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드나 벡헨은 생각했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마주친 누군가가 뜬금없이 자신이 바로 최근 명성이 자자한 유명인이라고 했을 때,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말을 진지하게 들을까? 장담컨데 열에 여덟은 믿지 않을 것이다. 남은 둘 중 하나는 멍청해서 곧이곧대로 믿을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세상 미친놈 다 보겠다는 태도를 보이며 지나갈 게 분명하다.
그건 이상한 게 아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런 말을 믿는 게 이상한 거다. 물론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면 될 것을 굳이 비아냥거리고 비웃는 것 역시 잘한 짓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걸 믿지 않았다고 해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건 많이 억울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 벌이라는 게 단순히 바닥에 머리를 박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력 미달의 모험가 둘을 데리고 오크 셋과 마주치는 형태라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처사다.
저 돼지 새끼들은 기술은 없을지언정 무식한 힘과 덩치가 있었고, 아무리 적급으로 잔뼈가 굵어졌다고 한들 그런 육체적 격차를 손쉽게 극복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오러를 개화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서 같은 적급, 무리 지은 고블린 보다 오크가 더 상대하기 힘들다. 그나마 칼이라도 박히니 상대 못 할 건 없지만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하물며 같은 인간마저도 협공으로 들어오면 힘든 법이다. 지금도 일격을 휘두를 때마다 굵직한 나무를 한움큼씩 파내버리는 오크 두 마리가 협공의 개념없이 엎치락뒤치락해서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우연의 산물로 두 마리의 공격이 절묘하게 들어올 때마다 바드나는 죽음이 한 발짝 다가옴을 느껴야 했다.
그런 생명의 위협에 끝을 고한 것은 어디선가 들려온 개 짖는 소리였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신경을 돌릴 여유따윈 없었기에, 그 소리가 이런 상황에 놓이게 만든 가장 큰 원인 제공자의 등장을 의미한다는 것을 바드나는 알지 못했다. 바드나가 엘드미아의 등장을 알아차린 것은 자신을 공격하던 오크 한 놈의 눈에 뜨개질 바늘 같은 게 틀어박히는 걸 보고 나서였다.
평생 느껴보지 못했을 격통에 몸을 움츠리며 비명을 지르는 오크는 내버려 둔 채 고레고레 소리를 지르며 엘드미아에게 달려가는 다른 오크 때문에 잠깐 벙찌긴 했으나 바드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칼을 놀렸고, 갑작스러운 고통에 고통이 더해지는 탓에 패닉에 빠진 오크는 방금 전까지의 기세가 무색하게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 해 보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제서야 살아남았다는 것을 실감한 바드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엘드미아를 바라보았다. 어제 쥐어터져 보며 느낀 바, 분명 오러를 쓸 줄 아는 놈이었으니 오크 정도는 손쉽게 무찌를 것이다. 자기는 그렇게 쉽게 쓰러트릴 수 있으니 우리같은 놈들을 신경 쓰지 않고 이런 위험한 계획을 세운 거겠지.
"하여간 오러 쓴다는 새끼들은 죄다 지들 기준으로 세상을 본다니까."
목숨을 건진 것은 사실이었으나 위험에 빠지게 된 것 역시 엘드미아 때문이었기에 바드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마을 안에서 다 같이 모여 있었다면 이런 놈들에게 위협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라 여기면서.
"꾸이이익!! 전투!"
불만과 괘씸한 마음이 일렁이는 사이 청급 모험가를 괴롭히던 오크마저 강한 적에 열광하며 엘드미아를 향해 무지성 돌격을 시도했다. 그 뒤를 잡는다면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미 불만이 차오를 대로 차오른 바드나는 옆을 지나쳐 달려가는 녀석을 멀뚱히 방치했다. 어차피 쉽게 이길 게 뻔했으니 조금이라도 더 고생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취한 행동이었다.
냅다 달려간 오크와 교전하는 엘드미아의 측면을 노리고 뒤늦게 달려간 오크가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을 보며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는 동안에도 바드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저 싸움이 빨리 끝나 마을에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엘드미아가 싸우는 것을 구경할 뿐. 어차피 오러 유저의 전투는 백날 봐도 얻을 게 없었기에 잠깐 보다가 눈을 돌려 다른 모험가들을 챙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크 한 마리가 더 추가된 다음에도 여유롭게 이어지는 전투에서 바드나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꾸이익! 주거라! 아니, 마자라!"
"꾸익! 이! 물꼬기! 가튼 잉간! 당당하게 부디쳐라!"
움직임이 눈에 보인다. 그냥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저 정도 움직임은 자신도 가능한 수준이었다.
"이런 미친."
방금 전의 사투로 인해 자신이 오러에 눈 떴을 가능성은 전무했으니, 결국 엘드미아는 지금 오러를 쓰지 않은 채 맨몸으로 오크 둘을 상대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쓸 수 있으면서 굳이 저 지랄을?"
마법사는 체력이 약하고 기사는 체력이 좋다는 이야기가 있다. 얼핏 보면 단순하게 맞는 이야기지만, 그렇게 되는 원인을 따지고 보면 반드시 맞아떨어지는 말도 아니다.
마나를 사용하는 마법사는 굳이 육체를 쓸 이유가 없기에 자연스럽게 약해진다. 마법사 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다. 안 쓰는 근육은 약해지는 법. 당장 배틀 메이지들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전사들 뺨치는 육체를 지니는 경우가 허다니 마나를 익힐수록 체력이 약해지는 상관 관계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순히 마나가 육체 노동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으니까 안 움직여서 약해지는 거다.
그럼 오러를 쓸 수 있는 이들은?
하루 12시간 씩 검을 휘둘러서 얻는 힘보다 한순간의 오러 개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힘이 더 많은데, 그들이 굳이 육체 단련에 과도하게 연연할 이유가 있을까? 무식하게 검만 휘두른다고 오러가 더 늘어나는 것도 아닌데?
당연히 그럴 이유가 없다. 오러를 개화하기 전에는 당연히 미친 듯이 노력하겠지만, 눈을 뜬 순간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에 품은 오러를 키우는 데 집중하지 육체 단련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힘과 지구력을 비롯한 모든 신체 능력이 오러로 강화 가능할 뿐만 아니라 마나와 달리 외적 요인으로 방해 받거나 무력화 될 위험도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꾸준히 오러를 단련해서 한계만 늘릴 수 있으면 술배 그득히 나온 아저씨라 하더라도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기본기와 체력에서 오는 차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 격차는 오러에서 더 크게 적용된다. 오러 운용에도 수준이 나뉘고 격의 차이가 있는 만큼 눈을 떴으면 하루라도 더 빨리 잘 쓸 수 있게 시간을 투자하고, 육체는 그게 막혔을 때 심신을 비우기 위해 단련하는 부수적인 것으로 바뀐다.
얼핏 다재다능해 보이는 마법 기사와 배틀 메이지같은 이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경우가 적은 데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마나와 오러를 동시에 익히는 것만으로도 빠듯한데 육체 단련까지 반드시 병행하는 삼중고에 시달리게 되니까. 대륙에 이름을 날릴 정도로 유명한 이들이 아닌 이상에야 대부분 그렇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은 그런 바드나의 상식 중 하나를 면전에서 걷어차고 있었다.
조금도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바드나조차 술자리에서 한 번씩은 주워 들었던 검술의 기본이라는 것들마저 보였다. 엘드미아는 오직 그것만으로 오크 둘을 상대하며 무슨 실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사각으로 파고들어 주먹을 날려보기도 하고, 인간이었으면 움직일 수 없었을 일격을 오크들의 다리에 수차례 찔러 넣으며 어디까지 버티는지 확인한다. 그 모든 움직임은 바드나도 가능한 수준임이 분명했다.
그 모습이 마치 보고 있는 자신에게 방금 전까지 위태로웠던 건 오크가 강해서도, 바드나가 오러를 쓰지 못해서도 아닌 그저 게을렀기 때문이라고 질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신 승리나 자기 합리화를 시도 할 틈도 없이 와닿은 현실에 바드나가 느낀 건 강한 자괴감이었다.
◈
인간은 기술을 사용하기에 인간이라고 했던가.
역시 오크들은 힘만 좋은 샌드백에 불과했다. 뜬금없이 한 마리가 더 추가되었을 땐 뭔가 싶었지만, 실험 대상이 늘어나는 것이니 나쁠 건 없었다. 그렇게 협공이라는 개념조차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두 놈은 보법에 신경 써서 위치만 잘 잡아도 서로에게 도끼질을 해대는 유쾌한 광경을 보여 주었고, 마력을 사용하지 않은 육체로 어디까지 가능한지에 대한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명을 달리했다.
"꾸, 꾸이이익..."
오러를 두른 게 아니라 그저 근육량으로 밀고 오는 것에 불과했기에 칼은 잘 박혔다. 이럴 때 보면 길드의 의뢰 등급이라는 건 꽤 정확도가 높은 편이라니까. 확실히 적급 정도면 상대할 만한 녀석들이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장려해서 오크들이랑 맞짱을 뜨게 만들어야 할 정도였다.
기술도 지능도 없이 힘만 있는 존재라니, 살아 숨 쉬는 전투력 측정기 그 자체다.
심지어 훈련이 끝나면 착해지기까지 하잖아?
"오크 놈들 위치를 알아냈다. 정비가 끝나면 말해라. 바로 돌아갈 테니까."
죽을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놈들을 보고 홀로 버티던 적급을 바라보니 무엇이든 맛없게 먹는 바드나였다. 그 상황에서 혼자 도망치지 않은 황급도 그렇고, 오러도 없이 오크 둘을 몸으로 버텨 낸 쟤도 그렇고, 마인드는 어떨지 몰라도 실력과 강단만큼은 나름 쓸 만했다.
기가 죽은 건지 아니면 그새 또 뭘 주워 먹어서 더럽게 맛없는 걸 먹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지 쉬이 분간이 가지 않는 바드나가 내 말을 듣더니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규모가 큰 겁니까?"
"좀 크다. 어차피 돌아가서 이야기하겠지만 당장 라비엘에 한 번 더 연락해야 할지도 모르겠더군."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어수룩한 인간은 아니었는지 바드나의 얼굴이 금세 심각해졌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고생한 라이카에게 마력을 좀 더 주며 내 생각을 정리하기 바빴다.
나름 대장이라고 거들먹 거리고 있던 바드나조차 오크 두 마리를 상대하는 걸 버거워했다. 그럼 팔 잘렸던 녀석도 잘해야 셋을 상대하려나?
오크들이 물량으로 돌격하면 협공을 하는 것도 녹록치 않기에 전투원들의 능력이 부족한 건 여러모로 치명적이었다.
"후우, 수도에까지 연락을 돌릴 여유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냥 마을 포기하면 되는 거 아니야?]
마력을 먹고 똑똑해진 라이카가 간단한 해결방안을 내놓았다. 나는 모험가들과 거리가 충분히 있는 걸 확인한 뒤 라이카를 안아 들며 나직이 속삭였다.
"마을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 거야."
[원하지 않으면?]
그들은 이미 마족을 피해 고향을 포기해야 했고, 반란군에 의해 마을까지 한 번 포기해야 했다. 심지어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와 터전을 닦기 위해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지켜야지."
묘한 동질감에 휘둘리는 것일수는 있으나, 그들에게 세 번째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다.