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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91화 (291/412)

메시나 반스 다 이티스엘 공주는 처음 착용해 본 흉갑이 가져다주는 불편함에 몸을 뒤척였다.

왕족만을 위해 제작된 예식용 갑옷은 갑옷 본연의 성능보다 인챈트된 마법들이 중요했기에 강도를 신경 쓸 필요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그녀가 입고 있는 옷만큼이나 가벼웠지만 단단함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보는 이라고는 측근인 헤이리 뿐인 상황이었으나 체통을 지키기 위해 크게 움직이지도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메시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집사 헤이리는 그런 주인의 모습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어깨끈을 조정하고 좌우의 벨트를 조금 더 조이겠습니다. 살짝 압박감이 느껴지시겠지만 움직일 때마다 거슬리는 것보단 나을 것입니다."

"음, 그렇게 해 줘."

숙련된 집사이자 기사인 헤이리의 조치는 순식간에 끝났다. 한결 편해진 메시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자신의 업무에 집중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조금 가깝게 붙어 있는 헤이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헤이리?"

"...아닙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전투와 관련된 그 어떠한 재능도 없는 메시나가 왜 갑옷을 걸치고 왕실의 이름 아래 지하 수로 관리 감독을 나서야 했는지부터, 그렇게 움직이며 왜 호위병들의 수를 대폭 줄이기까지 했는지 등등. 제 주인의 총명함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안전과 거리가 먼 행동만 골라서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메시나는 그런 신하의 마음가짐을 존중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그래 봤자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조사가 완료된 지역에서 가져온 보고서를 파악하는 작업을 왕성이 아닌 '지하 수로 생태 확인 임시 지휘소'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건물에서 하는 것뿐이었다.

반역자 엔벨데를 처단한 뒤 그가 심어놓았을지 모르는 위협을 승리자의 입장에서 여유롭게 조사하는 것에 불과한 행위. 아무런 위협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호위도 최소한으로 대동하고, 전투와 연이 없다는 걸 온 국민이 다 알고 있는 메시나가 움직임으로써 쐐기를 박아야만 하는 보여주기식 행사.

그렇게 보여야만 했고, 다행히 그렇게 보였다.

'성광십자회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너무 많은 것들이 희생되고 있어.'

당연히 실속은 전혀 달랐다. 메시나는 보고서를 보며 마음속의 저울이 손해 쪽으로 기울어지지는 않을까 가슴 졸이는 중이었다.

성광십자회는 마족과 긴 전쟁을 이어오는 동안 수많은 도움을 주고, 많은 신도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실제로 절대다수의 지부가 사욕이 아닌 공공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몇 안 되는 종교다. 다른 때면 몰라도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이런 시기에 그런 종교의 중심이 악마에게 타락하고 무너졌다는 이야기가 퍼지게 둘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최근 있었던 항구도시 급습으로 인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긴장과 여유의 경계가 크게 흔들린 상황이다. 마음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종교까지 흔들린다면 어떤 여파를 불러올 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왕국은 성광십자회가 제국에 있는 용사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 것을 방관하는 '척'했다. 정말 힘이 없어서 도움을 요청한 게 아니라 '용사가 움직여야 할 정도로 큰 위협이었기에 성광십자회도 당했다.' 라는 타이틀이 필요했고, 최근 발견되었다는 성녀의 권위를 위해 용사가 필요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그 과정에서 왕실의 위신이 깎일 수도 있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크게 양보한 행동이었다. 대놓고 생색을 낼 수도 없는 터라 나중에 성광십자회에서 입을 싹 닦아도 하소연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쟁은 왕실 홀로 이어 나가는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기어이 다른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총본산에서의 싸움이 전초전에 불과했을 수 있으며 악마 숭배자들이 왕국 수도 한복판에 악마를, 그것도 대악마에 준하는 존재를 풀어놓으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전달 받았을 때 아버지 이티스엘 7세가 흘리던 침음이 아직도 귓가에서 맴도는 것만 같았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책임소재 파악으로 시간을 날려 먹지 않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운이 좋았다고 여기는 게 맞기는 했다. 성기사들이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방법으로 진행된 터라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는 변명같은 말을 늘어놓는 것을 국왕이 직접 수긍하고 즉각 대책 마련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반역자 엔벨데로 인해 귀족원 소속 귀족들의 발언권이 대폭 감소된 시기라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방해가 있었을까. 자연스럽게 악마 숭배자들이 지하 수로로 숨어들어온 것을 보면 아직 발견이 덜 되었을 뿐이지 지난 수년간 엔벨데가 수로 점검에 인력을 투입하면서 부린 수작이 한 두 개는 아닐 거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이미 오래전부터 악마 숭배자들과 손을 잡아왔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삼아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났다면? 혹여 협력 관계는 아니었을지라도 협력을 하기로 뒤늦게 결정했다면? 잠깐 다른 쪽으로 생각이 빠져 그런 가정을 해 본 메시나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성패의 여부와 별개로 왕국이 무너지게 되는 큰 계기 중 하나로 남았을 건 확실하다. 그 끔찍한 생각을 떨쳐낸 메시나는 공식적인 업무를 위해 친구 헤이리가 아닌 집사 헤이리에게 말했다.

"민간인 지구에서 올라온 마지막 보고서도 문제가 없는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통로 폐쇄에 필요한 최소 인원만 남겨두고 예정된 편성에 따라 다른 구역으로 이동하라 명령하세요."

가장 중요도가 높은 민간인 거주 지역 조사에 도움을 준 성광십자회 성기사단을 아카데미로 투입할 핑계가 드디어 완성되었다.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한 헤이리는 왕실의 인장을 찍어 넘겨준 명령서를 받고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정적이 흐르는 방안에서 닥치는 문제들을 고민하다가 살짝 우울해진 메시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생각을 고쳤다.

'뻔히 아카데미 지하가 가장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여유로움을 가장하며 조사조차 못하던 희극과도 같은 상황이 끝난 것만으로도 신께 감사해야지.'

잠깐의 휴식 시간이 생긴 메시나는 가볍게 기지개를 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의 머릿속은 손익을 계산하느라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대대적으로 위협이 물러났다고 통보해 버렸기 때문에 허둥지둥 기사단을 움직일 수도 없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성기사단들 역시 발아래 악마가 기어 다니고 있을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먼저 움직일 수 없다. 공개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지하수로였기에 그들의 움직임을 숨길 방법은 전무했고, 어떤 형태로든 소문이 퍼질 테니까. 왕국의 균형이 무너지는 걸 원치 않은 제국조차 협조해줬지만... 제국이 왕국에 개입해서 권력을 휘둘렀다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용사를 움직일 수도 없는 갑갑한 상황이었다.

공든 탑이 무너지더라도 당장 급한 불을 끄고 봐야 하는가, 아니면 공든 탑과 함께 불 탈 수 있는 위험을 감내하고 버텨야 하는가. 모두가 두 선택지를 놓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사이 해결책이 될 수도 있는 세 번째 선택지를 내놓은 건 레스롬 공작이었다.

그의 비밀스러운 조언에 따라 4 황녀가 직접 엘드미아와 접촉하여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방향으로 계획이 조정되었고, 살아 숨 쉬는 후폭풍 생성기와도 같은 남자는 예상보다 훨씬 능숙하게 일을 준비했다.

정말 평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머리를 쓸 줄 아는 그 청년은 심지어 자신이 움직이는 이유를 붙일 줄도 알았다.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셰릴 경과의 친분 뿐만 아니라 교수의 조수라는 지위까지 총 동원해 어쩔 수 없이 돕는다라는 느낌을 풀풀 풍기도록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대체 어딜 봐서 15살이지?'

너무 효율이 좋다.

왜 귀족들이 그 소년을 어떻게든 기용하거나 써먹기 위해 그렇게까지 눈치싸움을 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이제 아카데미 지하에서 악마든 뭐든 튀어나온다한들 그들이 제압만 할 수 있다면 오히려 득이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다치지만 않는다면 제압을 못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헤이리에게 맡긴 요청서가 성광십자회의 성기사단 손에 들어가는 데에는 10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고, 그들이 아카데미로 가는 건 20여분도 걸리지 않을 테니까.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다가 지하로 도망친 엔벨데의 잔당들이 '어설프게' 악마 숭배자들과 손을 잡고 시도한 사악한 계획을 학생들이 미리 알아차리고 저지하던 중 성기사들과 협력해 뿌리를 뽑았다라는 형태의 이야기는, 꽤 자극적이며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이었다.

물론 지금 그 지하 수로에서 일어나는 일을 직접 목도했으면 스트레스로 인해 위에 구멍이 났을지도 모를 노릇이었지만, 메시나가 거기까지 알 방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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