 말 없이 수긍했다. 그러는 사이 학생들과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셰릴이 손짓했고, 나는 용사파티와 함께 그들에게 합류했다.
그리윌스와 실기 3등이었던 칼리츠까지는 그래도 이름을 알았지만 나머지는 도무지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순서대로 4, 5, 6등이었던 건 알겠는데 침착하게 머리를 굴려 봐도 역시 모르는 건 모르는 거였다.
"셰릴과 그리윌스 그리고 칼리츠가 에셀루아 황녀님과 엔티레 님과 동행한다. 4, 5, 6등. 너희는 용사님과 제국 신성회의 성녀님을 따라 가도록. 진입은 내가 먼저 하겠다."
그래서 그냥 수업 때 보여줬던 것처럼 뻔뻔한 태도로 밀고 나갔다. 내 당당한 태도에 '그때 했던 말이 진짜였구나.' 정도의 반응을 보인 학생들과 달리 두 눈을 크게 뜬 채 경악하며 세상 몹쓸 쓰레기라고 본 것처럼 반응한 지크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동생?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야!"
"또 뭐라는 겁니까."
"쟤들 이름 정도는 기억해 줘야지!"
"전 제가 한 말을 지킬 뿐입니다."
친절한 동화 속 기사님 흉내에 익숙해져 있던 탓인지 용사파티가 괴리감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 자리에서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난 그냥 모르는 척 셰릴에게 눈짓했고, 귀신같이 알아들은 그녀는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도권을 이어받아 학생들의 무장을 마지막으로 점검한 뒤 용사파티와 함께 조사할 위치와 합류 지점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홀로 다닐 내가 추가로 알아야 할 사항은 없었기에, 난 그들을 뒤로한 채 맨홀처럼 생긴 수로의 입구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