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정리된 상황 속에서 항복한 이들을 포박하는 와중에 가장 빠르게 이변을 눈치챈 것은 테네아시였다.
하지만 그녀가 걸어 준 축복으로 변화에 둔감해졌음에도 셰릴 역시 불쾌감이 치솟는 것으로 뭔가 일어났음을 직감했고, 자연스럽게 테네아시에게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성녀님?"
"...지크프리트와 합류해야 합니다. 그는 악마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니 이 상황을 모를 겁니다."
"악마인 겁니까?"
"네, 맞습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할 수 있는. 엔티레! 먼저 가주세요!"
"뭐? 나만? 왜?"
"이분들께는 설명해야만 하는 게 있습니다. 낭비할 시간이 없으니 어서!"
순간 경직되는 일행들의 얼굴을 보며 테네아시의 머리가 유례가 없을 만치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달려가는 엔티레가 자아내는 소음조차 잊을 정도로 깊은 고민에 빠진 테네아시는 이 사악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존재와 거리가 가까워서 이런 압박감을 느끼는 것인지, 거리가 있음에도 이 정도인 것인지 분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지난 전투로 인해 힘을 너무 소비해서? 쉽지 않은 전투였다는 건 분명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지칠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오롯이 느껴지는 사악한 기운이 원인이라는 건데... 이렇게까지 감각을 뒤죽박죽으로 건드릴 수 있는 경우는 그녀가 알기에 딱 두 가지뿐이었다.
대악마 내지는 대공이라 칭해지는 존재들이 현신했거나, 그만한 존재의 힘을 통해 누군가가 게이트를 열어 이계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는 경우.
그랬기에 테네아시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후자라면 저지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와 부딪친다면 그냥 죽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공이라는 호칭은 인간이 붙인 게 아니라 저 사악한 악마들이 붙인 거였고, 그만한 힘이 있기에 붙은 거였으니까.
"대악마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한 힘을 지닌 악마의 도움을 받아 이계로 이어지는 문을 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막을 수 있거나, 없거나로군요."
"네. 저는 여러분들이 지크프리트와의 합류를 기다렸으면 합니다."
여지를 주는 것은 그녀가 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목적은 도움을 주는 것이지 강요하는 게 아니었다. 이들이 합류를 위한 후퇴를 거부한다면 테네아시는 그 의사를 존중해야만 했다.
"제가 혼자 정찰을 다녀오겠습니다. 성녀님은 이들을 데리고 용사님과 합류해주십시오."
셰릴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테네아시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입에 담았다. 그러고는 그녀가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자신이 그러한 판단을 내리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은 이 기운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결국 저나 성녀님 둘 중 한 명이 필수인데, 성녀님을 모시게 되면 필연적으로 호위가 필요하고 그럴 경우 기동력에 문제가 생겨 급히 퇴각해야 할 때 그러지 못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다행히 그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가 쥐고 있죠."
짐짓 오만하다고 느낄 수도 있으나 전부 사실이었다. 그냥 다 같이 다음을 기약한다는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테네아시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런 테네아시의 주저를 눈치챈 것처럼 셰릴이 구태여 말을 덧붙였다.
"왕실 수호를 맹세한 오가토르프 가문의 소가주로서, 이는 제 의무입니다."
그 말은 테네아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
"분명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거 같은데 어째 죄다 허탕이네."
수로에 들어온 뒤 셰릴이 예측한 위치 중에서도 흔적이 확실한 곳을 먼저 찾아다녔음에도 적들과 조우하지 못한다는 게 참으로 골 때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셰릴의 예측이 틀린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가는 곳마다 거주의 흔적있거나 무언가 정체불명의 마도구 같은 게 설치되어 있어 절로 감탄과 박수가 나올 정도였다.
마력시를 통해 열심히 살펴보며 죄다 작살을 내놓기는 했는데, 이미 이렇게 방치된 시점에서 그 용도를 다 했을 가능성이 높았으니 그다지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고도 예정보다 빠르게 내가 맡았던 구역을 다 확인하게 되어, 꼴에 추리를 좀 해 보겠다고 임의의 위치를 수색해봤지만 이미 흔적에서부터 허탕이었기에 포기하기로 했다.
"하여간 재주도 좋아. 전략 전술까지 배우면 이렇게 되는 건가?"
이런 지식까지 익히고 있으면서 검술에서 좀 못 이긴다고 찡찡거린다니 참 욕심 많은 꼬맹이다. 일단 더 이상 머물 이유도 없어 품에 넣어 두었던 지도를 펼쳐 체크된 위치를 살펴보니, 내가 잠깐 헛짓을 하며 딴 길로 빠진 덕에 지크프리트의 파티가 조사하기로 했던 구역과 꽤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날 수 있다면 굳이 접선 지점까지 돌아갈 이유도 없지. 어차피 내 쪽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건 다른 사람들 쪽에 뭔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니 결국 합류는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왕국의 수도 아래에 있는 지하수로답게 그 흔한 몬스터 한 마리 마주하는 일 없는 것에 감탄하며 서둘러 움직이는 내 눈에 묘한 게 보이기 시작한 것은 지크프리트 파티의 조사지점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마력이 왜 이렇게 움직여?"
마법은 아니다. 마력이 아예 수로의 벽을 뚫고 빠르게 특정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방향이 지크프리트가 있을 거라 예상되는 곳도 아닐뿐더러 저만한 마력을 움직일 능력의 마법사도 없었으니까.
지상이었다면 당장 벽을 박살 내고 일직선 통로를 개통해서 파악하러 갔겠지만, 지하에서 그런다고 길이 뚫리는 건 아니었기에 일단 눈에 들어오는 마력의 줄기 중 큼직한 것들을 검으로 베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솔직히 이만한 양의 마력 앞에 이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방치하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그렇게 이동하면서도 이상한 건 끊이지 않았다. 지크프리트의 파티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앞에서 전투라도 있었나?"
아무 일도 없이 지나쳤다면 이렇게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을 터라, 지크프리트 파티가 당첨 뽑기를 뽑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좀 더 빠르게 움직였다.
"에, 에가 조교님?!"
"조교님이 왜 그쪽에서 나오십니까...?"
그렇게 서두르다 보니 결국 중간 접선지점까지 일직선으로 내달리게 된 내가 마주한 것은 지크프리트 없는 지크프리트 파티였다.
"어쩌다 보니 그리 됐다. 에셀루아 황녀님? 뭔가 발견하신 겁니까?"
적당히 대답은 했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딱 봐도 포로가 된 반역자 몇 놈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셰릴과 성녀 그리고 지크프리트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부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하기도 전에 에셀루아가 다급하게 설명해줬다.
"셰릴 경이 향했던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했어요. 그녀가 홀로 정찰을 나가고, 나머지 일행들을 이곳으로 보낸터라 지크프리트가 급하게 테네아시만 데리고 뒤따라간 상황입니다."
"문제요?"
"악마 숭배자들이 대악마를 현신시키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 새...흠. 그놈들이 무슨 제물이 있다고 그냥 악마도 아닌 대악마를?"
단순히 가불로 땡겨서 소환한다면 우리가 선빵을 친 탓에 급한 건 그쪽일 테고, 가불로 땡길 수가 없다면 놈들은 아직 제대로 된 소환조차 못했을 것이다. 아까 내가 주구장창 베어왔던 마력의 줄기가 그런 소환 의식의 여파라고 한들 잉글라디우와 비교해 보면 정말 새 발의 피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수준이니 그다지 위협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입술을 깨무는 에셀루아가 내뱉은 말은 내 안일한 예측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놈들이 단순히 도피를 위해 수도로 온 게 아닐지도 몰라요. 테네아시는... 성광십자회의 총본산에서 치른 전투를 통해 악마 숭배자들이 이미 제물의 준비를 대부분 마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거든요."
순간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끝내주는 인내심으로 겨우 막았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광십자회와 용사파티가 병신 머저리도 아니고 피 한 방울 남아 있지 않은 시체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 걸 보면서도 이런 사태를 예측하지 못했을 리가 없지. 그런 조짐을 못 느꼈으니 예상도 못 한 거 아니겠어?
"...제가 만났던 악마는 피를 매개로 현신했었습니다. 용사님이 조우한 악마들은 달랐나보군요."
진짜로 그냥 예측 못 한 거였으면 내 예측할 수 없는 분노도 같이 맛봐야 했겠지만, 그들에겐 다행스럽게도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맞아요. 안 그래도 가장 유의했던 게 죽음을 통한 제물화였는데 대체 무슨 방법을 쓴 건지..."
좋아. 그럼 내가 할 일은 단순하지.
"에셀루아 황녀님은 이들을 이끌고 위로 올라가 아카데미에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전 용사님을 따라가죠."
"하지만 추적이 쉽지 않을 텐데..."
"다 나름의 방법이 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급하게 움직이며 흔적을 남겼을 게 뻔하다고 한들, 돌 바닥 위에서 예상을 벗어난 경로로 이동한 이들을 찾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마력의 흐름이 너무나도 뚜렷해서 그런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 그러면 저희도 같이 가는 게..."
"걱정되는 마음은 알겠지만, 느려집니다. 만에 하나 도망치게 되더라도 말이죠."
지크프리트가 어지간히 걱정되는 눈치였지만 나 역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기에 칼같이 끊은 뒤 눈에 보이는 마력을 따라 내달렸다.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고 했던가.
다행히 롱캣 셰릴은 호기심따위로 죽을 일이 없지만, 노블리스 오블리주 때문에 죽을 가능성은 매우 농후한 생물이었기에 난 최대한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