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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89화 (289/412)

크루멜리아가 느낀 것은 격렬한 분노였다.

방금 원인을 알 수 없는 그 한 번의 현상으로 인해 자신이 세운 모든 계획이 완전히 뒤틀렸음을 이해하고 분노했다. 눈앞의 존재가 정말 인간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 분노했다. 이대로 가면 손 한번 제대로 못 써 보고 그릇의 목이 날아감과 동시에 자신의 의식도 강제로 만마전으로 사출될 거라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런 모든 분노 앞에서 크루멜리아는, 속되게 말해 눈이 뒤집혔다.

[감히!!]

수백 년을 살아오며 처음 느껴보는 격렬한 분노가 뇌를 튀겨 버리는 것만 같았다. 한낱 장난감에 불과한 인간이 자신이 하나하나 정성 들여 쌓아온 판을 느닷없이 흙발로 걷어차고 짓밟았다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한평생 타인에게 빼앗고, 타인의 계획을 망쳐오기만 했던 크루멜리아는 자신이 그런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이성이 날아가고 감정으로 움직이게 된 크루멜리아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모든 리스크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행동에 옮겼다.

[네까짓 게!!]

엘드미아의 검은 크루멜리아의 목을 노렸으나 베지 못했다. 정확히는 갑자기 부풀어 오르며 뒤틀리기 시작한 살더미를 베어내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그 이변을 눈치채고 순식간에 뒤로 물러선 엘드미아는 폭발하듯 갑작스럽게 팽창한 크루멜리아의 몸이 주변을 집어삼키며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려 나가는 광경에 미간을 찡그렸다.

"지랄났네 아주."

하지만 매우 역겹고 혐오스럽다고 느끼는 그와 달리 졸지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제 몸뚱이부터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 다섯 악마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자신들의 목이 왜 갑자기 분리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들은 크루멜리아가 무엇을 하려는지 너무나도 확실하게 알아버렸다.

크루멜리아는 지금 악마들이 인간계에 숨어들어올 때 쓰던 개구멍에 제 몸을 쑤셔 넣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심지어 절대로 어기면 안 되는 계약과 약속마저 제멋대로 파기한 채 자신들을 부족한 제물의 대용품으로 사용하려고 했다.

문제는 그들이 이번에 인간계에 현신한 방법이 결코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에 있었다.

바쳐진 제물을 통해 몸을 빚어 현신하는 기존의 방식이 아닌, 잠깐 동안 세상의 감시를 피해 현신한 뒤 '직접' 제물을 모아 빠르게 자신이 현신할 몸을 만든다는 발상은 참으로 고전적이면서 참신한 시도였다. 크루멜리아는 신들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새롭고 기발한 방법에 대해 자신 있게,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랬기 때문에 악마들은 굉장히 큰 문제점 하나가 버티고 있음에도 그녀의 계획에 감탄하며 거래를 할 수 있었다.

제물을 모으기 전에 죽으면 소멸한다니, 만마전에 심장을 두고 오는 것도 아닌데 한낱 인간들을 상대로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어디 있겠는가. 살아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결국 죽는다라는, 농담 아닌 농담과 다를 바 없는 문제점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했었다.

방금 전까지는.

[크, 크루멜리아! 이건 약속이 다르...!]

[계약! 계약을 떠올려라 중독자!]

[이 미친...!]

그 결과, 그들은 크루멜리아에게 흡수된다는 상상도 못 했던 형태로 죽음을 맞이했다. 인간들에게 제물이나 요구하던 악마라는 족속들이 절망과 당혹감 속에서 제물로 전락하는 아이러니한 광경을 보며 엘드미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사실 웃을 만큼 여유가 있는 상황은 아닐지도 몰랐다. 악마들과 마물들이 저 역겨운 살덩이에 파묻혀 흡수된다는 것까지는 짐작이 가능했지만, 그 결과는 도무지 예측이 되지 않았다. 저 팽창이 계속되는 것만으로도 위협일 수 있었기에 엘드미아는 소환되었던 모든 것들을 집어삼킨 뒤 거짓말처럼 활동을 정지한 거대한 덩어리를 보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다행히 팽창이 다시 시작되지는 않았다. 정확하게 자신이 소환한 것들을 집어삼키자마자 활동을 멈춘 기괴한 살덩이는 잠깐 움찔거리더니 빠른 속도로 축소되기 시작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리 좋은 징조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씨발 보통 이런 건 2페이즈 시작이던데."

뒤에서 지크프리트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격하게 공감한 엘드미아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당장 뛰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엘드미아는 상대가 변신할 때 공격하지 않는 건 삼류 악당들이나 저지르는 멍청한 실수라고 여기는 부류였지만 저 기괴한 살덩이에 담겨진 마력량이 문제였다.

그나마 가장 비슷한 수준의 마력을 떠올려보자면 가엔달 일행과 함께 처음으로 의뢰를 받았던 폐던전의 게이트 너머에 있던 구체 정도? 만약 자신의 공격으로 저게 터지기라도 하면 그때 겪었던 것과 비슷한 수준의 폭발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당시에도 후폭풍만으로 공처럼 튕겨져 날아갔는데, 여기서 그런 폭발에 휘말리면 수로가 무너지는 것은 물론이요 다 죽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정체불명의 움직임을 원치 않게 방치하는 동안 사람만 한 크기로 꿈틀거리던 불쾌한 살덩이가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기엔 붉은 진흙으로 빚은 듯한 여성이 눈을 감은 채 서 있었다. 옷도, 사람도 모두 진흙으로 만든 것처럼 생긴 묘한 몰골에 엘드미아의 고개는 옆으로 기울어질 뿐이었지만 뒤에서 보고 있던 셰릴과 테네아시는 몸을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위압감을 느끼고 치를 떨어야 했다.

방금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무언가가 그녀들의 몸을 바닥으로 잡아끄는 것만 같은 감각에 억지로 저항하는 와중에, 진흙 여성의 입이 열렸다.

[나는 지식을 탐미하는 자, 만마전의 대공 크루멜리아다.]

그저 말하는 것에 불과했음에도 셰릴은 무릎에서 힘이 풀리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나마 그녀에게 위안이라고 할 수 있는 건 그게 비단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테네아시는 두 손을 모아 쥔 채 제국 신성회의 기도문을 외우며 떨고 있었고, 항상 심드렁하거나 여유롭던 지크프리트마저도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대검을 들고 언제든 튀어 나갈 수 있도록 자세를 잡고 있었다.

지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저게 결코 정상적인 형태로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로 인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존재에겐 반드시 약점이 존재하며, 죽일 수 없는 존재는 결코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감과 위압감은 저게 지금의 자신과는 급이 다른 존재라고 온 세상에 외치는 듯했다.

"대...악마..."

지크프리트조차 긴장으로 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성광십자회를 도와 죽였던 악마들도 쉽기만 한 놈들은 아니었다. 자신들이 많은 준비를 하고 전투에 임했던 것처럼 악마들과 악마 숭배자들 역시 교단을 좀 먹는 과정에서 다양한 준비를 한 상태였고,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준까지는 되지 못했다한들 살면서 겪었던 싸움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벅찬 싸움이었다는 게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빙의한 악마를 봤을 때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악마 다섯이 게이트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도 두렵지 않았다. 마물과 악마들의 머리통이 갑자기 다 떨어져 나갔을 땐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으나, 갑작스러운 변화와 함께 그 모든 게 뒤틀린 살덩이 속으로 사라지는 걸 보면서도 걱정하지 않았다.

뭐가 됐든 상대할 만 하다고 여겼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철저하게 경험에 입각한 스스로의 판단을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판단이 무너지기까지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고치와 다를 바 없었던 살덩이가 악마를 빚어내자마자 존재감이 달라졌다.

이세계에 빙의한 뒤로 위압감과 존재감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코웃음을 치던 지크프리트였으나 이번에는 그게 실존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임이 아닌 이 세상에서 목숨은 하나뿐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만드는 위압감이었다.

동시에 저런 존재가 여기에 현신할 수 있었던 이유가 성광십자회 총본산에서 있었던 수많은 죽음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지크프리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세계의 이방인에 불과한 자신 뿐만 아니라 성기사들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법이 원인일 수 있다고는 하나, 용사인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위협을 이곳까지 끌고 온 것과 다를 바 없게 느껴졌다.

저 악마가 지상으로 뛰쳐나간다면 그야말로 대학살이 일어날 것이다. 자신보다 강한 이들이 동원되어 결국 쓰러트릴지 몰라도, 인명 피해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게 분명하다.

말 한마디가 수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며 찰나를 영겁으로 쪼개 늘린 듯한 순간이 지나, 이윽고 감겨 있던 두 눈을 부릅뜬 대악마 크루멜리아는 분노를 담아 엘드미아를 노려았다. 그리고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말을 이었다.

[내 이름과 영혼을 걸고, 반드시 널 찢어 죽이겠다.]

그제서야 세 사람은 엘드미아가 아직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크루멜리아와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팽창을 피하느라 거리가 생기긴 했지만 저만한 존재에게 거리라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음에도 셰릴이 엘드미아의 옆으로 달려 나가지 않은 것은 그가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도 아니고,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검을 뽑은 자세 그대로.

아까 전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변화 없이 태연자약한 모습 그대로 크루멜리아를 마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절대적인 우위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크루멜리아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엘드미아를 내려다보며 반응을 기다렸다. 이에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자세 그대로 삐딱하게 크루멜리아를 바라보던 엘드미아는 갑자기 제 검집을 풀더니 다시 검을 집어넣을 것처럼 자세를 잡았다.

크루멜리아마저 대체 무슨 기괴한 행동인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때, 엘드미아가 말했다.

"해 봐."

그가 검집에 검을 넣음과 동시에 멀쩡하던 크루멜리아의 머리가 누가 망치로 내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제 몸뚱이에 틀어박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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