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 티에도 그렇고, 팔 잘렸던 녀석도 그렇고, 각자 갈 길 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이 많아지는 계절이라는 생각을 하는 동안 대충 비치된 손님용 테이블로 우리를 안내한 여성은 따듯한 차를 준비해 왔다.
이티스엘에서는 흔치 않은 붉은 머리를 올려 묶은 채 안경을 쓰고 있는 여성의 모습도 내 마지막 기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복장은 깔끔했고, 눈밑에 가득하던 다크서클과 그 너머에 있던 독기는 자취를 감춘 상태다.
간단한 대화 준비를 마치고 마주 앉은 그녀는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여줬다.
"그땐 경황이 없어 제대로 된 통성명도 못했었죠. 시엘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길드 소속으로 일하며 마을의 인원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조금 지쳐보이지만 업무로 인한 피로일 뿐 여유는 있어보였다. 그나저나 그 단기간에 길드 소속으로 관리 업무를 맡게 되다니, 나름 강단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었는데 능력도 있었나 보다.
"엘드미아 에가 입니다. 이쪽은 아실리에고, 수도에서 지원 의뢰를 받아 적급 모험가의 신분으로 왔습니다. 잘 지내시는 지는 모르겠지만... 건강하신 거 같군요."
다행이라는 둥의 불필요한 인사치레는 덧붙이지 않았다. 마을이 작살난 와중에 살아남는 건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목숨이 붙어 있다고 해서 잘 지내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 내 의중을 파악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시엘은 별다른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최근엔 업무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는 중이었지만, 엘드미아 님이 오셨으니 좀 나아질지도 모르겠네요."
"앞에서 이콥이라는 분께 잠깐 들었습니다. 몬스터로부터의 습격이 잦았다고 하더군요."
"맞습니다. 고블린들이 무리 지어 오는 것도 문제였으나... 최근에 오크까지 나타나서 피해가 조금씩 늘어나는 중입니다."
시엘의 설명에 의하면 현재 마을에는 거주민만 육십, 전문 건축 인력 여섯과 신성력을 지닌 성직자가 둘, 그렇지 않은 성직자 역시 둘이 있으며, 전투 인원으로는 용병이 열에 모험가가 스물이라는 모양이다. 그마저도 거주민 대부분은 노동이 가능한 연령대로, 차후 마을이 완전히 제 모습을 갖추었을 때 입주에 혜택을 받는 형태로 계약되어 일을 돕고 있다고 하니 상당히 대규모 사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분명 마을이 완공되면 200여명까지는 거뜬히 들어 앉아 살 수 있는 규모겠지. 하지만 그런 미래의 일은 둘째치고, 당장은 내가 이해하기 힘든 문제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라비엘에서 온 모험가들은 무슨 등급인지 알 수 있을까요?"
고블린이 번거로운 것은 사실이다. 그 작은 괴물들은 더러울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더러움을 무기로 사용할 줄 아는 영악함과 애들 정도 되는 힘을 지녔으니까.
허리에도 닿지 않을 것이 잔뜩 자세를 낮춘 채 다리를 노리고 칼질을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인데 그런 게 수십 마리라고 생각해봐라. 아무리 몬스터 먹이 사슬 최하위에 당당하게 위치한 공인 좆밥이라고 한들 능숙하게 위치를 잡지 못하면 순식간에 둘러싸여 원거리에서는 돌팔매질, 근거리에서는 똥 묻은 무기로 얻어맞다가 죽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러한 위협은 어디까지나 놈들이 확실하게 무리를 지어 행동할 때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이쪽이 소수인 경우에만 통용된다.
체력과 속도, 힘, 지능 등 모든 게 결국 꼬맹이들 수준이라 이쪽도 확실하게 대처할 줄 알면 손쉽게 썰어먹을 수 있거든. 이런 개활지라면 고블린들이 돌팔매 질을 한다고 쳐도 청급 모험가 혼자서도 스무 마리는 쉽게 썰어버릴 수 있을 정도이니 그 한계가 얼마나 명확한 새끼들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런 놈들이 무리 좀 지어오는 게 '문제'였고, 오크가 나오기 시작하니까 점점 피해가 생겨나고 있다니. 내 입장에서는 모험가들 수준부터 물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라비엘 모험가 길드가 뻔뻔하게 수도에는 적급을 요청했으면서 자기들은 청급, 황급 모험가들로만 인원을 구성했다는 이야기로밖에 안 들리기 때문이다.
"넷이 적급, 열이 청급, 나머지 여섯은 황급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라비엘 모험가 길드가 거기까지 뻔뻔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이번에 부상을 입었다는 모험가들은..."
"황급 둘과 그들을 인솔하던 청급 둘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들 외에는 처음에 총력전을 시도했던 고블린 한 무리를 홀로 상대하다가 조금 부상을 입은 적급 모험가 한 분과, 배탈이 나서 요양 중인 청급 모험가 한 분, 고블린을 상대하다가 다친 용병 두 분까지 총 네 분이 부상자로 있는 상태구요."
비전투 요원 70명을 30명이서 지키며 싸워야하는 상황이니 나름 납득이 가는 상황이긴 했다. 나는 내 속에서 피어오르던 라비엘 모험가 길드에 대한 불신을 잠깐 접어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 모험가 길드에서도 추가 인원을 보낼 의향이 있다고 했으니 당장 걱정할만한 문제는 아닐 거 같군요. 업무 관련으로는 누구에게 말하면 될까요?"
"바드나 벡헨이라는 적급 모험가와 용병단의 단장인 칼 굴스 씨가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회관에서 식사 중일 것 같군요. 아, 그러고 보니 식사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식자재는 라비엘에서 제공받으니 원하는 대로 가져다 쓰셔도 됩니다만, 직접 조리하시는 게 아닐 경우 정해진 시간 외에는 이상 추가 요금을 받는 구조라서요."
사전에 알고 있던 정보는 아니지만 충분히 예측했던 내용이었다. 나는 길드에서 받아온 두루마리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고, 두루마리를 펼져 내용을 읽어 본 시엘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모험가들과 용병들은 마을 회관에서 숙식하고 있습니다."
"그럴 거 같았습니다."
"이 내용을 알게 되면... 분위기가 안 좋아질 거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날 걱정하는 시엘의 반응에 나는 미소로 대답해주었다. 그녀의 지적은 정확했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불만이 있으면 의뢰주에게 따져야지.
◈
시엘과는 그 후로 근황에 대한 짧은 대화만 나눈 뒤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 영양가 있는 대화는 아니었다. 그저 자기 말고도 여기에 와 있는 사람이 좀 있다는 이야기, 일부는 관문도시에서 지낸다는 이야기 등이 전부였다.
그래도 복수를 꿈꾸는 이들은 없었다고 한다.
신전을 벗어나면서 굳이 길을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몰아치는 눈보라 속이라고는 하나 많은 불빛들이 다닥다닥 붙어 일렁이는 건물의 존재감은 확실했고, 거리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여전히 혼자 신난 라이카를 앞세워가며 도착한 회관의 입구에는 대충 봐도 용병임이 분명한 두 남정네가 경비처럼 서 있었다. 이 추운 날에도 우락부락한 팔 근육을 밖에 꺼내놓은 꼴이 좀 미친놈들 같기도 했지만, 열린 회관의 입구에서부터 내부의 열기가 흘러나와 그렇게까지 춥진 않은 모양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냐?"
음, 말이 짧은 거 보니 인성은 용병 평균이군. 그럼 나도 굳이 예의 챙길 거 없지.
"수도 모험가 길드에서 지원 의뢰를 받고 왔다. 신전에 있던 관리자와 이야기하니 일과 관련된 건 이쪽에서 사람을 만나 보라더군."
찬찬히 나와 라이카를 훑어보던 두 용병들은 아실리에를 보고나서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기와 질투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런 다음에야 슬쩍 몸을 비켜 길은 막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용병 중 하나가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에 들어가서 바드나를 찾아라. 모험가들은 그놈이 알아서 관리하니까. 들어가서 우울하게 생긴 덩치 큰 금발을 찾아라. 찾기 쉬울 거다."
"우울하게 생긴 금발?"
"보면 안다."
말은 좀 짧아도 그나마 양반인 놈들이라 침만 뱉고 끝난 거지, 여기에 세네란까지 있었다면 한 마디는 걸고 넘어졌을 게 분명하다. 성질 더러운 놈들이면 지랄도 좀 했을 거고.
괜히 시작부터 피곤해질 필요는 없었기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회관 안으로 들어섰고 일말의 주저도 없이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어 들었다. 쟤들이 왜 반팔차림으로 서 있었는지 납득이 가는 온기였다. 아무래도 건축가들이 이 회관을 지을 때 난방에 심혈을 기울인 모양이다.
"부상자들이 있는 것 치고 꽤 시끌벅적하네?"
"그러게. 별로 심각하진 않나 봐."
가볍게 빙 둘러본 회관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식사를 하고 떠드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잘나가는 여관의 홀을 크기만 키워서 그대로 때려 박았다고 해야 할까. 중앙의 화톳불을 기준으로 테이블이 늘어진 모습이 꼭 옛날에 드라마나 게임에서 보던 바이킹들의 회관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배치 뿐만 아니라 먹고 떠들며 치고 박는 인간들까지 다 포함해서.
"여유가 느껴지는 거보면 정말 세네란의 말이 맞았을지도."
일부러 분위기를 풀려는 시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먹고 마시기 바쁘다. 흠, 이렇게 놀고먹은 뒤 이 회관에서 그대로 모여 잔단 말이지. 숙박에 대해서 미리 조건을 달길 참 잘했다.
"금발...금발... 아, 저기 있다. 우울하게 생긴 금발."
"누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짜네."
처음엔 그냥 용병들의 외모 비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실리에가 먼저 찾아 손끝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거기엔 정말 덩치가 산만한 금발의 남성이 세상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라도 들은 사람처럼 우울한 얼굴로 조용히 식사 중이었다.
심지어 얼굴만 우울한 게 아니라 보는 이의 식욕마저 떨굴 기세로 깨작깨작 숟가락을 놀리고 있다. 그런 남자에게 아무 신경도 쓰지않은 채 웃고 떠들며 식사를 이어 나가는 주변이 신기할 지경이다.
"저렇게 먹는데도 주변에 사람들이 있다는 게 놀랍네."
요리를 만들어 준 사람이 봤으면 밥상에 불만있냐며 뒤통수를 치고도 남을 수준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