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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85화 (285/412)

셰릴은 성녀 테네아시에게 했던 단호한 대답만큼이나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아갔다.

되도록이면 정찰을 할 수 있는 위치였으면 좋았겠지만, 하필 적들이 자리 잡은 곳은 외길인 곳이었기에 어차피 몸을 감추고 접근할 방법도 없어서 내린 선택이었다. 아무리 반역죄가 두려워 도망친 이들이라 한들 그래도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던 인재였으니 당연한 결과이긴 했으나, 그래도 조금은 더 편하게 사건을 마무리 짓고 싶었던 셰릴은 자신을 향해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정해라. 여기서 죽을지, 아니면 지상에서 죽을지."

검을 뽑아 들었을 뿐 한없이 여유로운 그 태도에 뒤에 있던 이들조차 방심을 유도한 기습인가 의아함을 느꼈지만 셰릴은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적들을 보며 꼼짝도 하지 않음으로써 방금 한 말이 항복권고이며, 진심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씨발 오가토르프다! 일어나! 오가토르프가 왔..."

그리고 적들이 자신의 권고를 무시하고 무기를 고쳐쥐자마자 번개처럼 앞으로 뛰쳐나갔다. 아무런 준비동작도 보이지 않았음에도 잠깐 시야에서 놓칠만큼 빠르게 움직이며 보초를 서고 있던 둘 사이로 파고든 셰릴에게 반응하며 뒤로 물러나는 순간 셰릴이 뛰어오르며 깔끔하게 회전했다.

그러자 깔끔하게 호를 그리며 그녀와 함께 휘둘러진 검이 허공에 빛을 새겨 넣었다.

적들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뒤에서 보고 있던 테네아시는 셰릴이 갑자기 춤이라도 추는 줄 알았다. 정말 썡뚱맞은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원을 그리며 착지한 셰릴이 들고 있던 검을 터는 것과 적들의 경동맥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본 뒤에야 일행들은 그녀가 방금 보여 준 동작이 공격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친 저게 말이 돼...?"

"뭐, 셰릴이니까요."

동작이 너무 빨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먹은 엔티레와 달리 덤덤한 4등과 6등이 그녀의 뒤를 따라 앞으로 나섰다. 그에 테네아시와 엔티레도 자연스럽게 따라 움직였지만 충격이 가신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엔티레였다.

저런 반응으로 끝날 일이라고? 그럴 리가 있나. 바짝 긴장하고 있었음에도 순간 검이 안 보였다. 그런 속도로 휘둘러졌음에도 서로 다르게 움직이는 두 사람의 목을 정확하게 노려 급소를 벤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녀도 폼으로 검술에 빠져 사는 게 아니다. 스스로 용사의 일행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그만한 실력도 있다고 믿어온 엔티레였지만 셰릴이 방금 보여 준 단 한 번의 동작만으로도 자신감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어찌 보면 묘기와 다를 바 없는 검술이라 평가할 수 있겠지만 실전에서 상황에 맞춰 얼마든지 성공 시킬 수 있다면, 그건 이미 묘기가 아니라 고등 기술이다.

자신이 방금 본 것은 결코 요행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느낀 건 엔티레만이 아니었다. 처음엔 경고에 반응해 반사적으로 일어났던 일곱 명의 적들 중 절반 가까이가 무기를 내려놓은 것이다.

"이, 미친 새끼들아! 어차피 죽는다고! 싸워!"

내분까지는 아닌지 서로에게 검을 겨누는 일은 없었으나, 대응이 늦어진 것은 명확했다. 셰릴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적들 사이로 파고들어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불안과 당혹감 속에서 검술도 뭣도 없이 휘둘러진 검을 받아 내며 스치듯이 휘둘러진 검은 가차 없이 적의 힘줄을 잘라 내고 급소를 노렸다. 베였다는 걸 자각한 적이 황급히 몸을 웅크리는 것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은 채 발을 움직인 셰릴의 검이 이번엔 옆에서 치고 들어오려고 한 이의 팔목을 베고 허벅지 안쪽을 깊숙이 찌른다.

하나같이 일격에 숨통을 끊을 수는 없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치명상을 야기하는 공격에 치를 떨며 주춤거리는 적들을 보며, 셰릴은 지치지도 않고 한 번 더 파고들었다.

"습격이 시작된 거 같군."

악마 숭배자의 덤덤한 중얼거림을 들은 소년은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마치 우중중한 하늘을 보며 곧 비가 오겠군 이라고 중얼거리는 듯한 자연스러움과 말에 담긴 심각성의 갭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뭐라고?"

"왕국이 움직였다. 다행히 네 동료들 쪽이 먼저 부딪친 것 같군. 서두를..."

소년의 검집에서 뽑혀 나온 검이 악마 숭배자의 목을 겨눴기에 그는 말을 멈췄다. 하지만 침착한 눈으로 자신의 목젖에 드리워진 검을 바라볼 뿐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악마 숭배자가 여전히 가라앉아 있는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날 겨누지?"

"첫 번째 이유는 너희가 우릴 감시하고 있었다는 걸 이제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내 동료들이 습격 당한 건 조금도 다행스럽지 않기 때문이지."

소년의 대답과 행동에 분주히 움직이던 열댓 명의 다른 악마 숭배자들이 모두 손을 멈추고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 돌발상황에 당황하거나 분노하는 등 감정적인 변화를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일관된 침착함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소년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듯한 착각 속에서 자신이 고립되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애초에 엔벨데 백작과 협력했다는 점에서 신뢰하면 안 되는 놈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몰려왔지만 이미 늦은 후회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당장 가서 도와."

"살면서 단 한 번도 진정한 악마 숭배자를 만나지 못했나 보군. 죽음으로는 우리를 협박할 수 없다네."

"왜? 너희는 안 죽기라도 하나?"

"아니. 어차피 우리의 숭배는 죽음으로 완성되기 때문이지."

악마 숭배자는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 자연스럽게 소년의 검에 목을 대고 가볍게 긁었다. 통증에 살짝 얼굴을 찡그리긴 했지만,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확실하게 난 상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소년은 미간을  찡그리며 하마터면 검을 뒤로 뺄 뻔했다.

사실 빼도 별 차이 없을지도 몰랐다. 악마 숭배자는 스스로의 목을 한번 베고 끝낸 게 아니라 여전히 칼날이 제 살점을 파고든 자세로 소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살아서 그분의 강림을 위해 힘쓰든, 죽어서 또 하나의 제물이 되든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니 이런 협박은 소용없지. 차라리 우리를 따라 오면 복수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다."

"성광십자회의 총본산에서부터 모든 것을 잃고 여기까지 도망쳐 온 너희들이 뭘 할 수 있는데?"

욱해서 튀어나온 질문임과 동시에 소년과 동료들 모두가 품고 있었던 의문이기도 했다. 협력하자는 말을 듣고 물자를 옮기는데 도움을 주고받았을지언정, 악마 숭배자들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소년은 알지 못했다. 그저 저들의 침착한 태도를 보며 무언가 있을 거라는 희망아닌 희망을 지녔을 뿐.

그마저도 이제 와서는 미치광이들을 알아보지 못해 속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의 질문에 악마 숭배자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소름 끼치도록 인위적인 미소였다.

"우리는 잃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었고, 그랬기에 원래 계획을 수정해서 더 큰일을 준비하려고 이곳에 왔을 뿐이지."

"뭐?"

그는 대답 대신 천천히 손을 뻗어 다른 악마 숭배자를 가리켰다. 그러자 지적당한 악마 숭배자가 품을 뒤적여 작은 목함 같은 것을 꺼내보였다.

"금방 말하지 않았나. 우리의 숭배는 죽음으로 완성된다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나?"

목함이 열렸고, 동시에 소년은 헛구역질을 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러니 모든 게 강림을 위한 안배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지. 멋진 감응 능력이야. 그래, 저 위대한 기운이 느껴지나?"

소년의 머릿속에 좀 더 어릴 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형과 함께 처음으로 대련을 하게 된 날, 그의 형은 동생의 안전을 위해 목검보다  목검에 두른 모포가 더 많은 수준의 물건을 들고도 일방적으로 소년을 무력화시켰었다. 그중 마지막 일격은 가벼운 뇌진탕을 일으킬 정도로 강렬했다.

아무리 안전한 것 같더라도 방심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일부러 힘을 줘 휘두른 그 공격을 왜 지금까지 잊고 있었을까.

"대체... 나에게 무슨 짓을 한...우욱!"

현기증이 나고 손발이 떨리는 등 신체를 주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소년은 결국 검을 놓치고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박았으나 악마 숭배자들은 그 모습을 덤덤히 바라볼 뿐 그 어떠한 이상 증상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네. 그리고 난 자네가 부러울 지경이야. 우리 같이 미천한 것들은 저 힘을 느끼지조차 못하거든."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위로 향하자, 여전히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고 있는 악마 숭배자가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그릇'이 되어 사라지겠지만 복수는 할 수 있을 거야. 위에서 동료들을 죽인 이들 뿐만 아니라 왕국 전체에 말이지."

생각조차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 목함을 들고 있던 이가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낮게 웃으며 물러난 악마 숭배자가 목에 난 상처를 치유할 생각도 하지 않으며 만족스럽게 두 팔을 벌리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소년은 그들이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는 것에 분노하기보다 오래된 가르침을 잊고 살았다는 사실에 후회했다.

'넌 솔직히 우둔하다. 둘을 가르치고 또 둘을 가르치려고 하면 꼭 하나는 까먹지. 하지만 이것만큼은 절대 잊지 말았으면 하는구나.'

누구보다도 듬직하고 기사답던 형의 가르침을 잊은 대가는 컸다.

그것만큼은 명백히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랬기에 소년은 허탈함 속에서도 스스로의 어수룩함을 한탄하며 웃을 수 있었다.

"하... 델트 형. 미안..."

소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목함에서 튀어나온 검붉은 무언가가 그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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