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에 넣고 다니는 지도를 꺼내 지금의 내 위치를 예상해 본다.
관문 도시뿐만 아니라 다른 인근 도시들의 순찰 범위를 짐작해서 눈대중으로 반경을 잡아보니 군데군데 빈자리가 많았다. 왕국의 영토 전부를 감시한다는 건 불가능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속에서 내가 눈여겨 봐야 하는 건 '틈틈이 비어 있는 경계 지역에 뭐가 있는지' 였다.
솔직히 쉬운 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부실한 모험가용 저가 지도인지라, 아무리 그간 주기적으로 길드에 소량의 돈을 지불하여 새로운 정보를 갱신해 적어가며 사용해 왔다고는 해도 이렇게 구체적인 지리를 파악하려면 죄다 어긋나기 마련이다.
"뭐, 기본 축척부터 정밀함과는 거리가 먼 지도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거지만."
세밀한 지도는 외국으로 유출될 경우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 올 수 있어서 고의적으로 정밀도를 조져놓은 감이 없진 않은데, 이 지도는 그걸 감안해도 구리다. 결국 상당한 부분을 임의로 때려맞춰가며 살펴보느라 시간은 조금 걸렸지만 일단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아무리 살펴봐도 오크들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대거 나타날 요소라고 할 만한 건 없었다.
"또 어디서 마족들이 게이트로 개수작이라도 부린 건가, 이럴 리가 없는데."
당장 주변을 둘러보며 얻은 정보들이 가리키는 방향이 너무 명확하다. 오크들이 주로 서식하는 지역은 동쪽으로 한참을 더 가야 한다. 그사이에 못해도 두 개의 도시와 다섯 개의 마을이 더 있는데, 이만한 규모의 오크들이 그걸 뜬 눈으로 지나쳐 왔을 리가 없다.
그리고 습격했다면 이미 소식이 오고 가며 토벌대가 움직였겠지.
대량의 오크들이 땅에서 솟아났든, 하늘에서 떨어졌든 간에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급하게 부락을 생성하고 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건 나뿐만 아니라 저놈들에게조차 굉장히 갑작스러운 사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목책에 쓰인 나무부터 당장 주변에 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때려 박고 본 탓에 듬성듬성 했고, 오는 길에 마주쳤던 오크들은 주변에 뭐가 있는지조차 제대로 몰라 이것저것 살펴보기 바빴다. 뿐만 아니라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숨겨 허술한 목책 너머로 살펴본 부락 내부는 뭐 제대로 올라간 건물이라고 할 만한 게 단 하나도 없었을뿐더러 자기들끼리 싸우는 소리도 적잖게 들려왔다.
불안정하다. 그런 확신이 생기자 좀 더 파고들어 볼까 하는 욕심이 일렁인다. 마치 척수반사처럼 툭 하고 떠오르는 그 생각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누가 전투 민족인지 원..."
만전을 기하지 못 하는 상태의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마나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 등등 확인하고 싶은 것들이 계속 샘솟는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실수와 잘못이 죽음과 직결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쉬이 포기할 수 없다.
내 목표는 저것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강할 게 뻔하니까. 여기서 주춤거릴 시간따위 없다는 것처럼 머릿속 한 켠에서 자꾸 독촉받는 기분이다.
하지만 거기에 휘둘리지는 않았다.
"정신병이야 정신병."
대신 가볍게 볼을 두드리며 고개를 내젓는 것으로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릴 적에 세웠던 최초의 계획처럼 아실리에에게 배울 거 다 배우고 각자 갈 길을 간 상태였다면 냅다 달려들어가서 몇놈까지 목을 딸 수 있나 시험해봤을 것이다. 나머지는 그 뒤에 생각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행동을 취함과 동시에 내게 등짝 스매싱을 날릴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라이카, 오크들 냄새는 좀 파악 돼?"
[응! 이제 알 거 같아! 구려!]
코를 찡그린 채 대답하는 라이카의 반응에 낄낄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만으로도 고개를 내밀던 조바심이 뒤로 밀려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잘 피해서 돌아가자. 할 일이 많다."
불안정하긴 했지만 이미 마족 놈들도 몇 번 썰어 봤고 악마도 썰었는데 조바심 낼 필요가 뭐 있겠어. 별다른 성과도 없이 등짝만 거덜나는 일 따위는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서둘러 마을로 향했다.
귀환길은 점차 눈발이 줄어드며 시야가 트이기 시작한 탓에 아까보다 한참을 빙 둘러서 가야 했다.
확실히 처음 아실리에와 함께 움직였을 때 남들보다 굉장히 앞서 나아가긴 한 것인지, 그렇게 오크들을 피하며 중간 정도 돌아왔을 때가 되어서야 한창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수색조 한 팀과 마주칠 수 있었다.
"엥? 엘드미아 님? 왜 그쪽에서 오십니까?"
오그웬에서 팔을 잘렸던 친구네 조는 굉장히 성실하게 수색에 임하고 있었던 것인지 이 추운 겨울날에도 머리 위로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있었다.
사실 내게는 글러 먹은 인간을 고쳐 쓸 수 있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있는 게 아닐까?
"오크들을 발견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혹시 주변에 다른 수색조와 마주친 적 있냐?"
"어...대충 한 십여 분 정도 전에 잠깐 마주쳤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잠깐 당황할 뿐 제대로 대답하는 걸 보니 적급은 적급이었다. 2년 남짓한 시간동안 참 열심히 산 모양이다.
"어디로 갔는지 알아?"
"쓰읍,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오른쪽 끄트머리에서 얼핏 보이길래 그냥 적당히 서로 안 보일 정도로 거리를 벌려 움직인 거라서요. 뭔 일 있습니까?"
"오크들의 규모가 생각보다 커. 전부 귀환해서 계획을 재검토해야 한다. 일단 너희는 이대로 마을로 돌아가. 그들은 내가 찾아볼 테니."
왼쪽이었으면 오크들의 부락과 멀어졌을 텐데 하필 오른쪽이라니. 조금 서둘러 움직일 필요가 있어 보였다.
돌아가라는 이야기에 황급과 청급들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과 달리 적급답게 상황을 파악한 팔 잘렸던 녀석이 내게 다가와 조용히 질문했다.
"심각한가요?"
"너희 관점에서는 심각한 게 맞다."
사실 내 관점에서도 그다지 낙관적이진 않다. 단순히 오크들을 죽이는 것과 마을에 피해가 없게 지키면서 싸우는 건 별개의 문제니까. 오크들이야 이대로 숲속에서 게릴라 전만 펼쳐도 일주일이면 쉬엄쉬엄 다 죽일 수 있을 테지만, 저 무식한 놈들은 그런 자극이 들어오면 그대로 마을을 털어먹고 관문 도시까지 달려가고도 남을 놈들이다.
'지금 숲은 위험하니 인간들이 튼튼하게 쌓아둔 도시로 가서 숨자!' 라면서 말이다. 그 튼튼한 도시로 어떻게 들어가는지는 나중의 문제겠지.
"마을에 모이면 딴생각하지 말고 불이나 쬐면서 쉬고 있으라고 단단히 일러둬라. 재수 없으면 쉬는 것도 임무인 상황이 올 테니."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한 건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녀석은 아무런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모험가들을 이끌고 서둘러 돌아갔다. 그 모습이 새끼손가락만큼 작게 보일 때쯤 나는 라이카에게 추가로 마력을 주입하며 말했다.
"저쪽으로 뛰어가면서 사람들 좀 찾아야겠다. 뭔 말인지 이해하지?"
[사람들을 발견하거나 너무 멀어졌다 싶으면 돌아오고, 교전 중이면 짖을게! 주인은 휘파람을 불어 줘!]
충전기가 연결되면 풀사양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노트북처럼 제깍 알아 듣고 행동하는 강아지라니, 난 참 운도 좋지. 심지어 대답조차 필요 없다는 것을 이해한 라이카는 그대로 몸을 돌려 평범한 개는 결코 낼 수 없는 속도로 달려 나갔다.
나 역시 이번에는 좀 속도를 내서 숲속을 뛰기 시작했다. 오크 정찰대를 피해 돌아올 땐 눈발이 너무 빨리 사그라들었다고 속으로 툴툴거렸는데, 지금은 사그라들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지형물을 파악하며 달리랴, 사람 찾으랴 정신없었지만 게으름을 피우다가 오크 정찰대와 모험가들이 부딪치는 상황보다는 나았기에 열심히 달렸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험가들을 먼저 찾아낸 건 라이카였다.
-왈! 왈!
"씨발."
하필 교전 중인 상태로 말이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그 병신같은 오크 정찰대조차 못 피하고 들켜서 쌈박질을 하는 것인지 진심으로 물어보고 싶었기에, 나는 내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소리가 난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숲속인 탓에 소리가 울렸지만 라이카가 나아간 방향을 파악하며 움직이고 있었던 터라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 달리지 않아 나는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거친 욕지거리와 고함을 내지르며 오크와 싸우는 모험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씨발 괴물 새끼들아!! 좀 뒈져라!"
오크 셋과 적, 청, 황 급 모험가가 벌이는 전투는 참으로 불리하기 그지없었다. 황급은 애초에 오크랑 싸울 수준이 아니라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순수 근력만 놓고보면 미세하더라도 오러를 두른 것에 버금가니 차라리 그게 현명한 선택이긴 했다.
그러다보니 실질적으로 적급 모험가 혼자 오크 둘을 상대하며 버티고 청급 역시 오크 하나를 붙잡고 고전하고 있는 중이었다.
"꾸이익! 익! 익! 약하다! 재미엄는 전투다! "
"시운 전투! 마싯는 식사!"
그 덕에 승리를 확신한 오크들은 되먹지 못한 발음의 공용어로 모험가들을 도발하며 긴장감 하나 없는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다. 놈들에게 농락당하는 모험가들에겐 참 미안한 일이었지만, 난 저 머저리들이 도발을 목적으로 인간들의 공용어를 익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놀라워 순간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오크 중에서도 부락을 오래 유지하며 인간과 싸워 온 놈들이나 저딴 짓을 한다고 들었다. 역시 저놈들은 이 근방에 있는 오크들과는 다른 놈들이다.
-피이이이!
일단 놀라움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그 기고만장한 꼬라지가 참으로 같잖았기에 우선 가장 가까운 놈의 머리를 노리고 바늘을 날렸다. 그러자 평소보다 확연히 출력을 낮춰 사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알싸한 부담이 느껴졌다.
오크의 머리에 바람구멍을 낼 작정으로 날린 것도 아니고 견제의 목적으로 날린 건데 이 정도일 줄이야. 아무래도 상태가 안 좋을 땐 바늘의 사용을 자제해야 할 것 같다.
"꾸에에엑!!"
"꾸익?!"
조금은 불안한 출발이었으나, 다행히 바늘은 오크놈의 한쪽 눈에 깔끔하게 틀어박혔다. 녀석들의 머리 구조상 양쪽 눈이 한 방에 꿰뚫릴 수도 있었을 텐데, 확실히 힘이 약했는지 한쪽 눈만 부여잡는 걸 볼 수 있었다. 누가 몬스터 아니랄까 봐 골격도 단단하군.
"꾸이익! 잉간! 또 잉간!"
겉모습은 참 위협적이다. 키도 나랑 비슷한데 툭 튀어나온 배조차 단단해 보이는 멧돼지라니.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비주얼이거늘 '비겁하게' 투사체로 시도한 공격에 제 동료가 다쳤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나니 더 상종하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같이 적급 모험가를 공격하던 놈이 두 눈에 핏발을 세우더니 도끼를 꼬나들고 내 쪽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비거판 잉간! 전우를 개롭히다니! 강한 오크 카쿨라 바솨가 주긴다!"
저 앞, 뒤, 위, 아래로 거대한 몸뚱이가 지닌 무게를 짐작케하는 울림이 발바닥으로 느껴질 정도였지만 정작 나는 어이없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전우애가 있는 건 좋지만, 궁예가 된 채 얼굴을 부여 잡고 고통스러워하던 제 동료가 마주하고 있는 적급 모험가에게 무방비한 상태로 연신 칼침을 맞기 시작하는 걸 깔끔하게 무시하고 돌격하는 모습은 슬랩 코미디와 다를 바 없었다.
"꾸이이익! 아, 아프다!"
"꾸익! 나는 카쿨라 바솨다!!"
뭐... 이미 눈이 돌아간 오크 놈에게 그딴 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진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돌대가리구나."
그래도 지들 언어로 꾸이익 거리는 게 아니라 나름 말까지 해서 조금은 기대해 봤지만 오크는 오크였다. 나는 강렬한 자기 어필과 함께 달려오는 오크에게 묘한 불쾌감을 느끼며 검을 뽑아 들었다.
계획에는 없었던 착한 오크 세 마리가 만들어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