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척지게 될 거 같으면 일단 의뢰 거절부터 하라는 방침을 세운 용병단 사람들을 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세상 참 좁다.
몇 마디 화답 정도는 해주고 싶었으나, 날 치켜세워주는 칼 굴스와 달리 나는 여전히 푸른 올빼미라는 용병단이 얼마나 잘나가는 집단인지 몰랐기에 그냥 인사 삼아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아시겠지만, 엘드미아 에가입니다. 라비엘까지 안전하게 이동하는데 몇 명이나 고용할 수 있을까요?"
"한 명이면 충분하지. 돈은 따로 받지 않겠네. 발라키아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작은 성의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군."
보기 드물게 정중한 태도를 보이며 냅킨으로 입가를 닦는 칼 굴스를 보고 나서야, 나는 용병단 이름이 왜 '푸른' 올빼미인지 뒤늦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게 아무리 세계가 달라도 비슷한 구석이 하나씩은 있는데, 이 세상 내륙 지방에도 전생에서처럼 순수혈통의 상징을 푸른 피로 부르는 경우가 바로 그중 하나다.
거대한 차이가 있다면 이게 전생에서는 하얀 피부와 정맥을 상징하던 것과 달리 진짜 푸른 피가 흐르는 일족이 있다는 거지. 위대한 자의 혈통을 이은 그들은 상처가 빠르게 아물며 피 한 방울도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네 뭐네 하는 소문과 왕족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명성이 자자하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혈통이고 나발이고 간에 단순히 피에 작용하는 마법적인 무언가가 원인이라고 여겨지는데,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 친구들이 실제로 파란 피를 흘렸기에 그 일대에서 귀족이나 왕족을 상징하는 고귀함의 색이 파란색이라는 게 중요한 거지.
"귀족이십니까?"
귀족들이나 익힐 예법이 몸에 벤 사람과 묘하게 규율이 잘 잡힌 용병 단원 그리고 용병단 이름까지 합쳐 생각해 보면 비약이라 하더라도 한 번쯤은 입에 담아볼만한 추측이었다. 무엇보다 집사 생활을 하며 본 귀족들이있다 보니 확실하게 감이 왔다. 칼 굴스의 몸에 벤 예법은 결코 당일치기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칼 굴스는 눈썹을 살짝 올리는 반응으로 그친 반면 용병들의 눈빛은 아까와 달리 예리하게 변했다. 다행히 그들을 인지한 칼 굴스가 한쪽 손을 들어 올리자 시선은 금방 거둬졌다.
"귀족이었지. 어떻게 알았나?"
"어지간한 귀족 뺨치도록 예법에 익숙한 거 같아서 여쭤봤습니다. 내륙의 어느 왕국에서는 귀족들에게 푸른 피가 흐른다고 믿는다는 이야기도 같이 떠오르더군요."
"허, 용맹할 뿐만 아니라 박식하기까지 하군. 우리가 그쪽 출신이긴 하네. 볼타베이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왕국 중 하나인 바나이스 왕국이지."
"...그 발라키아라는 친구도 귀족이었던 겁니까?"
아무리 봐도 귀족이라 하기엔 좀 하자가 많은 친구였는데. 내 질문에 작게 웃으며 맥주로 입가심을 한 칼 굴스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다 그런 건 아니지. 원래는 바나이스 올빼미라는 이름이었는데, 애국심이 남지 않을 만한 사람들이 모인 데다가 자네가 말한 푸른 피의 귀족들에게 반감까지 많은 터라 대놓고 비꼬자는 의미로 이름을 바꾸고 지금에 이르렀을 뿐이거든. 몰락 귀족, 사생아가 유독 많이 모여 있는 건 맞지만 말이야."
발라키아가 딱 봐도 품위는 좀 떨어지잖나. 라는 농담을 마지막으로 껄껄 웃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용병단의 결속력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뭐, 자네도 바쁠테니 잡담은 여기까지만 하고. 라비엘 모험가 길드에는 오크가 나타났다는 단편적인 이야기만 전달하면 되는가?"
"정확히는 '예기치 못한 몬스터들의 이동이 발생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며 마을에 오크의 습격이 이어지고 있다.'입니다."
"음, 기억했네. 그리고 이건 호기심 때문에 물어보는 건데... 그게 길드에 보고를 해야할 정도로 중요한 내용인가? 우리는 사람 상대하는 직업이라 쉬이 감이 안 와서 말이야."
귀족 태생 용병이면 모를 수도 있지. 덕분에 푸른 올빼미 용병단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으니 나도 최대한 내용을 추려서 알려주었다.
"이티스엘은 토지가 괜찮은 편이라 사람도, 몬스터도 자리 잡은 땅에서 쉬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덕에 수도 인근 지역을 주기적으로 소탕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죠. 유독 번식력이 좋은 코볼트나 고블린 같은 것들은 어디에서든 기어 나오는 법이니 완전히 뿌리 뽑긴 힘들지만, 오크를 비롯한 상위 마물들은 경우가 다릅니다."
"...뿌리를 뽑아놨다는 말이로군."
"네. 왕국 건립 이후로 꾸준히 시도한 토벌의 결과로 수도와 관문도시의 간의 영토에는 그 어떤 마물들도 무리를 지어 살지 않습니다."
무리 짓지 '못한다' 가 아니라 '않는다' 라는 게 포인트다.
몬스터들도 생각은 한다. 과도한 적성 생명체라서 죽이지 못해 안달인 것이지, 쌍방이 합의만 한다면 얼마든지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지능을 지니고 있다.
왕국이 시도한 것은 놈들이 자체적으로 수도 인근을 기피하도록 만드는 것이었고, 지능을 팔아 드높은 번식력을 얻은 고블린이나 코볼트 같은 놈들에게는 실패했을지언정 나름 군락을 이루며 사냥과 약탈뿐만 아니라 채집도 겸할 줄 아는 것들에게는 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오크 정도 되는 놈들이면 압니다. 이 영역 안에 들어오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인간을 먹이로 볼 뿐, 놈들도 전승이 있고 전통이 있으니까요."
"죽을 걸 알면서도 들어온다라... 확실히 전장에서도 그런 경우는 위험하지. 덕분에 잘 이해했네."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라 다행이군. 상황이 정리되면 담소라도 나누자는 약속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이제 식사를 다 마치고 라이카와 놀고 있는 아실리에에게 다가 갔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솔직히 숙박과 관련된 걸로 조금 말다툼하는 게 전부일 줄 알았는데 언제나 예상을 빗나가네?"
"누가 아니래요. 세상이 말세라니까요 정말."
그리고 괜스레 한 마디 거들며 농담을 건넸다가 어깨를 맞아야 했다.
◈
그 뒤로 우리는 회관이 아니라 적당한 집 하나를 통째로 빌려 묵었다.
애당초 그런 계약이었지만 굉장히 이례적인 특혜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트러블이 일어나도 당연히 여기서 일어날 거라 예상했는데 엉뚱한 도화선에 불이 붙는 바람에 모험가들은 그런 우리에게 아무런 불만도 토로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어 버렸다.
그렇게 깔끔하게 숙면을 취한 뒤 일어나 맞이한 아침 하늘은 여전히 폭설을 쏟아 내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제와 달리 하늘이 보일 수준은 됐다.
일찍 일어나 집합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으나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하다보니 서둘러 움직여야만 했다. 남게 될 모험가들로 근무를 재편성하고 용병단과 거주민들에게 양해를 구해 오늘 하루는 작업보다 경계 근무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으며 시엘의 동의도 구해야 했기에 솔직히 꽤 빠듯했다.
그래도 나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용병단과 시엘 덕분에 다른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멀쩡한 모험가들과 달리 부상으로 인해 휴식 중인 모험가들은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혀 있었던 것도 한몫했고 말이지.
덕분에 그들은 자신의 일에 충실하려고 하다가 다치고 다른 놈들은 잔꾀를 부리며 보신을 한 것처럼 느껴져, 집합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바드나의 뒤통수를 괜히 한 대 후리긴 했지만 아무튼 깔끔한 시작이었다.
"너희들 스스로가 여기서 도망치지 않을 정도의 지능은 지녔다는 사실에 신께 감사드려라. 숲속에서 엘프에게 쫓기는 게 얼마나 끔찍한지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니까."
오그웬에서 추적술을 익히며 아실리에와 해온 훈련을 떠올려 봤을 때, 목숨을 거는 그 순간부터 결코 유쾌할 수 없는 경험일 게 분명했다.
내 말을 듣고 바짝 긴장하는 녀석들 사이에서 네 명의 적급들을 조장으로 세워 각각 청급과 황급 하나씩을 데리고 움직이게 편성하는 것만으로 탐색조를 꾸린 나는, 홀수라서 혼자 남게 된 청급 하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잠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에, 엘드미아 님과 동행하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런 내가 마치 덧셈 뺄셈 못 하는 병신으로 보였는지 오그웬에서 팔이 잘렸던 과거를 지닌 놈이 슬그머니 다가와 물어 봤기에, 나는 내가 고민하는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너희끼리는 숫자가 많으면 살 기회가 늘어나는 거지만 나한테는 걸림돌이다."
나는 오늘 아주 작정하고 숲을 뒤질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나보다 그쪽 방면으로 한참 더 뛰어난 아실리에가 힘을 쓰게 되는데, 아무리 내 몸을 신경 써서 상대적으로 쉬엄쉬엄 움직이더라도 여기 있는 청급이 쫓아올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불필요하게 시간이나 잡아먹겠지.
"너희 적급 넷. 내가 이 중에서 제일 약할 거 같다 싶으면 손 들어. 약한 놈 조에 넣는다."
"제가 제일 약합니다!"
쓸데없이 자존심 싸움 안 하고 칼같이 손을 드는 건 참 마음에 들었지만, 하필 그게 나에게 팔 잘렸던 놈이라는 게 문제였다.
옛날엔 병신이었을지 몰라도 이새끼 움직임이나 반응 속도를 보면 아무리 못해도 바드나보다는 강할 텐데?
"...그래, 그래라."
생각해보니 머릿수를 늘려 안전을 도모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조금이라도 강한 놈 파티에 어중이떠중이 하나 더 넣어서 그놈이 살 가능성을 높이는 것도 방법이었다.
"적급이면 다들 시계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
좀 비쌀지라도 그 편의성 때문에 보통은 적급을 달자마자 마석을 연료로 삼는 무음 회중시계 하나 정도는 들고 다니는 편이다. 다행히 네 놈들 모두 자기 장비에는 철저한 것인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크의 습격이 있었던 건 동쪽이니까 오늘은 그쪽으로 흩어지며 탐색한다. 아직 눈발이 심하고 해가 빠르게 질 가능성이 높으니 오후 2시까지는 귀환하는 걸 원칙으로 삼는다. 왕복 시간 잘 계산해서 괜히 추가 수색에 나서는 일 없게 해라. 물어볼 거 있는 사람?"
"오, 오크와 조우하면 어떻게 할까요?"
"뭉쳐 있는 군락을 발견했으면 복귀해서 알리고, 나머지는 직접 마주한 게 아닌 이상 교전을 피해라. 오크도 대가리가 있다. 정찰 보낸 새끼들이 자꾸 죽어 나가면 경계하겠지."
목적은 토벌이 아니라 퇴치다. 적당히 몇 마리 잡고 도망치게 두는 게 아니라 아예 새로운 군락 째로 없애버려야 하니 괜히 경계도를 높힐 이유는 없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아먹는 놈들이었기에 반문은 없었고, 우리는 용병들의 배웅을 받으며 숲속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