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칭 악마 숭배자로 통하는 이들을 이끌던 남자는 정중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만마전萬魔殿의 위대한 대공을 뵙습니다."
오랜 연구의 결실을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는 기쁨과 자신이 믿는 신앙의 대상이 그로 인해 현신했다는 사실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남자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제물의 몸에 모든 기운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이상 이변은 없었기에 혹여라도 의식이 실패했을 거라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소년이 비척거리며 일어나는 동안에도 무방비한 모습을 유지하며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윽고 완전히 몸을 일으킨 소년이 제 몸을 훑어보며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사내의 몸이라니 불쾌하구나. 허나... 문으로 쓰기엔 적당하군. 다들 잘했다.]
성공했다. 심지어 칭찬마저 받았다. 가슴에서부터 벅차오르는 감동에 다른 숭배자들이 소리 없이 훌쩍이는 사이 남자가 말을 이었다.
"용사의 예기치 못한 등장으로 계획을 조금 변경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거둘 수 있는 생명이 오히려 더 많아졌기에, 예상보다 조금은 더 도움이 될 것이라 사료됩니다."
[실로 그러하구나. 이건... 재밌는 몸이야. 어디서 이런걸 찾았지?]
"세상이 신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증거에 불과합니다."
[흐음, 우연이라? 역시 이곳은 재밌어.]
소년의 몸에 들어앉은 악마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며 아직은 불안정한 현신을 즐겼다. 이번 일은 악마에게 있어서도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과거였으면 생각도 못할 위업을 이룬 거였으니 잠깐 즐기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여겼다.
[넌 정말로 유능하구나. 내 너희에게 지식을 전수해주면서도 반신반의했으나, 술식을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왕국의 수도에서 이를 시행하다니.]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건 오롯이 크루멜리아 대공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일부는 지식을 탐미하는 자로, 일부는 중독자로 부르는 대악마 크루멜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확실히 쓸모 있는 인간이었다. 말 잘 듣는 애완동물로 오랫동안 가지고 놀만 한 가치 정도는 있다고 여길 정도로.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먼저 가지고 놀 장난감이 있었다.
[그래. 내가 바로 지식을 탐미하는 자, 대악마 크루멜리아다. 그런데... 거기 숨어 있는 너는 누굴까?]
악마 숭배자들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기도 전에 크루멜리아가 가볍게 휘두른 손끝에서 검붉은 가시가 순식간에 뻗어 나가며 그들이 머물고 있는 회랑 끝자락에 위치한 벽까지 날아가 틀어박혔다. 그 일격에 벽의 모퉁이가 뭉텅이로 터져 나가며 돌가루가 비산했지만 크루멜리아는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걸 피하네?]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당황하지 않고 재빠르게 피한 셰릴은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치고자 했다. 완전한 현신이든, 불안정한 현신이든 대악마를 상대할 방법은 그녀에게 없었다. 스스로의 실력과 준비 상태를 결코 과신하지 않았기에 그녀의 행동은 일말의 주저도 느껴지지 않을만큼 재빨랐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려고 하니? 인사 정도는 받아줘도 될 텐데.]
하지만 다섯 걸음을 떼는 순간, 셰릴은 왔던 길이 아니라 악마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에 경악하며 급하게 뜀박질을 멈추자 크루멜리아가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감각이 정상이 아니라서 어디로 뛰는 지도 몰라야 정상인데? 유능한 아이야. 너는 이름이 무엇이니?]
현신한 악마는 공간을 뒤틀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악마를 섬기던 제단이 있거나, 오랜 시간에 걸쳐 악마의 권역을 완성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이렇게 갑자기 현신을 했음에도 이만한 힘을 발휘할 거라 생각하지 못한 셰릴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자신을 보고도 여전히 크루멜리아에게 무릎 꿇은 채 그저 고개만 돌려 바라보고 있는 악마 숭배자들이 더욱 괴리감을 증폭시키는 와중에 크루멜리아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나는 대답을 못 들으면 슬퍼진단다.]
지식의 탐미자라서 말이야.
소년의 몸을 가지고 여자처럼 행동하며 웃는 몰골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날아든 검붉은 채찍을 낮게 숙여 피함과 동시에 검을 휘둘러 벴다. 그러자 검지만을 휘두르던 크루멜리아가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다섯 손가락을 전부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오래전 아버지와 함께 바다로 갔을 때 잠깐 봤던 연체 동물이 생각나서 셰릴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듯한 다리 많은 괴물은 예나 지금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앞으로 더욱 싫어질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셰릴이 안력을 높이며 공격에 반응했다.
다리와 머리를 동시에 노리는 채찍을 수평으로 눕다시피 뛰며 회전하여 동시에 베어내고, 착지하자마자 미간을 노리고 쇄도하는 채찍은 검의 면으로 가까스로 받아내 흘리는 동안 짧은 상황 판단을 마친 셰릴은 자신의 왼팔을 노리고 휘둘러진 마지막 네 번째 채찍을 베어냄과 동시에 크루멜리아를 향해 한번 더 파고들었다.
도망치지 못하면 싸운다. 이기지 못하면 시간을 벌 뿐이다. 왕국을 수호하는 검이 지녀야 하는 마음가짐이란 그런 거였으니까.
[유능한 부하를 둬서 정말 행복하다니까. 이런 재미난 아이는 또 어디서 구해 온 거람?]
설령 그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할지라도, 그녀는 시도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도 시간이 많은 건 아니니까... 잠깐 딴 짓 좀 할게?]
잘라 낸 채찍들이 좀 더 굵게 자라나며 이젠 채찍보다 촉수에 가까운 모습을 한 채 다시 날아드는 동안 크루멜리아는 자신의 복부에 오른손을 박아 넣었다.
[축제의 때가 왔다. 나를 섬기는 아이들아, 너희는 내 곁에서 피와 살점을 취하리라.]
오른손이 깊숙이 박혔음에도 크루멜리아의 몸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오른손이 박힌 부위부터 기묘한 뒤틀림이 발생하더니 점차 그 크기를 키워가며 정체불명의 구멍을 만들어냈다.
악마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은 셰릴조차 눈치챌 수 있었다. 저게 제국 신성회의 성녀가 말하던 게이트라는 것을. 다급해지는 셰릴을 보며 잔인한 미소를 지어 보인 크루멜리아가 말을 이었다.
[피 한 방울부터 영혼의 부스러기까지 사용될 제물의 힘을 통해 나 크루멜리아가 이곳에 문을끼아아아악?!]
그리고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발작을 일으키며 바닥에 쓰러졌다.
얼마나 놀란 건지 셰릴을 공격하던 촉수들마저 다시 그녀에게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고,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악마 숭배자들이 경악하며 그녀에게 뛰어갈 정도였다.
"대, 대공이시여!?"
[뭐,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아아악!!]
실패인가? 그런 것치고는 너무 당당했는데. 막 건져 올린 생선처럼 파닥거리면서도 제 배에서 오른손만큼은 뽑지 않고 있는 크루멜리아였으나, 갑자기 비오듯이 땀을 흘리며 고통스럽게 왼손으로 바닥을 짚고 있는 그 모습은 심상치 않았다.
[크으윽!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의식을 방해아아앍?!]
"대공이시여! 저, 저희가 무언가 실수를..."
[아니! 어딘가에서 마력을 휘젓어어어얽! 꺄아악! 멈춰! 씨발 멈추라흐아아악!]
끝까지 오른손은 뽑지 않았지만 이젠 검은 눈에서 검붉은 피까지 흘릴 뿐만 아니라 몸부림도 더욱 격해졌다. 거의 절규에 가까운 몸부림에 순간 지금 달려들어 목을 치면 끝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셰릴은 지금은 도망칠 때라는 걸 알았다.
좋은 검이라고는 하나 자신의 무기는 악마를 벨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설령 그게 빙의와 같은 형태로 현신한 악마라 할지라도. 그랬기에 셰릴이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줄행랑을 치려던 때.
"용사 등장!"
그녀가 왔던 길에서부터 한 손에는 무식하게 거대한 대검을, 다른 한 손에는 테네아시를 어린애처럼 안아 든 채로 지크프리트가 굉음을 자아내며 나타났다.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두른 지크프리트는 크루멜리아의 첫공격에 조금 무너졌던 벽을 거의 반파시키며 일부러 시선을 끌어모았고, 동시에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광경에 살짝 당황했다.
"뭐야, 너 악마도 잡을 줄 알아?"
드러누운 크루멜리아와 지크프리트를 번갈아 본 셰릴이 짧게 정정했다.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엥? 그럼..."
"지크님! 그보다 빨리 악마를!"
다행히 지크프리트는 테네아시의 말을 듣자마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그녀를 자연스럽게 내려놓고 두말없이 악마 숭배자들을 향해 돌격했다.
[하악, 하아... 마, 막아!]
"대공의 뜻대로!"
식은땀을 흘리며 아직도 몸을 비척이는 크루멜리아의 명령에 악마 숭배자들이 두 눈을 번뜩이며 달려들자 지크프리트는 그 모습을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으며 외쳤다.
"용사가 좆으로 보이냐 이 씹새들아!"
-콰아아악!
검을 휘두를 필요도, 돌진을 멈출 필요도 없었다. 순식간에 발현된 정령의 힘이 가장 먼저 지크프리트에게 접근한 악마 숭배자의 몸을 반쯤 찢어 버리다시피 했으니까.
하지만 악마 숭배자들도 머저리는 아니었다. 처음 한 명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찢겨나가는 걸 보자마자 그들의 육체가 기이하게 변형하기 시작했다.
"신의 오만은 대가를 치르리라!"
"신께서 느그들의 오만부터 계산하자고 하신다!"
오히려 지금 달려들었다가는 방해가 될 수준이라 테네아시의 신변을 지키려고 서 있던 셰릴의 귓가에 당황한 테네아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런 말 안 하셨을 텐데..."
"...그냥 도발입니다."
"여, 역시 그렇겠죠? 하, 하지만 계시 사칭은 하면 안 되는데...아! 어디 다치신 데는 없나요?!"
역시 어딘가 맹한 듯하면서도 참 알 수 없는 성녀였다. 그래도 자신의 신변을 걱정해 지크프리트를 서둘러 데려왔을 뿐만 아니라 저런 모습까지 보여주니 미워하기 힘들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저 악마에 대한 대처부터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제 몸을 제물 삼아 게이트를 만들 생각인 거 같..."
[빌어먹을 꼭두각시 새끼가아아!! 이딴 잔재주를!!]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외침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한창 육편이 되어 흩날리고 있는 악마 숭배자들 뒤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겨우겨우 일어난 크루멜리아가 오만상을 쓰며 지크프리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수로 방해했는지 모르겠지만 네 뜻대로는 안 될 거다!]
"뭐라는 거야 씨발...놈? 년? 뭐야 너?"
그에 어이가 없다는 듯 반응하면서도 성실하게 이형의 괴물로 변해 버린 악마 숭배자를 절단낸 지크프리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크루멜리아에게 달려들었다.
한껏 강화된 육체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거대한 대검이 그대로 랜스처럼 크루멜리아의 몸을 꿰뚫으려는 찰나, 그녀의 오른손이 복부에서 빠져나왔다.
[포식의 시간이다!]
그리고 균열이 일어난 것 같은 크루멜리아의 배에서 수십 마리의 괴물들이 동시에 뛰쳐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