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를 맞이한 건 셰릴과 세네란이라는 예상치 못한 조합의 두 방문객이었다.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한 것도 잠시, 마족들이 마력 운용을 무리하게 했을 때 챙겨 먹는 보양식 같은 게 있다며 싸 들고 온 세네란과 병문안 겸 지크프리트의 전갈을 전해주기 위해 온 셰릴을 앞에 두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의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우를 범했다.
결과? 당연히 쭈구리 엘드미아다.
옆에서 바둥거리며 고집을 부리는 세네란은 둘째치고, 백번 양보해서 그냥 볼만 부풀린 채 분위기만 잡을 뿐인 아실리에도 어찌저찌 넘길 수 있을 거 같았지만 셰릴의 싸늘하게 죽은 눈은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게 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덕분에 지금 나는 빼액거리는 세네란을 옆에 둔 채 두 사람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 변명을 늘어놓아야만 했다.
"아니, 정말 위험하지 않다니까? 게다가 이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받겠다고 한 거 아니야. 내가 마력 기관을 생성한 뒤 처음으로 겪는 이상 징후 중 하나잖아? 거동에 불편이 있는 수준이 아닌 만큼 오히려 이럴 때 조금씩 움직이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무슨 증상이 있는지, 어디까지 활동이 가능한지 기록하고 정리해놔야 나중에 정말 심각한 상황이 닥쳤을 때 충분히 대비할 수 있지 않겠어?"
물론 그런 생각까지 하지는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받은 건 아닐지언정 그렇게 건설적인 계산 끝에 받은 의뢰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대놓고 그리 말했다간 의뢰는커녕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허락을 받아야 할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급조해낸 변명치고 상당히 그럴싸 했던 것일까? 세네란은 솔깃한 표정을 지으며 바둥거림을 멈췄지만 정작 셰릴과 아실리에의 반응은 덤덤했다. 머릿속의 일천하고도 하나의 엘드미아들이 다음 변명을 급조해야 한다며 난리법석을 떠는 찰나의 순간, 먼저 입을 연 것은 아실리에였다.
"누나는 정말 모르겠다. 세상 어느 사람이 대악마랑 싸워 놓고서 이틀 만에 또 움직이려고 하니."
"그, 악마들은 정말 별거 아니라니까? 이번에는 심장이 없는 경우인데다가 온갖 삽질을 많이 해서 좀 귀찮았던 거지, 걔 진짜 별거 아니었어. 가짜 용으로 변신해서 발버둥 좀 친 게 다였다니까 그러네."
팩트를 근거로한 설명이었음에도 아실리에는 내 말보다 옆에 있는 셰릴을 더 신뢰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랬는데 얘가 이렇게 반응하니?' 라는 느낌이다.
"에이, 셰릴. 너도 봤잖아.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고 그래."
"봤지. 가짜 용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용이었던 것의 꼬리에 직격으로 맞은 다음 그 반동을 이용해 등에 올라타겠다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올 계획을 직접 이행한 모습을 말이야."
망할 악마 새끼... 하여간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그거...야... 그래도 꼴에 악마인데 무슨 개수작을 더 부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나도 차악을 선택한 거지. 실제로도 지 불리해니까 갑자기 하늘로 날아올랐잖아. 나 그때 안 올라탔으면 걔 그대로 도시에 브레스 쏘면서 도망쳤을걸?"
"...으음."
다행히 비겁한 팩트를 증거로 내밀자 셰릴의 시선이 살짝 흔들렸다. 그 반응은 비록 잠깐이었지만 아실리에에게 내밀 증거로는 충분했다.
"그리고 누나, 나 못 믿어? 이 한 몸 건사하겠다고 열심히 살아가는 내가 몸 상할 일을 골라서 할 리가 없잖아. 봐 봐, 셰릴도 내가 좀 무모하게 움직여서 걱정할지언정 당시의 내 판단이 나름 최선이었다는 걸 완전히 부정하진 못하잖아.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의뢰 그거 그냥 잠깐 마실 다녀오는 수준이라니까?"
"....으으, 진짜 말이라도 못 하면 밉지라도 않지."
원래부터 화보다는 걱정이 앞섰던 아실리에였기에, 내 합리적인 반박에 마지못해 하면서도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으며 다과를 준비하는 옌 티에를 돕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이건 승낙이다! 가장 큰 고비 하나를 넘긴 나는 슬쩍 셰릴을 바라보았고 셰릴은 그런 나를 도끼눈을 뜬 채 바라보다가 마찬가지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가는데?"
"라비엘 쪽에서 급하게 부탁한 일이라 방학까지 기다릴 수는 없을 거야. 못 해도 이번 주 안에 움직여야겠지."
"...제국 용사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방문할 테니 시간 비워 놓으라고 하던데."
"'질문에 답변한다고 했지 언제 한다고는 안 했습니다. 파티에 들어가는 것을 고려한다고 했지 들어가겠다고는 안 했습니다.' 라고 전해줘."
자신만만하게 내뱉은 농담이었지만 세네란도, 셰릴도 정말 쓰레기를 다 보겠다는 시선을 보내 나를 뻘쭘하게 만들었다. 농담으로 던진 말에 반응이 이러니 나도 조금 억울해졌다.
"아니, 결국 내 밑천 드러내서 일 터지려는 걸 막아준 거랑 다를 바 없는데 약속 좀 미뤘다고 반응이 너무 박한 거 아닙니까? 농담이라구요. 농담."
"...엘드미아야 미안. 솔직히 너라면 진짜로 그렇게 미룰 거라 생각했어."
"...흠흠, 나도 그랬다."
머쓱해하며 솔직하게 사과하는 두 사람의 반응을 보며, 나는 당당하면서도 서운한 척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그리고 솔직히 그런 생각을 아예 안한 건 아니었다는 사실은 가슴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어차피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면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게 더 많아질 테니, 용사님한테는 그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전해줘.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을 처리한 뒤 직접 제국으로 찾아가겠다고. 아, 겸사겸사 이것도 좀 전해드려."
원래 지크프리트가 왔을 때 주려고 준비해 놓은 에스뮈에에게 줄 감사 편지를 꺼내 건네주니, 셰릴은 의아한 표정으로 받아들었다가 수취인의 이름을 보고 오이를 본 고양이마냥 움찔거렸다.
"1 황녀는 왜..."
"마지막에 악마의 저주를 막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1 황녀님 덕이거든. 감사 인사 정도는 해야지."
"...으음, 그래?"
왜 그게 에스뮈에 덕인지 궁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셰릴은 일단 별 말 없이 편지를 챙기며 도끼눈을 풀었고, 나는 예기치 못했던 위기를 훌륭하게 극복한 것에 자부심마저 느꼈다.
그렇게 가장 큰 장벽 둘을 넘긴 만족감에 가득 찬 상태로 세네란을 바라보니 그녀는 어느새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데려가 줄 거지?"
"일하러 가는 건데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알아서 잘 기록할테니 연구나 하고 계십쇼."
"아!! 왜!!"
아실리에 한 명만으로도 충분히 시선 집중이다. 나도 놀러 가는 게 아닌만큼 괜히 번거로운 일을 늘리고 싶지 않다.
남자 모험가 하나가 여자 둘을 끼고 움직이는 경우가 흔한 것도 아니고, 그 흔하지 않은 경우조차 보통은 질투의 눈총을 받기 마련인데 내가 왜 세네란을 데려가?
결국 내 통보에 불만을 가지고 남의 집에서 품위없이 바닥을 뒹굴기 시작한 세네란이었지만 나에겐 아무런 효과도 없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
"라비엘에 관련된 소식이라면 돌아오는 길에 조금은 들은 게 있습니다."
자기가 언제 추태를 부렸냐는 듯 깔끔하게 포기하고 차나 홀짝이는 세네란의 모습에 어이없어 하는 사이, 어디서 구해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쿠키까지 능숙하게 준비를 마친 옌 티에가 자리에 앉으며 대화에 합류했다.
"그래 봤자 대수로운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별 생각 없이 비리를 저질렀는데 하필 반역자와 엮여 있었다, 정도의 상황이었죠. 라비엘의 영주는 역모와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것을 포기한 상태라고 합니다."
"흠, 길드장이 말한 것처럼 지원 자체는 문제가 없을 거라는 이야기인가..."
"그렇죠. 이미 마을의 건설과 경제활동을 위한 기반 시설 구축 등 많은 돈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임금에 관한 불만도 딱히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교차 검증 덕에 마음이 놓이는군. 일 해 놓고 돈 못 받을 정도로 허술하진 않지만 그런 상황에 놓이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쁜 일이니까 조심하고 보는 게 맞다.
"다만..."
하지만 옌 티에의 정보는 그게 전부가 아닌 모양이었다.
"마을 경비에 예상보다 많은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단순히 고용된 경비들의 실력이 부진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초겨울은 대비없이 맞이하게 된 추위에 압박감을 느낀 몬스터들이 가장 난폭한 시기니까요. 방심과 변수, 부족한 실력이 겹쳐진 결과라고 하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집니다."
어차피 어지간한 변수가 아닌 이상에야 우리의 신변을 걱정할 이유는 없었지만, 마을 경비를 우리 둘이서 서는 것도 아닐 뿐더러 꾸준하게 피해를 입게 되면 전체적인 분위기가 흐려지기 마련이다. 그사이 몇몇 양심 없는 것들이 우리에게 실력이 있으면 좀 더 나서라는 식의 적반하장을 시도할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다가 나한테 처맞을 수도 있는 거지.
제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차를 홀짝이는데 잠깐 눈을 굴리던 세네란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는 게 알려지고 통계로 잡힌다는 건 처리가 가능한 수준의 사건들이라는 거 같네."
"...그런가요?"
"그렇지. 실종같은 게 엮인다던가 괴현상이 일어나서 파악조차 안 되는 게 아니잖아? 가정부 분의 말대로 좀 난폭해진 몬스터들이 무방비한 거주지를 발견해서 맹목적으로 달려든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고 봐. 더 큰 사건이었으면 적급 지원을 요청하는 게 아니라 자급 정도로 올려 부탁하지 않았을까?"
방금 전까지 투정을 부리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실로 명확하고 냉철한 가설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면 너를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네가 기록을 등한시할 정도로 긴박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기준이 엘드미아다 보니 상대적으로 별일이 아닌 게 맞을 거 같네."
그리고 그 가설을 들은 셰릴과 아실리에는 내가 절절하게 변명을 늘어놓을 때와 달리 진심으로 납득하는 듯했다.
덕분에 나는 나를 기준으로 별일이 아니라는 점에 납득하는 두 사람의 태도에서 나를 향한 신뢰감을 느껴야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말한 것보다 세네란의 말을 더 신빙성 있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소소한 배신감을 느껴야하는지 잠깐 고민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