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릴과 세네란과의 예상치 못한 만남으로부터 이틀 후, 나와 아실리에는 길드에서의 의뢰 수속을 마친 뒤 라비엘로 향할 준비를 마쳤다.
"그럼, 집 좀 잘 부탁할게."
"잘 다녀오십시오."
졸지에 완벽한 타이밍에 고용해버린 옌 티에의 배웅을 받으며 말에 오른 나는 겨울용으로 새로 구입한 장비를 마지막으로 점검한 뒤 말 옆에서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 라이카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평소와 다르게 옷을 걸치고 있다. 이번에 내 옷을 새로 사는 과정에 굉장히 마음에 드는 걸 찾은 탓에 당장 구입해 입힌건데, 다시 봐도 상당히 만족스러울 정도로 태가 났다.
"불편하지는 않냐?"
전생에서 봐 왔던 군견용 전술조끼같은 것을 걸쳐 입은 라이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솔직히 저런 게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놀랐지만 늑대를 비롯한 개과의 마물들을 조련해서 싸우는 이들이 많은 나라에서 꽤 잘나가는 상품이라는 게 상인의 설명이었다.
물론 이세계 사양에 맞게 조끼에 달린 건 가방이 아니라 라이카에겐 아무 의미 없는 가죽판 같은 것들이었기에 떼어내고 가방을 달아주느라 추가 비용이 좀 들어갔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주 귀엽거든.
수많은 고양이들이 귀엽다는 사실만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것처럼, 라이카는 자신의 귀여움으로 추가 비용이 나가는 것을 무마시켰다.
덕분에 돈을 좀 만진 상인이 친절하게 알려준 바에 의하면 이 전술조끼를 사용하는 이들을 마수 조련사라고 부른다던데, 이세계에서 자연 발생한 발명품이라고 하기엔 그 구조가 전생의 기억과 매우 흡사한 면이 있어서 나나 지크프리트를 제외하고도 생각보다 전생자가 많았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고보니 제국만 보더라도 문명의 발전 과정을 몇 단계 정도 건너뛴 것 같은 문물들이 좀 있는 편이었지.
덕분에 용사 외에 나와 같은 케이스가 대륙 어딘가에 더 있을 가능성이 갑자기 확 올라갔지만, 당장 신경 쓸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단순히 과거에 흘러 들어왔던 용사들이 남긴 유산일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확인할 방법도 없으니까.
아무튼 제 황토색 털과 깔맞춤이라도 한 것처럼 비슷한 색감의 조끼를 걸친 채 제자리를 빙글빙글 돈 라이카는 몇 번을 더 깡총깡총 뛰어본 뒤에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냥저냥!]
...딱히 마력을 더 먹여 준 것도 아닌데 묘하게 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어휘력에 변화가 있는 거 같단 말이지. 혹시 어디서 뭐 이상한 거라도 주워 먹나?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채 합리적인 의심에 빠지려는 찰나, 마찬가지로 준비를 마친 아실리에가 말에 올랐다.
"이번에는 라그니스에게 인사 안 하고 가도 괜찮겠니?"
"아, 장 보러 나갈 때 잠깐 들렀었는데 라드넬반데스 경과 훈련하느라 자리를 비웠다고 하더라고."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거의 반쯤 죽어 가고 있었는데 대체 이 겨울에 어디서 무슨 훈련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레니사 경의 설명을 들어 보면 상당한 스파르타 식 수업이던데, 다음에 만났을 땐 정말 그야말로 '전투'마법사가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서두를 건 없었기에 느릿느릿 출발하며 그런 감상과 상황을 설명했더니 아실리에가 묘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라그니스에게 마법적 재능이 상당한 편이라고 했었지?"
"듣기로는? 제국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놀랄 정도였으니까."
"타고난 마법사는 무시 못 할 속도로 성장한다던데, 기대되네. 라그니스는 얼마나 강해지려나?"
"...그걸 왜 기대해?"
"라그니스가 그렇게 마법에 열성적이게 된 건 엘디의 영향이 크잖아? 혼자 마족들 사이로 달려들어가는 것보단 든든한 아군과 함께하는 편이 생존률이 높은 게 당연하지 않겠니?"
그래도 변경백이라는 위치가 있는데 직접 싸우는 건 좀... 이라는 생각과 함께 스쳐 지나간 것은 라그니스가 스스로의 능력을 입증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있으니 의외로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지금의 라그니스는 안 그래도 힘든 상황이지만, 주변에 있는 거라고는 그런 그녀를 이용해 먹으려는 것들이 대부분인 게 현실이다.
솔직히 왕실에서 그녀를 통해 엔벨데를 치려고 희생양 삼았을 땐 라드넬반데스 경도 한통속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렇게 열성적으로 훈련을 시키는 것을 보면 뭔가 다른 의도가 있었다든가 정치에 관심이 없던 사람인지라 그녀가 겪게 될 여파를 미처 알지 못했다든가 했던 거 같고.
아무튼 그런 라드넬반데스 경을 제외한다면 현재 그녀를 이용하려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지지하고 도와주려는 세력은 오가토르프 가문 정도밖에 없다.
물론 레니사 경은 든든한 우군이고, 당장 나도 라그니스한테 뭔 일이 생기면 방관할 수 없는 사람이며 에스뮈에도 현실적인 영역 내에서 나름의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그저 레비엥 변경백이라는 인물의 뒷배경에 불과하다. 레니사 경이나 내가 혼자서 마왕군 군대를 척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에스뮈에가 황녀의 권력을 마음대로 남용해 군대나 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제국의 입김이 과도하게 들어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생길 테니까.
우리들은 나중에 라그니스에게 필요해질 인력과 자금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녀가 왕실과 손발을 맞춰 영토를 수복하더라도 이어지는 건 하하 호호 즐거운 영지물 라이프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영지를 보호하며 최전선을 도와야 하는 새로운 고난과 역경의 시작에 불과하며, 그러기 위해 물자를 구하고 자금을 융통받는 등의 모든 행동은 결국 빚으로 돌아온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픈데 끝이 아니다.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은 뒤에도 다시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돌아오질 않을 테니까.
변경백의 사병과 왕국의 군사력을 믿어? 그전엔 뭐 없어서 밀렸나? 아무리 고향이 그립다고 하더라도 정말 그리워할 사람들은 대부분 거기서 죽었을 것이고, 결국 다른 곳에서 몰린 피난민을 변경백령으로 넣어야 할 텐데 누가 자진해서 사지로 걸어가고 싶겠는가? 이미 7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인해 평범의 범주로는 도망친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세상이 라그니스를 필두로한 영지물 판타지 세계였다면야 주변에 수많은 인재들이 가신으로 들어가며 어떻게든 그럴싸한 상황을 꾸밀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장 수도만 하더라도 인재난에 허덕이는 상황이니 그런 건 꿈도 못 꾼다.
한 두 사람으로 해결되고, 몇 푼의 돈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단순 영지전이었다면 모를까, 상대가 마족인 이상 라그니스의 뒤에 따라붙는 건 불확실한 이익과 거대한 부채가 대부분이다. 귀족들은 그 부채를 굴려 장기적인 수익을 내려는거고.
결국 그녀에게 있어 최선의 시나리오는, 전생에서는 수많은 이야기들의 클리셰 중 하나로 통할 법한 발로 뛰는 대 서사시를 직접 일궈내는 것이었다.
전장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무력과 지력을 겸비한 영웅이 되어 재산과 명성 그리고 인맥을 얻으며 탄탄한 기반을 마련하는 그런 거.
그게 정말 실현된다면 아실리에의 말대로 나와 같이 전선을 휘젓는 상황도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뭘 그리 고민하니?"
"그냥. 처음 들었을 땐 부정적이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후후후. 그렇지?"
어째 주변에 하나같이 제대로 싸울 줄 아는 여자들만 생겨나는 기분이군.
이대로 가다간 지크프리트한테 뭐라고 할 처지가 못될 거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말을 몰았다.
◈
더럽게 추운 날이었다. 옆에서 피어오르는 모닥불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강한 눈보라까지 겹쳐져서 더더욱 지랄같이 추운 날.
겨울이라는 게 다 그런 거지만서도 최근 대부분의 활동을 따듯한 실내에서 지내 왔기에 더욱 시리게 다가오는 추위였다. 원래 이런 추위를 겪을 계획조차 없었기에 그럴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렇게 계획에도 없었던 외부 의뢰 활동을 하는 중이었지만 딱히 싫지는 않았다. 재수 없게 죽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엔글렘에서 터를 잡고 활동하다가 엘드미아가 모습을 드러낸 탓에 팔자에도 없는 동부 언저리로 피신한 적급 모험가 아브남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하는 시체보다 추위에 떠는 삶이 낫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우, 엔글렘보다 북쪽에 가까워서 그런가. 더럽게 춥네요 대장."
그와 함께 경계를 서던 부하 중 하나가 실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엔글렘보다 라비엘이 북쪽에 가깝긴 하지. 다른 무식한 놈이 저런 소리를 했으면 혀를 찼겠지만 나름 머리를 잘 쓰는 편인 측근 중 하나였기에 아브남은 실소를 터트렸다.
"새끼, 헛소리로 사람 웃기는 재주는 탁월하단 말이야. 장작이나 더 넣어라. 일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따땃하게 두 개 넣겠습니다요~"
너스레를 떨며 장작을 집어넣는 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하나 더 넣으라고 핀잔을 주자 되도않는 광대 연기를 하며 좋다고 집어넣으며 삭막한 분위기에 웃음을 주는 부하는 확실히 유능했다. 저런 꼴을 하면서도 사람 써는 솜씨는 또 기가 막히니 싫어할 수가 없지.
"이거 사람 써는 힘든 일만 하다가 지키는 일하니 편하긴 하네요."
"몸이 편하면 주머니가 궁해지는 거야 임마. 라비엘에서 돈 푼다는 이야기만 없었어도 안 했어."
사업장을 유지하기 위해 남기고 온 녀석들을 제외하고도 열다섯이나 되는 부하들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돈이 든다.
그렇다고 원래 자기 한 몸만 피신하려 했던 것을 기어코 따라온 놈들에게 니들 돈으로 알아서 챙겨 먹고 지내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아브남은 자연스럽게 단체로 돈을 벌 수 있으면서 자신이 피신해 있는 동안 위험도 적은 일을 물색할 수밖에 없었다.
"겨울철에 눈 돌아간 몬스터처럼 위험한 것도 드문데 목숨 걸고 하는 일 치고는 싼 편이지. 어제도 다른 놈들 두엇인가 고블린한테 당했다고 하지 않았냐?"
"오크였습니다."
"아, 그랬나. 그나마 좀 나은 친구들이었군."
씨발, 관문 도시 인근에서 오크 무리라니. 아무래도 마족들로 인한 피난 행렬은 인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대로는 엔글렘으로 돌아간 뒤에도 한동안 바쁘게 지내야 할게 분명했으나, 아브남은 당장은 머리를 비우고 휴식 아닌 휴식을 즐기기로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는 않았다. 길게 하품을 하는 사이에도 그칠 줄 모르던 눈보라가 한움큼 입안에 던져놓은 눈을 씹으며 코를 찡그린 아브남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지랄 같은 눈보라는 언제 그치려나."
"그러게나 말입...대장. 누가 옵니다."
실실 웃으며 광대놀음을 하던 부하가 자연스럽지만 굉장히 빠른 동작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며 말하자 주위에 있던 세 명의 부하들도 마찬가지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런 부하들을 믿었기에 아브남은 그들을 따라 긴장하기보다 만사가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눈보라에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는 숲속을 바라보았다.
"잘 보이지는 않네. 둘? 말 타고 있는 거겠지?'
"네. 한쪽은 덩치가 있고... 한쪽은 좀 호리호리하네요. 여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라비엘의 관계자들은 항상 마차를 타고 이동했으니 지나가던 여행자 아니면 의뢰를 받고 인원을 충당하기 위해 온 모험가일 가능성이 높았다. 극히 낮은 가능성으로 마을을 파괴하기 위해 다가오는 정신병자들일 수도 있었지만 아브남은 그런 가능성을 굳이 논하지 않았다.
"퉷, 팔자도 좋구만. 여자나 끼고 다니고. 마지막으로 살냄새 맡아본 게 언제 인지 기억도 안 나는구만."
"맨날 맡잖습니까."
"사내 새끼 땀 냄새는 내 겨드랑이로도 충분해 임마."
가볍게 부하의 뒤통수를 때리자 너나 할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는 사이 방문객들은 눈보라를 뚫고 임시 검문소라 할 수 있는 그들의 위치까지 다가왔고, 거리가 가까워진 덕에 상대방을 확인할 수 있게 된 부하들은 감탄과 경계 그리고 어이없음을 동시다발적으로 느꼈다.
감탄은 여자 엘프를 보고, 경계는 그 옆에 있는 전사를 보고. 마지막으로 어이없음은 두 필의 말 사이로 헥헥 거리며 뛰어오는 개를 보고서.
오직 아브남만이 이번에도 부하들과 달리 혼자서 다른 감정을 느껴야 했다.
'씨발 엘드미아가 왜 여기서 나와?!'
공포라는 감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