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마물의 등장에 지크프리트보다 빠르게 반응한 것은 정령이었다.
평소보다 많은 바람의 칼날이 잠깐 지크프리트의 몸이 뜰 정도로 휘몰아치며 아가리를 벌려 이빨을 들이밀던 마물들을 강타했다. 하지만 강렬한 절삭음과 비명 그리고 피를 보고 반응한 지크프리트가 재빠르게 검의 면으로 마물들을 후려치며 뒤로 빠지지 않았다면 그대로 시체에 짓눌리고도 남았을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크루멜리아만이 쏟아지는 마물의 파도 속에서 유쾌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두려워해라! 그리고 도망쳐라! 그럴수록 만마전의 존재들이 이 땅을 더럽힐지니! 네놈들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죽...]
"저 지랄병 환자에게 불길을!"
크루멜리아의 말을 잘라 내는 지크프리트의 외침과 함께 그의 대검이 빛나며 거대한 불줄기가 솟아났다.
엘드미아와의 대련을 봤기에 셰릴은 그게 배터리라는 이름의 보조 마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런 욕지거리가 섞인 외침이 정말 주문인지까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마법의 결과가 더 중요했다.
솟구친 불길이 걸쭉한 기름처럼 바닥으로 떨어지자마자 무서운 기세로 마물들을 태워가기 시작했으니 성능만큼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었다. 비록 그게 크루멜리아를 위협할 정도는 되지 못한 듯 싶었으나, 최소한 저 쏟아지는 마물들이 당장 앞으로 뛰쳐나오는 것은 막아 냈다.
"셰릴이라고 했지?! 테네아시와 함께 물러나! 물량 공세 속에서 너희까지 지키는 건 아직 무리야!"
지크프리트의 외침은 실로 용사다웠으나 셰릴은 그 판단에 동의하지 않았다. 불길을 피할 수 있었던 사족보행 마물들 중 대부분은 여전히 지크프리트를 노렸지만 몇 안 되는 녀석들이 자신과 테네아시를 노리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직선적인 움직임을 보인 덕에 네 마리 정도를 동시에 상대했음에도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베면 죽었다. 악마보다는 훨씬 상대할 만한 적이라는 확신 속에서 셰릴이 외쳤다.
"저 마물들은 용사님만 노리는 게 아닙니다! 일단 뒤로 물러나십시오! 통로를 지켜야 합니다!"
"뭐...오케이! 간다!"
자신의 머리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든 마물의 아가리에 대검을 찔러넣으며 반박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던 지크프리트는 셰릴 주변에 죽어 있는 마물들의 시체를 보고 즉각 몸을 돌렸다. 자신만 노린다면 차라리 넓은 곳에서 무차별 학살을 저지르는 편이 나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통로에서 버티고 서서 원군을 기다리는 게 맞았다.
"젠장 에셀루아랑 엔티레만 있었어도 저 망할 새끼를 정수리부터 갈라놓는 건데!"
죽은 마물들은 사라지지 않았고, 크루멜리아의 뱃속에서 튀어나오는 마물은 처음같은 폭발적인 등장은 없었을지언정 꾸준히 솟아나고 있었다. 심지어 짐승정도의 지능을 지녔는지 제 몸을 사리지 않으며 달려드는 탓에 마음 놓고 돌격할 수도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시체에 깔려 죽은 최초의 용사로 역사에 남을 지도 몰랐다.
"엘드미아가 눈치채고 오는데까지 얼마나 걸릴까?"
"모르죠. 운 좋게 황녀님 일행과 마주했다면 서둘러 오겠지만... 여기는 지도에 표시한 위치가 아니니까요."
셰릴도 그저 저 불쾌한 기운을 따라온 것에 불과했고, 지크프리트조차 성녀인 테네아시를 나침반삼아 도착한 회랑이다. 아무리 엘드미아가 추적술이 능하다한들 돌바닥 위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굉장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 여유 부릴 때가 아닐 텐데!]
통로를 지키고 방어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적나라한 비웃음을 터트린 크루멜리아가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지크프리트도 마법을 열심히 공부했지만 처음 들어 보는 언어였기에 그게 악마들이나 쓰는 말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크루멜리아의 두팔이 녹아내리듯이 하나로 합쳐지며 거기서 새로운 균열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저, 저 씨발 새끼. 저거 또 게이트 열려는 거 아니야?"
"에테이시여..."
잔뜩 긴장하는 두 사람과 달리 셰릴은 이 심각한 상황 속에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이트를 연다고? 그럼 아까같은 상황이...
[끼야아아악?!]
...일어났다.
소환된 마물들조차 고개를 돌려 크루멜리아를 바라보게 될 정도로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른 크루멜리아가 또다시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격렬하게 퍼덕이기 시작했다.
[씨발! 씨바아알!]
"...뭐야? 저 새끼 왜 저래?"
"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까도 자기 배에 헛짓거리를 할 때 저러..."
[개버러지같은 용사 새끼가아아악!!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아으아아악!!]
이번에도 검붉은 피를 눈물마냥 주륵주륵 흘리며 바닥을 뒹구는 크루멜리아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던 지크프리트가 잠깐 얼빠진 표정을 짓다말고 쌍심지를 세우며 말했다.
"씨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뜬금없이 억울하네?"
악마가 고통받는 꼴을 봐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억울한 건 억울한 거였다. 물론 스스로가 지르고 있는 비명 때문에 그런 지크프리트의 항변이 크루멜리아의 귓가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얼마나 심각한 고통인지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경기를 일으키던 크루멜리아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증오를 담아 지크프리트를 노려보며 외쳤다.
[끄헉! 꺼억! 끄, 으아아아아! 죽여 버릴 거야! 대체 뭔 짓거리를 한 건지 몰라도 산 채로 찢어 죽여 버릴 거...]
-피이익!
그때, 지크프리트와 셰릴의 사이를 뚫고 날아간 무언가가 그런 크루멜리아의 미간 정중앙에 꽂히더니 그대로 바람구멍을 내버렸다.
[...얅?]
"거름으로도 못 쓰는 바퀴벌레만도 못한 새끼가 더럽게 시끄럽기까지 하네. 세상 잘 돌아간다 아주."
모두가 놀라 뒤를 돌아보자 거기엔 매우 매우 경멸 어린 시선으로 악마를 노려보는 엘드미아가 서 있었다. 그 얼굴을 본 지크프리트는 맨날 엘드미아가 자기한테 툴툴댔지만 그게 다 장난이었다는 걸 새삼 확신할 수 있었고, 셰릴은 2년을 알고 지내면서도 처음 보는 모습에 살짝 움찔거렸다.
"너 대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아왔냐?"
나름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보자마자 저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걸 보아하니 역시 용사는 용사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금방 표정을 푼 엘드미아가 지크프리트에게 대답하기도 전에 셰릴에게 다가와 이곳저곳 살펴보기 시작했다.
"안 다쳤어?"
그 반응에 살짝 입꼬리가 꿈틀거릴 뻔한 셰릴은 애써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안 다쳤다. 하지만 악마를 상대할 무기가 없어서 낭패를 볼 뻔 하기는 했다."
"후, 그래. 나중에 발쿤 씨한테 이야기 좀 해 봐야겠다."
"손가락으로 기분 나쁜 촉수 같은 걸 휘둘렀지만 별거 없었다."
"역겨운 새끼일세. 그래도 손가락 수만큼 휘둘렀으면 위협적이었을 텐데 잘도 피했네."
잘했다는 듯 어깨를 토닥이며 앞으로 나간 엘드미아의 표정은 다시금 세상 둘도 없는 역겨운 것을 본 자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동생? 역시 우리 파티엔 척후가 필요할 거 같아."
"...하나만 약속하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뭐?! 뭔데?!"
"지금부터 보게 되는 거에 대해 함구하십쇼. 성녀님도 포함해서."
"...? 좋아!"
지크프리트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휘파람을 불자 크루멜리아의 이마에 구멍을 뚫었던 바늘이 엘드미아의 곁으로 다시 날아왔다. 그 모습에 지크프리트는 엘드미아가 함구하라는 것이 바로 저 바늘의 진정한 성능이며, 이를 통해 수많은 마물들을 일망타진하려고 하나보다 정도의 생각을 하며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엘드미아는 아직 검집에서 뽑지 않은 검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불길과 수많은 마물 너머의 크루멜리아를 바라보던 엘드미아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저거 그냥 악마가 아니라 빙의라도 한 겁니까?"
"어? 어떻게 아셨나요?"
"사람처럼 생겼잖습니까. 제가 만났던 건 얼굴 가죽 잡아당긴 박쥐처럼 생겼었거든요."
심드렁하게 말하면서도 엘드미아는 꿈틀거리는 크루멜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뭔 수를 쓴 건지 몰라도 배에서 계속 마물이 나오는군요."
"이, 일종의 게이트라고 짐작하고 있어요. 방금 전에는 자신의 두 팔을 통해 또 하나의 게이트를 열려고 했었죠."
"그래서 자꾸 거슬리게 날아다녔구만."
"예?"
"아뇨, 그냥 혼잣말입니다. 일단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계세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엘드미아가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자, 뒤로 넘어갔던 크루멜리아의 상체가 갑자기 세워지며 이번엔 엘드미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배에서 나오는 마물은 이제 수십 초에 한 마리가 겨우 나올 정도로 기세가 줄어들었지만 이미 주변에 나온 마물들만 하더라도 충분히 위협적이었고, 그렇게 꿈틀거리는 마물들 가운데에서 머리통에 구멍이 난 채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일행들은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일단 엘드미아의 말대로 위치를 고수했다. 용사도 이긴 인간이 갑자기 죽을 거 같진 않았기에 그의 말을 따르는 데에 있어 별다른 거부 반응은 없었다.
[넌... 또... 뭐야?!]
예상치 못한 기습은 치명적이진 않았으나 안 그래도 고점에 이르렀던 불쾌감을 한계까지 몰고 가는 수준은 됐다. 크루멜리아는 반드시 산 채로 찢어먹겠다는 다짐과 동시에 자신이 찢어 죽일 인간의 모습을 잊지 않기 위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조금 주춤거리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인간들과 마주했을 때 결코 받아볼 수 없었던 시선은 상대를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덕분에 크루멜리아는 자신과 놈의 사이를 가로막는 마물들과 불의 장벽이 있음에도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제물의 목을 벨 것만 같아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야, 그 몸 주인은 죽었냐?"
공포도, 분노도 없이 그저 혐오스럽고 징그러우면서 하찮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그 시선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 크루멜리아는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하, 아는 사이라도 됐나? 그럼 이 꼴로 살아 있겠어?]
"아깝군.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었는데."
[어차피 죽을 텐데 네놈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신 옆에서 물어보지 그래?]
그리고 지금까지 시간을 끌며 완성시킨 게이트를 발동시켰다.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지능도 없는 만마전의 마물들을 데려오는 것과 달리 온전한 악마들을 불러오는 게이트의 완성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멀뚱히 서 있는 인간들을 한껏 비웃으며 크루멜리아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녀와 계약한 악마는 다섯.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용사에게조차 위협이 될 만큼 강대한 이들이었다. 비록 이번 계획을 위해 만마전에 있는 본체의 힘을 상당히 소모하긴 했으나, 그건 어차피 왕국을 초토화 시켜서 회복하면 될 일이었기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랬기에 크루멜리아는 얽힌 두 손에서 펼쳐진 게이트를 통해 넘어오는 악마들을 느끼며 외칠 수 있었다.
[네놈들과 놀고 싶은 악마들하고 인사나...]
"바퀴벌레는."
그런 그녀의 자신만만한 반응과 점차 확장되기 시작하는 게이트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신의 검을 만지작거리며 그저 바라만 보던 엘드미아가 입을 열자, 마물들의 으르렁거림에 가려 아슬아슬하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원래 한 마리가 보이면 수십 마리까지는 예상해야 하는 법이야."
이 인간은 대체 뭐라는 거야?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크루멜리아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담긴 순간 확장된 게이트에서 다섯 명의 악마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여전히 침착하게 바라보다가 뒤늦게 검을 뽑으려 하는 엘드미아의 모습에, 크루멜리아는 비웃음을 터트렸다.
[가소롭...]
"그래서 약을 칠 때는 신중하게 쳐야지. 괜히 서두르다간 다 못 죽이거든."
그리고 갑자기 사방팔방에서 피가 터져 나오며 마물들뿐만 아니라 방금 모습을 드러낸 악마들까지 남김없이 목이 떨어져 나가는 초현실적인 광경 속에서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어?]
크루멜리아가 당황하는 사이에 불길마저 꿰뚫고 순식간에 거리를 파고든 엘드미아가 그녀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