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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99화 (299/412)

발루스는 신출내기 모험가였다.

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모험가들처럼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거나, 영웅에 대한 환상을 가져서 모험가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날 때부터 기골이 장대한 편이었고, 인근 마을 장정들을 다 모아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힘이 셌으며, 스스로 몸 쓰는 일을 곧잘 배우고 응용할 줄 아는 재능이 있다는 것까지 자각했다 보니 긴 고민 끝에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한 것에 가까웠다. 영주 성에서조차 그를 눈여겨보고 사병으로 고용할 의사를 내비쳤기에 나름 자신있게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제대로 기술을 배우고, 과도한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모험가도 충분히 할 만한 직업이라 생각했다.

모든 직업들이 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만 그저 마을의 다른 직업보다 위험에 놓일 상황이 많을 뿐이며, 그렇기에 좀 더 많은 돈을 만질 기회가 있는 직업이라고 말이다. 심지어 그리 생각하면서도 스스로가 그 많은 돈을 만질 기회를 오롯이 쟁취할 것이라 맹신하지도 않았으니 발상만큼은 참으로 건설적이라 할 수 있겠다.

아버지를 따라 영주의 방앗간지기로 살아서는 결코 만질 수 없는 돈을 만질 기회를 찾아 마을을 벗어난 발루스는 곡식을 빼돌려 먹고 사는 방앗간지기가 아니라 오롯이 제 방앗간을 가지고자하는, 원대함과 소박함의 사이 그 어딘가에 자신의 꿈을 심어둔 채 남들은 기피하는 의뢰마저 받아들이며 틈틈이 돈을 모아 수도로 상경했다.

그마저도 수도에 대한 환상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같은 신출내기들에겐 가장 안정적인 경험의 땅이라는 실로 타당한 이유 때문이었다. 일부러 겨울이 채 다가오기 전에 서둘러 올라온 것도 똑같이 겨울이 되어 어려워질 의뢰라면 수도가 차라리 낫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실제로 최근 마물의 창궐이다, 마족이다 하며 위태롭고 시끄러운 지방과 비교했을 때 수도는 확실히 안전했고, 발루스는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자신은 영웅담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영웅담이라는 걸 제대로 듣고 살지 못했었을 뿐이라는 점이다.

어릴 적부터 종종 들려온 영웅담이라는 건 전부 허풍이 가득한 것들이었다.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하늘을 가르는 검사, 주문을 외우는 것만으로 일격에 오우거의 머리를 쪼개버릴 수 있는 마법사, 홀로 수백 명의 군사를 상대하는 기사 등등.

조금은 머리가 빨리 여문 편에 속했던 발루스에게 있어 그런 이야기들은 전부 허무맹랑한 소설에 불과했으며 그는 허구에 가슴 졸여할 줄 몰랐다. 그런 그에게 있어 수도에서 들려오는 영웅담이라는 건 허구가 아닌 현실이자 바로 옆에서 살아 숨 쉬는 영웅들의 발자취였다.

열여덟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가슴이 뛰는 영웅담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발루스는 저도 모르게 들떠버렸고, 그래서 크게 실수했다.

최근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담의 주인공인 엘드미아 에가가 바로 자기라는 한 남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린 것이다.

"다, 당신이 그 유명한 레비엥의 단...!"

"어허, 그렇게 크게 이야기하는 거 아니야. 품격이라는 게 있어야지."

과연, 소문이라는 게 전부 믿을 건 못되더라도 일말의 진실은 담겨 있는 법이라던가. 반역자의 목을 단칼에 쳐내고 제국의 용사와의 대련마저 이겼다는 남자는 얼굴에 무시무시한 흉터들과 함께 날렵하게 생긴 사냥개 한 마리를 데리고 있었다.

사방팔방 뻗어 나온 소문으로는 엄청난 거구의 근육질이라던데 사내는 나름 근육질일지언정 거구까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보다 조금 작았다.

"이 상처가 반역자 엔벨데의 저택에 들어갈 때 생긴 거지. 열이 넘는 기사들을 전부 상대하고 나서야 상처가 생겼다는 걸 알아차렸어."

아련하다는 듯 얼굴을 가로지르는 상처를 만지는 그의 모습에서 노련한 전사의 연륜마저 느껴졌다. 아니, 느껴진다고 착각했었다.

술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조언이라는 형태의 허풍을 들으며 술잔을 기울인 발루스가 정신을 차린 것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였다.

"이 씨발 새끼!"

술값뿐만 아니라 주머니까지 탈탈 털려 안 그래도 없던 밑천이 다 털린 다음에 말이다. 사실은 그래 놓고도 정신을 못 차려서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발루스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세상에, 구석에서 뭘 그리 신나서 쑥덕거리나 했더니. 그 새끼 그거 퇴물 모험가라네. 최근 어딘가에서 개 한 마리 끌고 오더니 그딴 구라를 치고 있었던 건가."

혀를 차면서도 발루스를 불쌍히 여겨 스튜 한 그릇을 공짜로 내주는 주인장의 온정에 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나올 것만 같은 기분 속에서, 발루스는 빠르게 스튜를 먹어치운 뒤 당장 하루 숙박할 돈이라도 벌기 위해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그 사기꾼이 매상은 올려 줬기에 쉬쉬하고 넘어가려는 주인장의 속내까지 파악하기엔, 당장 발루스가 느끼는 울분이 너무 강렬했다.

"빌어먹을 새끼 같으니. 도시 놈들은 죄다 입발린 소리에 거짓말밖에 할 줄 모른다더니!"

엘드미아를 사칭한 놈과 만나면 반드시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가득한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

그런 그의 앞에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똑같은 짓거리를 하는 다른 놈이 나타나 대뜸 사람들을 밀쳐 버리니 눈이 돌아갈 수밖에. 자신을 등쳐 먹은 새끼는 아니었지만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난 발루스의 눈에는 그놈이 그놈이었다.

그렇게 주먹을 휘둘렀고, 뭐라 떠들다가 기억이 날아갔다.

거기까지 떠오른 발루스의 상체가 용수철처럼 튕겨 올라오려는데, 누군가가 그를 강하게 억누르며 저지한 탓에 일어나지 못했다.

"친구, 가만히 있어. 지금 갑자기 움직였다가 괜히 구토하고 정신 못 차릴 수도 있으니까. 일단 진정해."

억센 손길로 그의 어깨를 누르는 건 한 명이 아니었다. 쓰러진 자신을 두고 대여섯 명의 남정네들이 둘러앉아 내려다보는 광경에 공포감마저 느낀 발루스는 다급하게 되물었다.

"뭐, 뭐요? 잠깐. 여기가 어딥니까?"

하지만 그런 그의 절박한 반응과 달리 주변에서는 사나운 웃음과 함께 여유만이 흐를 뿐이었다.

"이야, 이거 제대로 날아갔구만. 그래, 어디까지 기억나나?"

"분명... 그놈이 뭐 달라진다고 하고... 그걸 비웃다가..."

"이 친구 이거 물건이네. 그걸 맞아 놓고도 입에 '그놈'이라는 말이 붙어?"

"오히려 아직 정신 덜 차렸다는 증거 아니겠냐? 이봐, 당신이 누구한테 주먹질했는지는 기억나?"

"사, 사칭범아닙니까? 엘드미아 에가인 척 하고 다니는..."

심지어 사나운 사냥개도 아니고 뭔 순박하고 귀엽게 생긴 목동견 하나를 품에 안고 있는 꼴이 어처구니가 없는 녀석이었는데... 물론 자기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장난 아니긴... 했지...만...

"풉! 아이고, 이 친구 어디서 사기꾼 새끼한테 한 번 긁히고 왔었나보네. 수도에 온 지 얼마 안 됐구만?"

"뭐야, 신출내기였어? 겨울 신생아라니, 크게 될 놈이신가 아니면 훅 갈 놈이신가?"

"훅 갈 기회 놓쳤으니 크게 될 놈 아닐까? 낄낄낄."

아무리 발루스가 정신이 없다 하더라도 주변의 반응을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진짜 엘드미아 에가였다.

용사와의 대련을 이기고, 잠깐 고용된 거였음에도 불구하고 레비엥 변경백의 명예를 위해 구금소의 대학살을 저질렀음에도 무죄 방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끝끝내 반역자 엔벨데의 저택에 단독으로 쳐들어가 초토화 시키고 그의 목을 벤 모험가.

동시에 자신에게 이빨을 들이댄 이에게 손속을 두지 않아 단두대로 통하는 인물.

"어, 어, 어, 어떻... 어떡..."

"에이, 그리 쫄지 마 젊은 친구. 한 대 맞고 끝났잖아. 그럼 끝이야. 앞으로 조심하면 돼."

"어떠...예? 그게 무슨..."

얼굴에 손을 대며 뜬금없이 눈알을 확인하고 이리저리 돌리는 투박한 손길이 자신에게 다른 이상 징후가 있진 않은지 확인하려 하는 것이라는 걸 뒤늦게 이해하고 가만히 있는 발루스에게 남자들의 설명이 이어졌다.

"죽일 거였으면 진즉 죽었다는 이야기지. 아까 대화 기억나? 댁이 원한이 있으면 뭐 달라지냐고 했던 거?"

"...예. 기억합니다."

"엘드미아 형씨가 말했잖아. 많이 달라진다고. 달라진 결과가 이거야."

멀쩡하구만, 턱은 좀 아프겠지만 잘 껴놨으니 걱정 안 해도 돼.

호쾌하게 웃으며 등을 탕탕 두드리는 남자의 말을 듣고 나서야 발루스는 어렴풋이 상황을 이해했다.

원한이 없기에 맞고 끝났다. 원한 관계였으면...

"모험가 중에서 엘드미아 형씨한테 목 날아간 건 당텔 그 병신이랑 엮인 놈들 뿐이었어. 대부분은 그... 훈게방변? 뭐 그런 거처럼 경고로 끝나지."

"훈계방면 이 무식한 새끼야. 죄질이 가벼우니 훈계하고 풀어 준다고."

"씨팔, 이래서 모르는 말은 쓰는 게 아니라니까."

저들끼리 지적하고 욕하면서도 좋다고 낄낄거리는 꼴이 우스울 법도 했지만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린 발루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저 멀리 2층에서부터 걸어 내려오는 엘드미아를 봤기 때문이다.

아까처럼 목동견을 품에 안고 내려오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이번에야말로 벌떡 일어난 발루스는 허겁지겁 달려가서 자신을 노려보는 엘드미아에게 그대로 머리 숙여 외쳤다.

"죄송합니다! 사칭범인 줄 알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길드에 가벼운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뒤에서 자신을 살펴봐준 사내들이 '오우, 크게 될 친구가 맞나본데?' 같은 소리를 해댔지만 발루스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사칭? 나를?"

방금 전까지는 아니꼽기 그지없던 목소리와 생김새에서 진짜 위압감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지만, 발루스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마저 말했다.

"하필 어제 엘드미아 님을 사칭한 사기꾼을 만나 재산을 다 털려서 제가 순간 눈이 멀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손발이 벌벌 떨렸지만 사과는 해야 했다. 잘못을 저질러놓고서 똑같이 맞았다고 모른 척하며 피하는 건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어떻게 생긴 놈이었냐?"

"키, 키는 저보다 조금 작고, 어, 얼굴에 흉터가 좀 크게 있었고, 그, 사냥개 같은 걸 데리고 다녔습니다!"

"씨발, 아주 가지가지하네. 넌 또 거기에 당했고?"

"...예."

작게 웃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지만 발루스는 그게 유쾌함이나 비웃음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저건 분노다. 하지만 그 알싸하게 느껴지던 분노는 짧은 웃음과 함께 거짓말처럼 수그러들었다.

"뭐, 그러면 그럴 수도 있지. 얼마나 털렸는데?"

"으, 은화 열 개요."

"옘병 애 코 묻은 돈이나 뺏는 새끼한테 사칭을 당하게 될 줄이야."

한숨을 쉬며 잠시 무언가 뒤적이던 엘드미아가 왼손만으로 발루스의 어깨를 잡고 강제로 세웠다. 퍼뜩 놀라면서도 그 손길을 따라 허리를 세우니, 엘드미아가 잠깐 눈을 마주치고는 손에 무언가를 쥐어줬다.

"미리 찾아서 피해 보상금까지 뜯었다고 생각해라. 그 새끼는 찾게 되면 내가 죽일 거니까 신경 끄고."

'혹여라도 그 새끼가 어딨는지 알게 되면 말해. 수고비는 챙겨 줄테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말하며 두어 번 어깨를 두드린 엘드미아는 그대로 길드를 벗어났다.

제 손에 쥐어진 은화 열다섯 개와 두말없이 멀어져 가는 엘드미아를 번갈아 보던 발루스는 감격에 벅차 뭐라 제대로 된 감사의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말았다. 사칭범이 진짜 엘드미아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죽을 거라는 건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저렇게 멋진 영웅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놈은 죽어도 싸다.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 발루스는 방방 뛰는 목동견과 함께 멀어져가는 엘드미아의 뒷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엘디! 아무리 네가 사고를 찾아다닌다고는 하지만 이번엔 기간이 너무 짧잖니!"

"가만히 있으라는 말 들은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움직여!! 안 돼! 못 가! 갈 거면 나도 데리고 가!!"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참으로 태연하기 그지없군. 그러려고 우리 가문을 나왔나?"

정작 발루스가 목표로 삼은 당사자는 집에 돌아가 의뢰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예상보다 2명 더 늘어난 여자들에게 무릎 꿇은 채 가루가 되도록 까이며 쭈그러들기 시작했으나, 그가 그 사실을 알 방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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