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뱉는 것만으로 불길이 나온다.
거대한 꼬리를 휘두르는 것만으로 벽이 박살 나고, 손톱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바닥이 종이처럼 찢겨 나간다.
그야말로 용이기에 가능한 일. 하지만 그런 압도적인 힘을 휘두르고 있음에도 크루멜리아가 느끼는 건 초조함이었다.
[죽어!]
뱉어낸 불길이 정령술에 막히고, 꼬리가 반쯤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잘리고, 절대 부러질 거 같지 않았던 발톱은 저 빌어먹을 엘드미아의 칼질 한 번에 뭉텅이로 잘려 나갔다. 큼직한 상처를 수복하는데 힘이 소모되며 심장이 또다시 급격하게 약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 1분 1초라도 빠르게 눈앞의 벌레들을 찍어 누를 생각뿐이던 크루멜리아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올라가서 인간들의 도시를 휘저어 힘을 채워야 하나? 계약을 어긴 페널티는 언제 오는 거지? 심장은 괜찮을까?
분노란 감정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다 죽였다면 후련함만 남았겠으나, 엘드미아가 보여 준 기이한 기술에 두 번이나 속수무책으로 당할 뻔했을 뿐 상황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말 그대로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시간제한 뿐인 것과 다름없는 상황 속에서 크루멜리아는 자신의 존재를 처음 자각하고 움직였던, 무방비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사방이 위협인데 그걸 피할 방법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
"저게 쏘고 있는 건 그냥 불입니다! 성녀님은 가호에 집중해주십시오! 저 정도 불길이면 뚫을 수 있습니다! 셰릴! 따라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체급이 깡패라는 말과, 닭잡는데 소잡는 칼 쓰지 않는 것처럼 소 잡을 때 닭잡는 칼을 쓰면 상황이 매우 좆같아진다는 점이었다.
빠르게 마력시로 확인한 것을 전달한 나는 지크프리트가 악마가 휘두른 육중한 꼬리를 대검을 눕혀 막는 기행을 선보이는 것에 감탄할 틈도 없이 앞으로 파고들었다. 마력을 온존하기 위함인지 몰라도 악마는 용을 흉내냄과 동시에 마법을 사용하는 빈도가 대폭 감소했으니 그 틈을 이용해 저게 과연 허우대만 멀쩡한 건지, 진짜 용에 준한 상태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뒷다리!"
같이 있는 게 셰릴이라서 다행이다. 저 대담한 꼬맹이는 짭이라고는 하나 용앞에서도 위축되지 않았고, 우리 둘은 수 차례 합을 맞춘 경험이 있는 만큼 의견을 나누는데 있어 많은 대화가 필요 하지 않았으니까. 맨날 서로가 서로에게 괘씸하다고 말하며 불평불만을 표했던 정체불명의 동질감이 여기서 빛을 발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꼬리를 휘두른 대가로 움직임이 더뎌진 거대한 뒷발을 노리고 휘두른 검이 정상적인 생물이라면 아킬레스건이 있는 위치의 비늘을 정확히 강타한다. 마력을 두르지 않았음에도 강철만큼 단단하다는 용의 비늘이 갈라지고 떨어져 나갔으며, 그렇게 생긴 상처로 정확하게 셰릴의 공격이 이어졌다.
[아아악!]
검술을 사용하는 적을 상대하는 게 아닌, 마물을 상대하기에 그야말로 온몸을 실어 휘두른 횡 베기는 정확하게 근육을 가격했으나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녀석의 거대한 몸이 고통 속에서 경직되는 틈을 타 반대쪽에도 똑같이 칼빵을 놓아주는 사이, 앞으로 기울어진 짭용의 목을 노리고 지크프리트가 크게 검을 휘두른다.
덕분에 육체의 강도만을 믿고 버티는 식의 강짜를 놓기는커녕 황급하게 몸을 뒤트는 모습을 보며 확신이 들었다.
"능력이 변신 혹은 변형일지언정, 흉내에 불과한 거 같군."
막무가내로 휘둘러지는 꼬리를 피해 물러서는 동안 셰릴 역시 나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중얼거렸다. 겉으로는 한없이 태연해 보였는데, 조금은 긴장한 것인지 목소리가 떨렸다. 얘도 긴장을 하긴 한다는 게 새삼 웃겨서 어깨를 두드려주며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용이 무서운 건 존재 자체가 마법이기 때문이다.
브레스는 평범한 불길부터 산을 꿰뚫는 공격 마법이 될 수도 있고, 가죽과 비늘은 어지간한 금속은 씹어먹을 정도의 강도를 자랑한다. 고위룡 혹은 나이 먹은 용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온갖 마법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쏴 갈 줄도 안다. 저 악마 새끼는 그중 어느 것도 하지 못하니 짭용인 거고.
어쩌면, 멀쩡히 현신했을 경우 심장이 이곳에 있었을 테니 그 방대한 마력을 운용하며 좀 더 용에 가깝게 흉내를 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의미없는 가정이었다. 문제는 저게 덩치가 커진 탓에 이렇게 싸워서는 목을 벨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처음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게 더뎌진 악마의 회복 속도를 확인하며 셰릴에게 말했다.
"한 번 더 간다. 이번엔 베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말고 용사님 쪽으로 뛰어. 그리고 용사님한테 준비하고 있으라고 해. 뭔 소리인지 이해 못 하더라도, 바로 이해하게 될 거야."
"...? 너는?"
"해야 할 일을 한다."
지크프리트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저 짭용이 졸렬하게 니가와를 시전하는 탓에 아무래도 힘들 거 같다.
저게 또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소모전으로 가는 건 좋지 않았기에, 나는 숨만 고른 뒤 다시 한번 뛰어들었다. 지크프리트의 대검을 피하느라 크게 자세가 틀어졌음에도 악마는 우리가 접근하는 것을 눈치채며 크게 꼬리를 휘둘렀으나 지크프리트의 마법이 옆구리에 꽂히자 경기를 일으키며 크게 빗나갔다. 마법으로 인한 엄호뿐만 아니라 한 번 더 앞으로 나서서 목을 노린 지크프리트 덕분에 아까와 똑같은 위치로 파고드는 작업은 훨씬 수월했다.
상처를 노리고 검을 휘두르니 이번엔 확실히 좀 더 깊은 근육까지 검이 박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력을 두르고 벴으면 진즉에 잘렸겠지만, 나 역시 치명상도 아닌 공격에 마력을 쓸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상황은 아니었다. 어차피 셰릴과의 연계로 끊을 수도 있고 말이지.
아니나 다를까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정확하게 휘둘러진 셰릴의 검이 뒷 다리의 아킬레스건을 끊자, 지지대를 잃은 근육이 말려 올라가는 것만으로 소름 끼치는 소리가 회랑에 울려 퍼졌다.
[끼아아아악!!]
거기에 악마의 비명 소리는 덤이었다.
"달려!"
내 외침에 맞춰 셰릴은 미리 말해 둔 대로 지크프리트를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고 나는 쓰러지면서도 날 노리고 휘둘러지는 꼬리를 보며 심호흡을 했다.
"그래도 대검보다는 면적이 넓어서 할 만 하겠네."
그리고 내가 끌어올릴 수 있는 모든 마력을 이용해 신체를 강화한 뒤, 휘둘러지는 꼬리에 맞춰 검을 박아 넣었다.
-콰앙!
콰앙? 쿠웅? 정말 그런 소리였을까? 순간 나를 부르는 지크프리트와 셰릴의 외침이 들렸던 거 같기도 한데 확신은 안 선다. 어차피 지금은 그런 걸 고민할 틈도 없었기에 난 강렬한 충격 끝에 찾아온 부유감 속에서 내 할 일부터 하기로 했다.
휘둘러진 꼬리에 칼 하나만으로 매달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
자신의 검이 저 거대한 생물의 근육을 끊었다는 사실에 감탄할 틈도 없이 내달린 셰릴은 거의 슬라이딩에 가까운 동작으로 지크프리트와 테네아시에게 도착해 외쳤다.
"용사님! 준비하십시오!"
"준비? 뭘?"
혹시나 했지만 역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함을 내비치는 지크프리트였다. 하지만 그 부분도 이미 엘드미아가 말했기에 셰릴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확신이 있으니 이런 지시를 내렸겠지.
"저도 모릅니다! 엘드미아가 때가 되면 바로 알 거라고 하던..."
다시 이어질 수 있는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은 셰릴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고 경악했다. 그리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과 새하얗게 변한 머리를 두고 본능만으로 외쳤다.
"엘드미아!!"
고통 속에서 전력으로 휘둘러진 용의 꼬리가 엘드미아를 정확히 강타했다.
사람이 무언가에 치였을 때 나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굉음이 울려 퍼진다. 이성과 본능이 온갖 가정과 단어를 외치는 탓에 사고가 마비되고, 옆에 있던 지크프리트마저 경악했다.
"동생?!"
지크프리트조차 엘드미아가 그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방금 그 공격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단조로움의 문제다. 저 악마는 용의 육체가 익숙한 게 아니었다. 그저 제 목을 지킬 수 있는 확실한 형태를 고집한 것에 불과하다. 당연히 엘드미아라면 충분히 예상을 했을 텐데 어째서...
...예상? 준비? 때가 되면 알 거라고?
"저, 저 미친놈 저거!"
입으로는 욕을 내뱉었지만 지크프리트는 경악과 감탄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꼬리에 맞아 날아가는 게 아니라 달라붙어 있는 엘드미아를 보며 확신했다. 그리고 다 휘둘러진 꼬리가 잠깐 고점에서 멈춘 틈을 타 용의 몸으로 뛰어오르는 순간, 저 미친 인간이 뭘 노렸는지 이해한 지크프리트는 마치 투창이라도 하는 것처럼 제 검을 거꾸로 쥐며 외쳤다.
"엘드미아! 받아라! 새 검이다!!"
용사의 전력으로 쏘아진 대검이 발리스타에서 쏘아진 창처럼 날아가 용의 어깨에 깊숙이 틀어박혔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도 셰릴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흐어?"
그나마 이해한 거라고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주 펑펑.
[아, 안 돼! 안 돼!!]
맞은 건 분명 엘드미아였는데 어째서인지 악마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그제서야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셰릴은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용을 바라보았다.
[떨어져어어!!]
어느새 용의 등에 올라탄 엘드미아가 지크프리트의 대검을 쥐기 위해 등 위를 달리고 있었다.
[으아...!]
떨어질 것 같으면 들고 있던 검을 냅다 등에 꽂으며 버티는 묘기와도 다를 바 없는 움직임을 보이며 엘드미아가 달렸다. 제 등을 타고 올라오는 죽음의 위협속에서 사고가 마비된 크루멜리아는 한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움직이는 것조차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에 경악했다.
바닥을 굴러? 적은 한 명이 아니다. 변신? 용조차 이 지경인데 더 이상 뭘? 마법? 그건 등에 올라탄 미친 인간이 알 수 없는 방법으로 파훼하는데? 브레스? 그걸 쏘려면 올라오기 전에...
[씨바아아알!!]
남은 건 도박 뿐이었다. 결단을 내린 크루멜리아는 지금까지 쓸 일이 없었던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수로의 천장을 바라보며 제대로 된 용을 흉내냈다.
[콰라라라라!]
한줄기 섬광과도 같은 브레스가 지하를 밝혔다. 그 순간만큼은 진짜 용의 브레스를 흉내낸 일격이 회랑의 천장에 거대한 구멍을 뚫었다. 크루멜리아의 머릿속을 온갖 종류의 후회가 점칠하기 시작했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도망쳐야 한다. 마력을 거의 다 쓰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에서 도망쳐서 어떻게든 제물을 모아야만 한다.
[반드시! 반드시 너희 전부를 찾아내서 다 죽여주마!]
용은 비행을 하는 것조차 마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단 한 번의 날갯짓만으로도 이 지하에서 저 위의 밤하늘까지 날아오르는 게 가능하다. 그랬기에 크루멜리아는 자신의 도주를 확신했다.
[기억해라! 곧 다가올 너희들의 죽음을! 그 죽음의 이름은 크루멜리아가 될지니!]
용의 날개가 펄럭이고,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키며 그 거대한 몸이 하늘로 쏘아졌다. 빠르게 빠져나가는 마력과 약해지는 심장을 느끼면서도 크루멜리아는 안도감을 느꼈다. 등에 붙어 있던 인간이 이 속도를 견딜 리 없다. 어차피 떨어져 나가거나 중간에 추락해 죽겠지. 그 정체불명의 인간만 사라지더라도 다음 전투는 훨씬 수월할 게 분명했다.
스멀스멀 솟아나는 게 살았다는 안도감과 행복이라는 걸 눈치챈 크루멜리아는 왕국 수도 상공에 이르자마자 접었던 날개를 펼치며 웃었다.
[하, 하하하! 살았어!]
살았다는 안도감에 취해 바라보니 아래에서 빛나는 인간들의 불빛이 마치 보석과도 같아 보였다. 저 많은 제물들. 여기서 그저 불길에 불과한 브레스를 쏘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죽을 것...
"어이 크씨, 헛소리하지 말고 목이나 대."
순간 너무 놀라 날갯짓이 멈출 뻔했다. 지금 인간의 목소리가 들린 건가?
'마,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아니다. 환청이다. 그럴 리 없다. 그 속도를 버텼다고? 인간이? 아니, 인간이 맞기나 했을까? 지금 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 이게 말이 된다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 앞에 주어진 찰나의 시간 동안 현실 도피를 선택해 버린 크루멜리아의 귓가에 ,다시금 작디작은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해라. 네 죽음의 이름은 엘드미아 에가였다는 걸."
이어지는 서늘한 감각과 함께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나서야, 크루멜리아는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빙빙 도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몸이었던 것에 매달려 있는 인간이 보였다. 원래 자신이 쓰던 검을 몸에 박아 발판으로 쓰고, 용사가 던진 거대한 대검을 쥔 채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인간이.
추락하면서도 자신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비웃음을 마주 보며 크루멜리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너만큼은...!]
그리고 저주를 시전했다.
생을 통틀어 인간에게 이렇게 분노한 적은 처음이었다. 아니, 모든 생물 중에서 처음이었다. 어차피 이대로 돌아가 봤자 목숨이 위태롭다. 운이 좋아야 겨우 목숨을 연명할 것이고, 원래의 힘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남은 힘을 다 짜내서 저 인간을 저주해 죽이고 말겠다는 의지와 함께 저주가 발동되었다. 급조한 저주이기에 간단한 보호만 걸려 있다 하더라도 파훼될 수 있으나, 아래에서 싸우는 동안 성녀는 저 인간에게 저주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해주지 않았다.
무조건 걸린다. 그렇게 마지막 기대감을 담아 쏘아 올린 저주는...
[...에?]
허무하리만치 쉽게 파훼되어 역으로 자신에게 돌아왔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 하는 크루멜리아와 달리 엿을 날리고 있던 엘드미아는 마치 이질감을 느낀 것처럼 자신의 건틀릿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크루멜리아에게 향하고 있던 가운데 손가락 부분을 바라보았다.
마치 거기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처럼.
그리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양손으로 엿을 날렸다.
그 동작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저 어이없는 인간은 저주막이 아티펙트까지 숨기고 있었다. 흘러나온 눈물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것을 느끼며 더 이상 현신을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달은 크루멜리아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좆 같은 인간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