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크.
전생에서는 돼지 머리 달린 이족보행 몬스터 취급을 받거나, 막고라를 뜨며 진정한 상남자의 길을 걷는 종족으로 묘사되거나, WAAAGH!!를 외치며 전쟁에 환장한 거로 묘사되던 놈들.
정말 안타깝게도 이 세계의 오크는 셋 중 제일 마지막 부류에 가까운 놈들이다. 기술력같은 거 말고 전쟁과 전투에 환장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극도로 호전적이고 의식주를 해결하면 일단 전투부터 찾아다니는 골 때리는 특성을 지닌 전투 민족. 여기까지만 듣고 본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전투를 좋아하는 놈들인데 죽는 게 무서워서 수도 인근에는 얼씬도 안 하고 자기들 서식지 주변만 방황한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 그리고 당연하게도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놈들은 '자기들 기준에서' 자신감이 주체가 안될 만큼 규모가 커지지 않을 땐 천하의 개쫄보처럼 행동하며 야금야금 약탈로 연명하는, 상당히 졸렬한 이중성을 지닌 종이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생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대략 부족의 거주 인원이 30여 마리만 모여 있어도 슬슬 분노조절 장애가 온 것처럼 전투를 찾기 시작하며, 전투 가능한 병력이 20여 마리를 찍기가 무섭게 가장 먼저 다른 부족 오크들부터 찾아내 공격적 인수합병을 시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주변에 오크가 없으면? 당연히 인간들을 침략한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하는 짓은 영락없는 고블린 뺨치는 수준인데, 문제는 그러한 졸렬한 행보와 달리 놈들의 타고난 신체가 몬스터라는 명칭에 걸맞은 스펙이라 고블린의 한참 월등한 상위 호환이라는 점이다.
놈들은 이족보행 멧돼지 그 자체다. 외견적으로도, 근력적으로도.
고블린은 열 살난 애들 정도의 사고 능력을 지녔다고 평가받지만 이놈들은 그냥 사람과 비슷하다. 저들끼리 치고 박느라 군세가 커지는 경우가 매우 드물고 태생이 창조보다 파괴에 특화된 것들이라 그렇지, 둘 중 하나만 극복했어도 굉장히 위협적인 몬스터가 됐을 것이다. 뭐, 그런 호전적인 태도 때문에 다른 몬스터들과도 자주 영역 다툼이 발생해서 쉬이 세력이 커지지 않는 거지만...
재수 없게 조건이 갖춰지면 말 그대로 오크의 대군이 나라를 말아먹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난 이거 분명 어릴 때 마을 회관에 있던 싸구려 책에서 읽은 내용이고 동네 사람들조차 다 아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 모험가란 것들이 경각심을 가지지 않는 걸까?"
실제로 몇백 년 정도 전에 한 번 있었던 일이다. 당시 오크의 대군세가 서부에 있는 유명 왕국들 중 하나를 잡아먹는데 걸린 시간이 단 일주일이었다고 한다.
그 사건을 시작으로 서부 8 왕국이라 불리던 주요 국가들은 5 왕국이 되어야 했고, 오크라는 것들이 일개 왕국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존속이 달릴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사실 뿌리를 뽑을 수 있다면 진즉에 뽑았을 것이다. 아직 그러지 못해서 이러고 있는 거지.
"수백 년 전 정도의 내용은 전설로 남는 게 인간이잖니. 오히려 엘디가 인간치고 과거에 남은 기록의 중요성을 똑바로 자각하는 편에 가깝다고 봐."
눈발이 휘날리는 숲속을 봄날 피크닉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볍게 거닐면서 내놓는 아실리에의 의견은 꽤 신빙성 있었다. 마법과 악마, 온갖 이종족과 이능이 판치는 세계에 살면서도 전설 속에 있던 내용은 허무맹랑하다고 믿는 또라이들이 생각보다 많긴 하더라고.
다른 차원의 사람들이 보면 얘네들이 전생한 현대인이라 안전불감증에 걸려 있고 내가 이세계 토박이라 역사에서 배우려고 하는 줄 알 거다.
"찾았다."
그렇게 답답한 현실에 한탄하는 사이 흔적을 발견한 아실리에가 나를 손짓했다. 이 눈발 속에서 대체 어떻게 찾았나 싶어서 신기해하며 다가갔더니 그녀가 가리킨 것은 바닥이 아니라 나무였다.
뭔가 날붙이같은 거로 반쯤 후려치며 지나간 흔적이 남은 나무말이다.
"이런 흔적에 대해서는 예전에 엘디한테도 알려 줬었지?"
"응. 눈깔 돌아가기 시작하는 오크들이 제 성질머리를 못 이기고 종종 이렇게 주변에 화풀이를 한다고 알려 줬었지."
"으으음, 그런 표현은 안 했었지만 아무튼 내용은 맞아."
자기들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함도 아니고, 위협을 주기 위함도 아닌, 그저 싸우고 싶은데 못 싸워서 빡이 친 끝에 화풀이 삼아 남긴 흔적.
"좋지 않은데."
당연히 쫄보 모드일 땐 하지 않는 짓거리다. 습격을 가끔 한다길래 잔뜩 움츠러든 상태로 음식을 노리고 날뛰는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식량이 부족한 건 맞지만..."
"인원이 넘쳐서 부족한 상황일 가능성이 높지."
정확히는 식량이 아니라 '군량'이 부족한 상태.
오크들이 돌대가리라서 천만다행이었다. 저놈들이 돌대가리가 아니라 전략과 전술을 쓸 줄 아는 지성의 소유자였다면 마을은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또 한 번 초토화됐을 거다.
"그 정도 규모의 마을을 공략하는 데에는 지금까지 보내던 인원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거야. 선발대는 멍청하고 약해서 실패했다고 생각했을 테니 똑같은 인원으로 또 보냈던 거고."
오크들의 사전에 있는 전략과 전술은 오직 닥치고 돌격뿐이다.
자신감이 주체가 안 될 때 들고 일어나는 놈들답게 자신들이 충분하다고 판단한 인원으로 달려든 전장에서 패배하면, 그건 참여한 놈들이 약해서 진 것이지 인원이 부족하거나 전투 방법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여기지 않는다. 문제의 원인을 항상 외부로부터 찾는, AOS게임에 특화된 것만 같은 정신머리는 놈들이 인류의 자리를 빼앗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마냥 마음 놓고 있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만약 지난번 공격이 오크 족장의 마지막 인내심이었다면, 두 눈을 까뒤집으며 무능한 부하들에게 분노한 족장이 직접 군세를 이끌고 움직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누나, 누나는 돌아가서 시엘 씨에게 이 사실을 알려줘."
그랬기에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내렸다. 하지만 내 몸 상태가 만전이 아닌 탓에 아실리에는 보기 드문 거부 반응을 보였다.
"엘디가 돌아가고 누나가 추가 색적에 나서는 게 낫지 않겠니?"
"돌아가는 속도에서 차이가 나잖아. 누나도 알다시피 이건 한시가 급할 수도 있는 상황이니까 전력으로 돌아가야 해."
내가 온전하게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걸 배려하면서 움직였음에도 우리가 움직인 거리는 다른 모험가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다. 괜히 숲의 종족인 게 아닌 것이다.
"혹여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으면 다른 녀석들의 흔적을 찾아서 미리 복귀할 수 있게 도와줘. 나는 라이카랑 같이 좀 더 알아보고 갈게."
비상 연락용 폭죽 같은 거라도 있으면 좋았겠다고 잠깐 생각했지만, 괜히 오크들을 자극할지도 모르니 오히려 아예 없었던 게 나은 상황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내린 판단이 최선이었는지 반박이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내키지 않은 태도인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그래도 오크한테 당할까. 영 아니다 싶으면 다 포기하고 일단 귀환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제 성질을 못 이기고 전력으로 두개골 깨는 것에 심취해 활은커녕 돌팔매질도 안 하는 것들이다. 내가 급발진하지 않는 이상 아실리에가 우려하는 상황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알았어. 하지만 모험가들을 귀환시키는 것까지 다 끝마쳤는데도 안 돌아오면 내가 찾으러 올 거야."
그게 아실리에가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의 타협점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을 내린 아실리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고, 나는 오크가 나무에 남긴 흔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 위에 마력을 실어 주먹질을 해 보았다.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하는 최소한의 수준이라는 느낌으로 한 번, 그리고 조금 더 출력을 올려가며 두 번. 그렇게 애먼 나무에 세 개의 상흔을 남긴 뒤 건틀릿에 낀 나무 조각을 털어내며 비교해 보니 오크가 남긴 흔적은 두 번째 주먹질의 흔적과 비슷했다.
"전력이 아닌 데도 어중간한 오러 사용자는 씹어먹는 힘이라, 세상 참 불공평하다니까."
골목길에서 나를 위협하려고 어쭙잖은 오러를 두르고 벽을 쳤던 놈과 비슷한 수준이다. 전력으로 나무에 화풀이를 한 게 아닐테니 적당히 휘두른 것만으로도 그 정도라는 소리겠지.
이 정도면 두돈반 한 트럭을 타고 몰려온다 하더라도 어렵지 않게 쓸어버릴 수 있는 수준이나, 다른 모험가놈들과 마을이 문제였다.
"우선은 군락부터."
이미 일어난 사건을 놓고 육하원칙에 근거해서 원인 규명을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지금은 녀석들이 얼마나 있는지, 어디에 모여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게 관건이었다. 그것만 알아내면 만나는 족족 오크들 머리를 따고 다녀도 아무런 지장이 없으나 그전까지는 최대한 싸움을 피하며 내가 자기들을 쫓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해야 한다.
전투에 대한 감만큼은 짐승과도 같은 놈들이기도 하고, 규모가 줄어들면 언제든지 다시 쫄보가 되는 놈들이라 그런 건 또 귀신같이 파악하거든.
아쉽게도 주변에 라이카의 후각에 의지할 만한 흔적은 없었기에 나무에 남은 흔적들을 따라 직접 추적을 시도해야 했다. 오크들이 입는 옷이라고는 주술적인 성향이 강한 가죽 거적데기가 전부인지라 뜯어진 옷자락같은 걸 발견하는 일도 없었다.
계속 쏟아지는 눈 때문에 자칫 추적이 힘들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상황을 심각하게 만든 놈들의 호전성이 추적에 큰 도움을 주었다.
생각보다 자주, 그리고 많이 오고 갔는지 숲속으로 움직일수록 놈들이 남긴 흔적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나무는 너무 많은 놈들이 후려친 것인지 아예 쓰러져 있기까지 했다. 하여간 기도비닉과는 담을 쌓은 새끼들이다.
청각과 시각에 최대한 집중하며 숲속으로 들어가길 이십 여분 정도 지났을 무렵부터는 두 세 마리씩 뭉쳐서 다니는 오크 정찰대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니, 정찰대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시끄럽게 떠드는 덕에 보이기 전부터 위치를 알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덕분에 놈들을 크게 우회하며 놈들이 지나온 방향을 구체적으로 잡고 움직일 수는 있었다. 그러면서도 혹여 주변에 다른 모험가들이 있진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워 보았지만 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정도면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닐텐데 어떻게 조용할 수 있었던 걸까.
잠입과 은신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손쉽게 이동하며 지나친 정찰대의 숫자가 셋이 되었을 무렵, 나는 숲과 이어지는 산골짜기 인근에 투박하게 쌓여 있는 목책의 일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놈들의 규모가 예상 밖이라는 증거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