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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98화 (298/412)

비록 엔그림의 반응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일단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직 들어야 할 이야기는 많이 남았다. 길드원의 권고를 무시하고 당텔을 처분한 결과로 받게 될 페널티도 있을 것이고,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한들 날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진급시키려는 것도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당텔과 함께 쓸어 버린 녀석들 중에 오러를 쓰는 놈도 하나 있었지?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엔그림이 말한 진급에 대한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형식과 절차를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꽤 갑작스러운 이야기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드네요. 가장 먼저 나누게 될 주제는 당텔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놈을 심부름꾼으로 썼다는 건, 비록 바늘 한 방에 훅 갔다 하더라도 건물에서 죽어 나간 녀석들 사이에 그보다 강한 놈 하나쯤은 더 있었을 거라는 소리다. 다짜고짜 대장이 사람 잡아 오는 귀찮은 일에 나섰을 거 같진 않으니까.

비록 여자한테 까였다는 이유로 생겨난 열등감의 집합체였다고 한들 놈들이 모험가였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니, 길드 입장에서는 졸지에 나름 쓸 만한 용역들이 하루아침에 싹 다 갈려 나간 상황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진급이라. 나도 모르게 눈이 게슴츠레해졌으나, 일부러 표정 관리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 태도에도 엔그림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딱히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강압적으로 부탁하려는 건 아닙니다. 굳이따지면... 이마저도 구색맞추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제 진급이요?"

"예. 청급 모험가는 적급 의뢰를 받을 수 없으니까요."

"아."

겨울에 들어설 때마다 길드에서 모험가들에게 이동 제약을 건다고는 하지만 사건이 발생하는 것까지 제약을 걸 방법은 없다. 심지어 습격과 사냥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다시피 하는 생산성 없는 몬스터들은 이 시기만 되면 더욱 집요하게 인간의 거주지를 노리기에 긴급 의뢰는 더 자주 걸리는 편이다. 이동 제약은 겨울철 동사를 막기 위한 방침임과 동시에 구역 안에서 긴급하게 발생하는 의뢰들을 시간에 맞춰 처리하기 위한 방침이기도 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그것들 역시 식자재를 비축하면서 나름대로 겨울을 나기위해 준비하기 마련이지만, 겨울잠에 빠져들지 않고 먹이를 찾아 서성이는 곰이 있는 것처럼 지성이 낮은 몬스터들은 대부분 제대로 된 준비를 마치지 못하고 겨울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런 놈들은 인간들의 거주지역을 침범하려 한다. 지들과 달리 풍족하고, 대부분은 나약하다는 것을 제대로 학습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놈들도 먹고살기 위해 겨울의 추위를 뚫고 시도하는 약탈이라 평소보다 더 악에 받친 상태라는 거다.

가장 대표적인 예이자 판타지 세계관의 동네북이자 초보자들의 악몽이라 할 수 있는 고블린 같은 경우는 만만한 마을은 아예 점령해서 겨울을 날 목적으로 움직이기에 머릿수가 두 배 이상 늘어난다. 열 마리가 하던 습격이 스무 마리, 많게는 서른 마리까지 불어나다 보니 물량이 깡패라는 말에 걸맞게 평소보다 난이도가 올라가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다 보니 겨울만 되면 원래 황급이 할 수 있던 의뢰가 청급으로, 청급으로 해결 가능하던 문제가 적급으로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규모가 작은 도시의 모험가 길드는 숙박비를 지원해가면서까지 자급 이상의 모험가들을 도시에 묶어두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굉장히 흔한 경우다.

"...제가 죽인 적급이 몇 명이었습니까?"

"다섯 명입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엔그림은 여전히 웃고 있다. 대답을 들은 내 눈엔 더 이상 여유로운 미소가 아니라 모든 걸 포기한 초연한 미소로 보이게 되었지만 말이다.

겨우 적급 다섯 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앞서 말했던 의뢰들의 경우 실력이 확실한 적급 한 둘에 청급들을 붙여 보내는 것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내 손에 갈려 나간 녀석들이 그 정도 능력이 되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게 내 입장이지만... 이론 상 나는 긴급 의뢰 다섯 개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용역을 날려 먹은 상황인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아주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다. 따지고 보면 엔그림도 피해자인데 말이지. 자기가 모험가들을 직접 뽑는 것도 아니고, 제멋대로 와서 모험가가 되는 놈들을 관리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잖아?

나를 좆같이 대하는 것들에게 좆같이 구는 건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나, 나름 좋은 인상을 줬던 사람에게 의도치 않게 피해를 주는 것까지 뻔뻔하게 굴기엔 내 양심이 너무 여렸다.

"흠흠, 종종 들릴 테니 급한 일 있으면 넌지시 말씀해주시죠. 성심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그 점에 대해 당텔과 관련된 일을 마무리 할 겸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줘서 고맙다는 듯 진짜로 화색을 띈 엔그림의 설명은 일종의 알리바이였다.

나는 가엔달 파티와 같이 받았던 폐던전 의뢰를 무사히 완수한 덕에 적급 심사 중이었으며, 그 후에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자격 여부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실력을 인정받아 승급 통보받기 직전에 하필 당텔 사건이 터졌다. 이 후 길드와 개인 면담을 통해 잠시 자중의 시간을 가졌지만, 긴급 의뢰가 발생해 실력이 맞는 사람을 찾다 보니 조금 서둘러 복귀시키게 되었다...

...는 내용을 차분히 설명한 엔그림이 차를 마심으로써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승급과는 별개로 저희가 부탁드리고 싶었던... 합당한 변명입니다. 여러모로 시기가 잘 맞물려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기에 꼭 동의해주셨으면 했거든요."

내용만 놓고 보면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만, 문제는 지금 내 몸의 상태와 그가 설명한 변명을 성립시키기 위해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 의뢰였다.

세네란이 몸살과 같은 거라고 말했지만 마력 기관은 내가 평소에 마력으로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허락하는 만큼 확실한 반동이 존재했다. 물론 그래봤자 광역 목따기에 두 번이나 대악마급 쓰레기의 목을 가지고 놀고 전투까지 이어나간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 할 수 있으나... 익숙하지 않은 통증은 언제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 법. 막말로 지금 당장 악마 새끼가 또 나타난다면 목 한 번 따버리는 게 고작인 상태다.

적급이 처리할 수 있는 의뢰 중 그 정도 수준의 의뢰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내 인생이 워낙 있을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인지라 방심은 금물이었다.

"그 대본이 성립이 되기 위해 제가 받아야 하는 의뢰는 뭡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 몸 상태가 만전이 아니라는 정보를 흘리고 다닐 생각은 없었기에 괜히 라이카를 쓰다듬으며 고심하는 척을 한 뒤 천천히 운을 떼자, 엔그림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의뢰지를 하나 꺼내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라비엘에서 온 지원 의뢰입니다. 현재 거기 길드 꼴이 말이 아니라서요."

"...뭔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길드장이 도시의 유지와 함께 좀... 많은 짓을 했더군요. 도시 안팎으로 시끄러운 상황입니다."

그 옹졸한 돼지 새끼, 내 그럴 줄 알았다. 어차피 엔그림도 알 거 다 알면서 저리 말하는 거 같아 대놓고 혀를 차며 의뢰지를 받아들었더니 그도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쓴웃음이라도 지을 수 있는 그와 달리 의뢰지를 살펴본 나는 또다시 표정이 썩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피난민들이 새로 구성하는 마을의 경호? 이 시기에?"

당장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은 라비엘로 갈 수 있도록 가엔달 파티와 함께 호위했던 생존자들의 모습이었다. 그 뒤로 얼마나 지났지? 한 두 달 정도 지났나? 이런저런 행정 과정을 거쳐 시행된 사업이라 치면 제대로 일에 착수하기 시작한 건 운이 좋아야 한 달 전일 것이다.

"지난번에 있었던 항구 습격 이후로 마족들이 전술을 수정한 것인지, 소규모로 이동하여 전선을 뚫은 뒤 작은 도시나 마을을 습격하고 빠지는 식의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덕분에 멀쩡한 도시를 두고 피난을 오는 이들도 늘어났죠."

아무래도 내게 죽빵을 선물한 녀석은 많은 것을 암시하는 존재였나보다. 의뢰지에 적힌 내용 자체는 단순한 것이었기에 난 직접 디테일한 내용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들을 받기엔 도시에 공간이 없으니 마을을 세우려 한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버림패로 쓰일 곳에 가서 높으신 분들의 체면치레를 위해 목숨을 걸라는 이야기로도 보이는군요."

이제 진짜 한 겨울이다. 설령 당시 엔벨데의 용병단이 휩쓸고 지나갔던 터로 돌아가 마을 건설을 준비했다 하더라도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환경 조건이 아니다. 허술한 방벽에 많은 사람들이 소모하는 식량과 자재는 앞서 말했던 몬스터들이 노리기도 딱 좋은 조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위험 수당이다 뭐다 해서 돈은 돈대로 들고, 시간은 시간대로 잡아먹는 일에 '그' 라비엘이 정상적인 지원을 할 거라고 믿긴 힘들었다.

"다행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왕실에서 직접 움직인 일이니까요. 그들이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않을 경우... 매우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할 거라 확답드릴 수 있습니다."

아, 역모죄에 엮이기 딱 좋은 상황이라 발등에 불이 떨어졌구만? 아무래도 길드장과 같이 놀던 도시의 유지라는 양반이 꽤나 요직에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단번에 납득하고 표정을 풀자 엔그림이 이때다 싶었는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의뢰지에 적힌 요청 사항은 얼마든지 저희의 편의에 맞게 조율이 가능하니 부담이 될 만한 부분은 전부 손 볼 수 있습니다.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수당도 합의 가능하거든요."

확실히 나쁘진 않았다. 보통 이런 건 장기 의뢰지만, 일의 규모가 규모이다 보니 단기로 일한다고 해도 한 사람이 아쉬운 입장일 테니까. 딱히 혹한기 훈련처럼 텐트에서 숙영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진행이 된 터라 숙소만큼은 구색을 갖추고 있을 것이니 지내는데에도 큰 불편은 없을 것이다.

경호 인원도 많아서 딱히 내가 다 감내할 필요 없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적당히 마력 기관을 수복하며 몸을 움직이기에 좋은 환경이다.

아실리에가 또 사건 사고를 따라다니냐며 한 소리 할 수는 있겠지만... 그때의 피난민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했기에 나는 의뢰를 받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대뜸 혼자 간다고 하면 혼날 게 뻔하다보니, 일단 엔그림에게 파티의 가능성에 대해 언질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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