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같아서는 웃고 떠들던 놈들 다리에 구멍 하나씩은 뚫어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의뢰에 차질이 생기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당히 손속을 두면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깊은 빡침이 갈피를 못 잡고 화병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기에 눈보라가 치는 날 먼지가 나도록 두들겨 패는 것으로 타협해주었다.
그러는 사이 태연하게 뒤에 자리 잡은 아실리에는 소란에 놀라 튀어나온 요리사에게 음식을 부탁하는 여유까지 부리더니 이제는 언제 끝나나 지켜보며 식사를 이어갔다. 그 식사에 낄 수 없었던 나는 모험가 놈들이 먹던 음식 중 멀쩡한 걸 골라 먹으며 상황을 정리해야만 했고, 짬타이거가 된 기분이 들어 썩 유쾌하지 못했다.
"자세 흔들린다. 대가리 똑바로 박아라."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유쾌해지기 위해 접힌 금화 소속의 씹새들을 죄다 접힌 사람으로 만들어놓았지.
부서지고 박살 난 탁자와 의자의 잔해 속에서 거의 정수리로 대가리를 박는 수준까지 각도를 세운 탓에 죄다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상처 받은 내 여린 마음을 생각하면 그딴 건 중요치 않았다. 나는 바닥에 대가리를 박고 있는 바드나 앞에 앉아 방금 들은 이야기에 대해 되물었다.
"진짜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고?"
"예, 예! 저희도, 다른 녀석들도 황급 모험가까지 끌고 온 상황이니까요! 주도권을 잡아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일하려고..."
"에라이, 못 배워 먹은 새끼야."
끝까지 들을 가치조차 없는 변명에 그대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는 놈의 엉치뼈를 걷어차버렸다. 덕분에 바드나는 그대로 발라당 넘어졌지만 금세 제자리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가리를 박고 열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그 지랄하다가 습격받고 의뢰 조져서 마을에 피해가 오면 어쩌려고? 너희는 뭐 죽은 사람도 살려낼 줄 아는 성직자를 데리고 다니냐?"
"그, 그런 일이 없도록 나름 선을 지켜서..."
"선은 무슨, 아주 매를 벌어라 매를 벌어 씨발."
지들 말로는 예의 관행과도 같은 거라고 하는데, 전생에서도 그렇고 관행이라는 좆같은 것이 끼어들면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법이다. 나는 다 먹은 빈 그릇으로 놈의 목덜미를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그럼 너희가 이렇게 나한테 개 처맞고 대가리 박고 있는 것도 관행인데? 모험가 명성 비웃으면 칼부림 나는 거 안 배웠냐?"
"지, 진짜 본인이라고 생각 못해서..."
"내가 너희한테 구라를 치기라도 했니, 궤변을 늘어놓기라도 했니? 씨발 단두대가 나라고 대놓고 말해줬는데 뭐? 본인이라고 생각 못해? 던전에서는 상상력이 부족한 새끼부터 죽어나간다는데 적급은 카드놀이로 땄냐?"
사실 믿지 못 하는 것까지는 아무 상관 없었다. 그냥 거기서 끝났으면 적당히 넘어가줬다. 하지만 내가 대놓고 수도에서 의뢰 받고 온 적급 모험가라는 걸 알면서 비웃는 건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머릿수만 믿고 까불었으면 머릿수만큼 대가리 박는 결과도 감당해야지.
"하, 조용히 일만 하다 갈 생각이었는데..."
저 끝에서 모험가 놈들의 난장판에 일말의 관여도 하지 않던 용병들이 흥미 진진하다는 듯 이 모든 걸 구경거리 삼아 안주를 퍼먹게 되는 결과도 같이 감당하고 말이야. 아마 오늘 이후로는 대다수가 쟤들한테 병신취급 받아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할 거다.
일단 한바탕 휘젓고나니 화도 좀 가라앉았기에 본론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 일단 그건 그렇다 치고. 니가 업무 관리를 한다면 계획은 있을 거 아니야? 의뢰 수행 방침은 어떻게 정했는데? 오크까지 나오고 있다며."
"그다지 큰 규모의 습격도 아니고 못 막아 낼 수준도 아니라서 그냥 방치하는 걸로..."
"뭔 개소리야? 오크가 나왔는데 그냥 방치한다고?"
수도 인근 지역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몬스터는 끽 해봤자 코볼트나 고블린 같은 놈들이다. 심지어 그 흔한 슬라임조차 민간인은 대처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아예 뿌리를 뽑아버린 탓에 잘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한두푼 들어가는 일이 아니지만 왕국은 그 부분에서만큼은 더할나위 없이 진심이다.
관문 도시는 그렇게 수도에서 관리하는 안전 지대를 간접적으로 알리는 경계선 역할을 한다. 이 근처에 몬스터보다 도적이 더 많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는 소리다.
던전이 발생한 게 아닌 이상 그거보다 강한 몬스터들은 어쩌다가 굴러 들어온 거 한 두 마리가 전부인 지역에 느닷없이 오크가 나타났다.
나도 몬스터들의 구체적인 분포도를 달달 외우고 다니는 게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나마 가장 가까운 오크 서식지도 여기서 한참 멀리 있을 텐데, 여기에 나타났다.
"너 지금 관문 도시 인근에 오크가 나타났다는 게 뭔 의미인지는 알고 내린 결정이냐?"
몬스터들이 이 겨울철에 제 영역을 벗어나 이동하고 있다. 그게 우연히 수도 방향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례적인 상황이다. 기존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강력한 마물이 어딘가에 발생했다는 이야기일수도 있고, 정말 만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마족의 타격대가 왕국의 영토를 휘젓고 다니는 여파일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재수 없게, 몬스터들에게는 운 좋게 놈들이 근방에 무사히 정착하고 봄을 맞이하면 마을 입장에서는 대환장 파티가 일어난다는 의미인데 얜 어떻게 이리 태연하게 방임주의를 외칠 수 있는 거지?
"저, 저희는 마을의 보호를 위해 고용된 거니..."
"그래. 보호. 그러니까 몬스터가 찔끔찔끔 기어 나오면 그것들이 어디서 오고 뭐가 문제인지를 파악해서 뿌리를 뽑아야 할 거 아냐?"
마물 토벌의 기본 원칙이다. 피해를 입히는 몬스터의 소굴을 역추적해 박살 내는 것. 그걸 모르고 적급을 달았다는 건 말이 안 되니 이 새끼는 알면서도 이 지랄을 떨었다는 이야기이고, 그냥 적당히 간 보며 접근하는 몬스터들만 처리하고 나머지는 모르쇠로 일관하려고 했다는 소리다.
이건 안 봐도 뻔하다. 미래의 일감을 위해 몬스터를 아껴둔다는 발상이라도 한 게 분명하다. 바퀴벌레의 씨가 마르면 벌레퇴치 일감이 줄어드니 바퀴벌레를 남겨둔다는 수준의 발상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행동할 이유가 없다.
아주 못 배워 먹은 새끼나 할 법한 발상이라는 거지.
"다 필요 없고. 오크 나온 거, 라비엘에 보고 했어?"
했을 리가 없지. 길드에서 돌아오는 답변은 오크 부락 토벌일 게 뻔한데. 바드나는 우물쭈물거릴 뿐 대답하지 못했고, 그게 곧 대답이었기에 난 다시 한번 놈의 엉치뼈를 걷어차버렸다.
내 겨울 바캉스 계획을 파토낸 새끼가 치러야할 대가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빈약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이 새끼들이라도 써먹어야 한다.
"이 문제를 두고 너희끼리 싸웠다면 아직도 네가 업무 담당일리 없겠지. 여기서 더 편해지려고 기 싸움했다는 내 추리에 다른 이견이 있냐? 있으면 말해. 타당하면 들어 주고, 아니면 씨발 머리통에 바람구멍을 내버려서 굶주린 오크 새끼들 유인하는데 써 먹어 줄 테니까."
제발 한 놈만 걸리라는 심정으로 바늘까지 꺼내보았지만 대가리나 손을 드는 놈은 아무도 없었다. 제 목숨은 소중히 여기는 것들 같으니. 난 다시 머리를 박으려는 바드나를 다시 자빠뜨리며 말했다.
"너희가 다 덤벼도 나 하나 못 이기니 그 알량한 기 싸움따위 다 쓸모없어졌다. 내 말을 따라서 돈을 벌고 네놈들이 마을에 장난질을 치려고 했던 걸 비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든가, 여기서는 말 듣는 척하고 내일 아침 일찍 도망쳐서 평생 도망자로 사는 길만 남았지. 돈 벌 새끼는 일어나고 튈 새끼는 계속 대가리 박고 있어라."
대가리를 박고 있던 접힌 금화 소속 모험가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재빠르게 일어났다. 그 꼬라지는 참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까 열심히 밖으로 도망쳤던 다섯 놈들도 헐레벌떡 들어와 그 옆에 서는 건 마음에 들었다. 말귀를 잘 알아들으니 다행이네.
"내일의 업무는 오크 토벌이다. 마을 경비는 용병들과 거주민들 그리고 부상자들 중 상태가 나은 사람들로 충당할 거니 남아 있을 생각하지 마라."
"저, 저는 황급인데요."
용기가 가상하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맞아 놓고서도 자신이 찌끄래기라는 걸 명분으로 삼으려는 녀석이 나올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황급 모험가로 짐작되는 다른 놈들마저 발언한 놈에게 동의하는 것만 같은 시선을 보냈다는 점이다.
물론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적급 의뢰를 따라온 건 너희 선택인데, 내가 왜 그걸 신경 써야 하지?"
반박이 불가능한 철벽의 논리에 황급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너희가 선택한 의뢰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그리고 용병단분들? 식사 중에 소란을 일으켜 미안하지만 심심풀이용 구경거리 삼은 거로 퉁치고, 칼 굴스 단장님한테 의뢰를 좀 하고 싶은데."
더 이상 이 잡것들에게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기에 그대로 몸을 돌려 용병들을 바라보자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구경하던 그들의 시선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무슨 의뢰?"
"눈보라를 뚫고 라비엘에 가 줄 친구가 필요해서. 오크가 나타났다고 보고해야 하거든. 이 새끼들은 믿을 수가 없어서."
내 대답에 용병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쏠렸다. 그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건 아까부터 굉장히 침착하게 식사를 이어 나가던, 마치 영국 신사를 연상케 하는 멋들어진 콧수염을 지닌 중년의 남성이었다. 꽤 많은 양의 고기를 쌓아 두고 먹고 있었던 걸 봤었는데 어느새 깔끔하게 접시를 비운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잠깐 와서 이야기 좀 하겠나?"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군요."
정중한 사람에게 막대할 이유는 없지. 하지만 그런 내 반응을 본 용병들은 나를 무슨 이중인격의 미친놈처럼 보기 시작했다. 오합지졸이 따로 없었던 모험가들과 달리 꽤 규율이 잡혀 있는 그들을 지나 콧수염 아저씨 앞에 자리를 잡고 앉자, 그는 자신의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그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내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발라키아라고 들어 봤나?"
진짜 겨울에 뭔가 마법적인 기운이라도 있는 건가? 예기치 못한 만남이 끝이 없는데? 엔글렘하고 라비엘이 그렇게 가깝나?
"푸른 올빼미 용병단의 그 떠벌이?"
좀 얼이 빠지는 기분 속에서도 일단 대답을 했더니 남자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올빼미 용병단의 4소대장 칼 굴스라고 하네. 유명한 레비엥의 단두대를 직접 보게 되어 영광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