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과 동시에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앉아만 있을 생각은 없었으나 옌 티에는 오늘은 자신의 능력을 보이는 날이라며 요리를 도맡아 하기 시작했다. 아실리에도 적잖이 어색한 반응을 보였지만, 결국 며칠 전부터 우려 먹던 스튜가 아직 남아 있었으니 우리도 아무것도 안한 것은 아니라는 내 되도 않는 궤변을 듣고는 긴가민가 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만화나 소설에서 보는 것처럼 막 엄청난 고급 요리가 튀어나올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식재료와 칼이 오고 가는데 주저함이 없는 걸 보면 숙련도 자체는 어마무시한 게 분명했다. 실제로 그녀가 요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맛있는 냄새가 물씬 풍겨 왔기에, 우리의 기대치도 덩달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옌? 그 정도면 지크멜의 도움 없이도 엘디를 찾았을 거 같은데, 거긴 왜 찾아간 거였어?"
그렇게 라이카나 쓰다듬으며 길드에는 언제 갈까 고민하고 있는 사이 아실리에가 옌 티에의 능력에 감탄하기 바빠 조금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집어 물어봤다.
듣고 보니 그러네?
"저희는 성과 이름의 순서가 반대입니다. 티에라고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실리에 님. 엘드미아 님과 거처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들은 연결고리가 끊어져 있어서 단기간에 추적하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연결고리?"
"나름의 정보를 찾는 기술입니다만... 제대로 이어져야 할 정보가 뚝 끊기고 엉뚱한 정보로 연결된다던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정보들이 고의적으로 퍼져 있다던가 하는 거죠."
혹시 알고 있나 싶어 아실리에를 바라보았지만 그녀 역시 전혀 들어 보지 못했다는 반응을 보임으로써 안정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래, 우린 모험가 성향이지 정보상이나 잠입 성향은 아니야.
"보통은 연결고리를 끊어 놓은 인물이 정보를 쥐고 있는 편이고,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지크멜 님이 한 일이었죠."
이런 세상에. 지크멜 이 유능한 녀석같으니.
옌 티에처럼 내 정보를 노리고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벌인 일일 가능성이 높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반사 이익을 얻게 되었으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중에 선물 잘 썼다는 핑계로 찾아가 수고비 좀 얹어 줘야지.
"상당히 유능한 분이더군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분명 유익한 인맥이 될 것입니다."
옌 티에는 그 뒤로도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꺼내며 요리를 이어 나갔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억지로 들춰내서 알려주는 것이 아닌, 이번 겨울엔 무슨 야채가 싸다고 하더라 같은 일상적인 주제로 이어진 대화들은 굉장히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덕분에 요리가 준비되는 동안에도 지루할 틈이 없었던 우리는 그녀가 내온 음식들을 기분 좋게 맛 보았고, 옌 티에를 강제로 내쫓지 않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집에서 쉬는 동안 뭐 할까 고민이었는데 얘한테 요리나 좀 배워야지.
◈
그렇게 식사 시간마다 옌 티에에게 요리를 배우며 보내기를 사흘 째 되는 날, 나는 그녀가 처음 왔을 때 조언했던 대로 모험가 길드에 방문하기로 했다.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좀이 쑤시기 시작해서.
"그래도 이틀간 집에만 있었으니... 잘 참긴 했네."
아침을 먹으며 외출을 선언하자 졸음 가득한 얼굴로 겨우겨우 식사를 이어 나가던 아실리에가 대견하다는 듯이 말했고, 나는 억울한 마음에 곧장 반박할 수밖에 없었다.
"누나? 누가 들으면 하루가 멀다 하고 밖으로만 나도는 줄 알겠는데?"
"누나는 엘디가 집에 이틀 이상 있었던 게 언제 인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그...건..."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라 반박을 할 수가 없다. 우리 집을 구한 뒤로는 매일 같이 나갈 일이 생겼으니까. 심지어 오가토르프 가문에 있을 때조차 아실리에가 합류한 뒤로는 매일 매일 바쁘게 움직이느라 집에 있던 날보다 밖에 있던 날이 더 많았던 거 같다.
어라? 나 너무 열심히 살고 있는 거 아닌가?
"뭐, 몸이 아픈 건 아니니까. 움직여도 별 문제 없겠지."
새삼 스스로의 정신 나간 행동력을 되짚으며 감탄하는 사이 아실리에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납득했고 내가 집에 박혀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집에서만 놀아야 했던 라이카는 기뻐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아침 식사가 끝나고 난 뒤 오랜만에 외출용 복장과 장비를 걸친 나는 기분 좋게 문을 열었다가 그대로 다시 문을 닫아야 했다.
"더럽게 춥네."
이틀 동안 난로 옆에서 죽치고 앉아 성광십자회의 문서만 주구장창 읽어서 그런 건지 이틀 사이에 제대로 겨울이 들이닥쳐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추웠다. 결국 나는 최근 드워프 장인이 만든 비싼 옷과 케이프를 걸치고 다니느라 한동안 입을 일이 없었던 두꺼운 겨울용 외투를 꺼내 걸친 뒤에야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산책! 신나!]
"...넌 춥지도 않니?"
[안 추워!]
옌 티에가 매일 매일 빠지지 않고 빗자루를 휘두른 덕에 마당에는 도로까지 이어지는 길이 깔끔하게 나 있었으나 라이카는 굳이 옆으로 뛰어 눈 속에 파묻히기를 반복하며 온몸으로 즐거움을 표현했다. 말이 안 통해도 귀여웠을 모습인데 말까지 통하니 두 배 더 귀엽네.
"...그래, 좋겠다."
녀석이 연출하는 목가적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거리로 나서자 겨울의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수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남들 다 일하며 바쁘게 움직일 때 혼자 여유롭게 산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묘한 즐거움을 만끽하며 길드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니, 내 마지막 기억과는 조금씩 달라진 주변의 풍경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세상이나 빠르게 변하는 건 똑같구만."
변한 건 그런 풍경들만이 아니었다. 나를 향한 경계의 눈빛이라던가, 라이카와 나를 번갈아 보며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던 분위기도 달라져 있었다.
그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 동안 단두대라는 악명도 술에 물 탄 것처럼 희석되어 버린 것이다. 어쩌면 모험가 일을 쉬고 있었기에 다른 도시로 갔다는 소문이 퍼졌을지도 모르겠다. 어디선가 객사했다는 소문이 퍼졌을 수도 있고.
확실한 건 나를 향한 시선이 무심함에 가깝게 변했다는 점이다.
"결국 도시에서 흐르는 소문이라는 건 그 정도지."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예전처럼 알아서 길이 열리는 경우가 없어진 건 좀 아쉬웠다. 편했는데 말이지.
그렇게 중간중간 세상 신난 라이카가 부리는 재롱도 보고 주변도 둘러보며 도착한 모험가 길드는 아침부터 모험가들도 한창 북적이고 있었다.
"벌써 활동 제한이 떨어졌나?"
겨울에 한탕을 노리며 장거리 이동하다가 얼어 죽는 모험가들이 생겨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길드의 노력이 벌써부터 시작된 것인지, 발 디딜 틈이 없는 정도는 아닐지언정 아침치고는 사람이 많았다. 개중에는 아예 아침부터 술판을 깔고 놀고먹는 이들도 있었고, 제 식탁에 잡다한 물건을 진열해 파는 모험가들마저 보였다.
전자는 평소에도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후자는 조금 달랐다. 저런 건 보통 어느 정도 숙련도를 쌓고 장거리 의뢰를 받아 수익을 유지하던 중견 모험가들이 휴식기를 가지기 전에 미처 처분하지 못한 소모품이라던가 유통기한이 있는 물건을 싸게 내놓는 경우였으니까.
굳이 얼마 하지도 않는 물건을 중고로 팔기 위해 상인들과 흥정하기 귀찮다거나, 그냥 적당히 술 마시면서 아직 경험이 부족한 모험가들에게 조언도 할 겸 싸게 파는 등 이유는 다양하다. 누구 등쳐 먹으려는 목적이 아니다 보니 저렇게 먹을 것만 잘 주문하면 길드에서도 딱히 뭐라 하지 않는 편이다.
애초에 행동 제약을 거는 것부터가 헛짓거리하다가 죽지 말라는 거니, 신입 모험가들이 저렴하게 조언과 물건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막을 이유도 없는 거 아니겠어?
"라이카, 이리 와. 너 밟히겠다."
군말없이 다가온 라이카를 안아드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막상 오고 나니 길드장과 대화할 명분이 애매했다. 다짜고짜 다가가서 '나랑 대화하고 싶다면서요?' 같은 말을 내뱉자니 관심종자가 따로 없어 보이고, 기웃기웃거리는 것도 꼴이 우습다. 결국 옌 티에가 소문을 들은 것에 불과하니 내가 왔다고 무조건 대화를 시도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말이지.
"아, 의뢰."
도시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의뢰 정도는 항상 있으니까 적당한 거 하나 들고 접수원에게 말을 걸면 대충 견적이 나올 것이다. 길드장이 찾으면 대화한 뒤 의뢰는 핑계였다며 두고 가면 되는 거고, 안 찾으면 용돈이나 버는 거고.
스스로의 재치에 감탄하며 오늘도 어김없이 북적이는 의뢰 게시판으로 향하자, 이리 비비고 저리 비비며 서로에게 불만이 가득한 모험가들이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게시판이 세 개나 있는데도 저 모양이라니. 좋은 의뢰를 찾아내고자 하는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매번 볼 때마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게 만드는 모습이다.
할인 행사에 눈 까뒤집고 달려드는 거 같아서 합류하기는 꺼려지는데, 급한 순서대로 붙여놓은 의뢰들이라서 의뢰지가 좀 떨어졌다 싶으면 길드원들이 와서 다시 채워 넣다 보니 기다린다고 해서 사람들이 빠지는 것도 아니다. 여기 처음 왔을 때에는 과연 사람들이 언제 빠질까 싶어서 넋 놓고 구경했더니 한 두 시간은 지나야 잠잠해지더라고.
"에휴, 지나갑니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몸으로 떼우는 방법 뿐이다. 품에 라이카를 안고 있다고 해서 내 피지컬에 하자가 생기는 건 아니었고, 작정하고 밀고 들어가면 나보다 머리 하나씩 작고 어깨 하나씩 왜소한 녀석들은 다 밀려날 수밖에 없다.
"아! 뭔데!"
"아 쫌! 밀지 좀 마쇼!"
당연히 불평불만이 튀어나오지만 별수 있나.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러는 게 약육강식의 의뢰 게시판이거늘. 그렇게 별 어려움 없이 하나하나 헤쳐 나가며 게시판에 다다를 때쯤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았다.
"이 씨팔, 단두대 흉내 내면 다야?"
뭔 소린가 싶어 고개를 돌린 순간 내가 맞이한 것은 나를 향한 불만 어린 시선이 아니라 나름 깔끔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주먹이었다.
그 짧은 순간 정말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으나 일단 맞는 게 유리했기에 얌전히 맞기로 했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광대뼈에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은, 내 예상보다 좀 더 많이 불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